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조선)

조선 국왕, 왕족,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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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11- 02: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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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8대 국왕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형의 요절 후 왕세자가 되었다. 19세에 즉위했으나 병약하여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을 보냈다. 재위 중 정희왕후의 조선 최초 수렴청정과 원상제도 아래 훈구파의 영향력이 컸으며, 남이의 옥 사건이 발생했다. 재위 2년 만에 젊은 나이로 승하하며 왕위 계승에 정치적 파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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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

[조선 8대 국왕 예종 탄생]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해양대군'에 봉해졌다. 훗날 조선의 8대 국왕이 되는 예종의 탄생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세조)과 낙랑부대부인 윤씨(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해양대군에 봉해졌다.

1457

[해양대군, 왕세자로 책봉되다]

형 의경세자(덕종)가 일찍 사망하자, 해양대군 이황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미래의 국왕이 될 준비를 시작했다.

형인 의경세자(덕종)가 훙서(薨逝)하자 같은 해 해양대군 이황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60

[첫 번째 세자빈 장순왕후, 요절하다]

한명회의 딸 한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으나, 아들 인성대군을 낳고 이듬해 세자빈 한씨가 산후병으로 요절했다.

한명회의 딸 한씨(장순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세자빈 한씨는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며칠 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1463

[새 세자빈 안순왕후를 맞이하다]

첫 세자빈의 3년상을 마친 후, 한백륜의 딸 소훈 한씨를 새로운 세자빈(안순왕후)으로 맞이했다.

장순왕후의 3년상을 마친 후 새로이 세자빈을 맞이하지 않고 간택 후궁인 한백륜의 딸 소훈 한씨(안순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468

[즉위 직후, 남이의 옥 사건 발생]

즉위 직후, 병조판서 남이 등이 유자광의 무고로 역모 혐의를 받아 처형된 '남이의 옥' 사건이 발생했다.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이의 옥 사건이 일어났다. 병조판서 남이와 그를 따르던 이들이 유자광의 무고로 역모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으며, 이 사건은 훈구파 세력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19세에 즉위,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시작]

병환이 깊어진 세조의 선위로 19세에 즉위했으며, 조선왕조 최초로 어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병환이 깊어진 세조의 선위로 수강궁 중문에서 19세에 즉위하였다.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 세조는 다음 날 승하했다. 즉위는 했으나 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행한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선왕 세조가 만든 원상제도가 시행되어 실권은 없었고, 사실상 정책을 결정한 것은 세조 때의 공신들인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파였다.

1469

[일본과의 삼포 개별 무역 금지 시행]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고 매관매직을 통해 전횡을 일삼던 공신들의 분경을 금지하려 노력했다.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다. 그 외에도 병영에 딸려 있는 논과 밭을 일반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매관매직을 통해 공신들이 전횡을 일삼자 분경(奔競)을 금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경국대전》 완성, 그러나 반포는 미뤄지다]

선왕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법전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으나, 예종은 이를 반포하지 못한 채 승하했다.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다. 예종은 이를 반포하지 못한 채 승하하였다.

1470

[조선 8대 국왕 예종, 젊은 나이에 승하하다]

봉와직염 악화로 추정되는 패혈증으로 재위 1년 6개월 만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진시(오전 7시~9시)에 자미당에서 승하하였다. 사인은 봉와직염의 악화로 인한 패혈증으로 추정된다. 묘호는 예종 자신의 유지에 따라 '예종'(睿宗)이며, 시호는 '흠문성무의인소효'(欽文聖武懿仁昭孝)이다. 능은 서오릉 중 하나인 창릉으로, 계비 안순왕후와 합장되었다.

[정희왕후의 결단, 성종이 새 국왕으로 즉위하다]

예종 승하 당일, 왕대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조선 9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예종이 승하한 당일, 왕대비였던 정희왕후의 명으로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는 정희왕후와 수빈 한씨(인수대비), 그리고 자을산군의 장인이었던 한명회 등 정치적 결탁으로 인한 결과였다. 왕위 계승 서열 첫 번째인 원자(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당시 3살)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제외되었고, 계승 서열 두 번째인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군 또한 병약하다는 이유로 후계자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원자는 제안대군으로 봉해졌다.

1489

1489.04.17 사후 19년

[예종의 상궁 기씨 사망]

예종의 후궁이었던 상궁 기씨가 승하했다.

성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예종의 상궁 기씨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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