희빈 장씨

왕족, 정치인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20:58:5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희빈 장씨
연혁 피인용 수 1
왕족, 정치인
report
Edit

조선 숙종의 후궁이자 제20대 왕 경종의 어머니이다. 중인 출신 궁녀에서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서인과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폐비되어 사사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조선시대 권력 다툼의 희생양으로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희빈 장씨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659

[희빈 장씨 탄생]

조선 숙종의 후궁이자 제20대 왕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한성부 상평방에서 역관 장형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옥정이다.

희빈 장씨는 1659년 11월 3일(음력 9월 19일) 한성부 상평방에서 역관 장형과 파평 윤씨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이복 오빠 장희식, 동복 언니 한 명, 동복 오빠 장희재가 있었다. 그녀의 일족은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낮지 않았다.

1680

[희빈 장씨 강제 출궁]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 김씨 사망 후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으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강제로 출궁되었다.

1680년 10월 26일,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요절했다. 장씨가 숙종을 모시게 된 시기는 불분명하나, 인경왕후 사망 후에 숙종을 모셨다는 기록이 많다. 1680년 겨울, 희빈 장씨는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강제로 출궁되었다. 숙종실록 등에는 장씨의 천한 출신과 극악한 성품을 이유로 들었지만, 경신환국 당시 명성왕후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가 장씨 일가를 몰락시킨 장본인이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장씨의 보복을 견제한 탓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출궁 직후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인현왕후 민씨가 간택된 점으로 보아 민씨를 위한 정치적 제거였을 가능성도 있다. 출궁 후 장렬왕후의 배려로 숭선군 부인 신씨의 보호를 받으며 오라비 장희재 부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1686

[희빈 장씨 재입궁과 숙종의 총애]

명성왕후의 3년상이 마쳐진 후, 희빈 장씨가 다시 궁으로 입궁했다. 재입궁 후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며 그녀의 입지가 강화되자, 서인과 인현왕후 민씨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명성왕후 김씨의 3년상이 1685년 12월 5일에 마쳐지자, 1686년 2월 27일 후궁 간택령이 내려졌고 이 기간 사이에 희빈 장씨가 재입궁했다. 재입궁 후 숙종의 총애가 지극해지자 서인과 인현왕후 민씨는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김수항의 종손녀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입궐시켰다. 인현왕후는 장씨를 훈계한다며 아랫사람을 시켜 매질하게 하는 등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같은 해 12월, 숙종은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직접 책봉하여 정식 후궁으로 만들었으며, 인현왕후와 다른 후궁들에게서 분리시키기 위해 창경궁에 그녀의 처소를 새로 건축했다.

1688

[장 소의, 왕실의 첫 아들 원자 윤(경종) 출산]

소의로 승격한 장씨가 숙종의 첫 아들이자 훗날 제20대 왕 경종이 되는 '윤'을 출산했다. 이는 왕실의 큰 기쁨이자 장씨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나, 서인 세력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1688년, 장씨는 소의로 승격했고 같은 해 10월 28일 숙종의 장남이자 왕실이 고대하던 아들 '윤'을 낳았다. 이 왕자가 훗날 조선 제20대 왕 경종이 된다. 숙종실록에는 10월 27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경종대왕 묘지문과 행장에는 10월 28일로 적혀있어 후자의 날짜를 따른다. 서인은 자의대비의 국상 중임을 내세워 숙종의 득남에 축하 인사조차 드리지 않는 등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다음 달인 11월 12일에는 원자 윤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입궁하던 장씨의 생모 윤씨가 국법을 어기고 옥교를 탔다는 이유로 사헌부 관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하인들이 체포당하는 '옥교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689

[기사환국 발발과 왕비 책봉 기반 마련]

송시열의 원자 정호 철회 상소를 계기로 숙종이 격노, 서인 세력을 대거 숙청하고 남인을 등용하는 기사환국이 발발했다. 이 정치적 격변으로 인현왕후가 폐서인되고, 희빈 장씨가 조선 역사상 최초로 궁녀 출신 왕비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1689년 2월 1일, 인현왕후의 외가 친척인 송시열이 이미 종묘에 고한 원자 윤의 정호를 철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송시열을 치죄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서인으로 구성된 승정원이 왕명을 거부했다. 이에 숙종은 분개하여 삼사와 승정원 등 왕의 최측근 요직에 있던 서인을 파직하고 경신환국 때 실권했던 남인을 조정으로 불러 교체하는 '기사환국'을 일으켰다. 이어진 숙종의 강력한 추진으로 5월 2일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되어 강제로 출궁되었고, 5월 13일 희빈 장씨가 왕비 명호를 받게 되면서 궁녀 출신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를 전례 없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녀의 정식 왕비 책봉은 이듬해 1690년 10월 22일에 이루어졌다. 숙종은 장씨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그녀의 선조 3대를 정승으로 추증하고 외조부와 외삼촌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1694

[갑술환국 발발 및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

폐비 민씨 복위 움직임을 계기로 숙종이 남인 세력을 숙청하고 소론을 등용하는 '갑술환국'을 일으켰다. 이 정치적 대격변으로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되었고, 장씨는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희빈으로 강등되는 비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1694년, 서인의 김춘택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남인 영수 민암 등은 이를 기회로 반대당인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나, 숙종은 돌연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했으며 권대운, 목내선 등을 유배 보냈다. 대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등을 등용하며 정국을 전환하는 '갑술환국'을 일으켰다. 갑술환국 발발 12일째인 4월 11일, 숙종은 장희재를 긴급 구속하고 폐비 민씨의 서궁 입처를 명했다.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의 중재로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되었고, 장씨는 왕후의 옥보를 거두고 희빈의 옛 작호로 강등되어 창경궁 취선당으로 거처를 옮기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부모 작호 또한 취소되었다. 이 사건은 장씨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가장 큰 몰락의 전환점이었다.

1701

[무고의 옥 발생]

인현왕후 사망 후, 숙빈 최씨의 발고로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이 발생했다. 장씨는 취선당에 신당을 설치하고 저주굿을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1701년 9월 16일(음력 8월 14일), 인현왕후 민씨가 오랜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1701년 9월, 인현왕후와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발고했다.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후 또한 인현왕후가 생전 자신의 병이 장씨의 저주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발고했다. 장씨 측은 신당이 1699년 세자의 두창 쾌유를 기원하기 위함이었고 완쾌 후에도 무당의 말에 따라 철거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무고의 옥은 증거 부족과 고문으로 인한 증언의 신빙성 문제 등으로 오늘날까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희빈 장씨 사망]

무고의 옥 사건 조사와 숙종의 단호한 결심에 따라 희빈 장씨는 43세의 나이로 자진을 명받아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조선 왕실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1701년 11월 9일(음력 10월 10일), 희빈 장씨는 무고의 옥으로 인해 숙종의 명을 받고 자진했다. 향년 43세였다. 《인현왕후전》 등 야사에서는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 것으로 묘사되지만,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정사 기록에는 자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사사설을 부정하는 내용이 존재한다. 숙종은 그녀의 죽음 후에도 세자 윤에게 상주로서 망곡례를 행하게 하는 등 파격적인 예우를 베풀었다. 그녀의 무덤은 왕실 종친부 1품의 예로 단장되었으며, 이후 아들 경종에 의해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었다.

1722

[경종, 생모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이 즉위한 후, 생모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했다. 이는 숙종의 금지령 때문에 왕후로 추존하지 못한 조치였으나,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생모 장씨를 추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으나 노론의 반발로 지연되었다. 1721년 신임사화로 노론이 숙청된 후, 1722년 경종은 비로소 생모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했다. 숙종이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어명을 내렸기에 즉시 왕후로 추존할 수 없었으나, 옥산부대빈에 대한 예우는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과 일치했다. 경종은 장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했으나 재위 4년 만인 1724년 사망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함으로써 노론의 천하가 되자 옥산부대빈 장씨의 위치는 대역죄인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