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 서스펜스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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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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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스 영화의 대가 앨프리드 히치콕은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전설적인 영화 감독이자 제작자입니다. * 무고한 사람들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휘말리는 독특한 서스펜스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 감독 외에도 제작, 각본, 편집,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습니다. * 《현기증》, 《싸이코》, 《레베카》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기며 최초의 스타 감독으로 평가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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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출생]

영국 런던 레이턴스톤에서 농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앨프리드 조지프 히치콕은 1899년 8월 13일, 농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의 막내아들로 런던의 레이턴스톤에서 태어났습니다. 1910년부터 스탬퍼드힐에 있는 예수회 소속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그에 따른 체벌은 10대 시절의 히치콕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0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 입학]

스탬퍼드힐에 있는 예수회 소속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10년부터 스탬퍼드힐에 있는 예수회 소속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그에 따른 체벌은 10대 시절의 히치콕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3

[학교 졸업]

학교를 마쳤으나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1913년 학교를 마쳤지만 앨프리드 히치콕은 아직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1914

[아버지의 사망과 직업 생활 시작]

아버지 윌리엄이 신장염으로 사망했습니다. 히치콕은 전신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으나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1914년 아버지 윌리엄이 신장염으로 사망했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전신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으나 이 직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여 상관의 도움으로 광고부로 이직했습니다. 이 시기 영화와 문학에 심취했고, 특히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에 매료되어 훗날 공포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919

[영화계 입문]

영화사에서 자막 도안 일을 시작하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영화 제작 기술을 익혔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1919년부터 영화사에서 자막을 도안하는 일을 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곳에서 영화 제작 기술을 익혔습니다.

1922

[공동 감독 데뷔]

시모어 힉스와 공동으로 영화 《항상 부인에게 얘기하세요》를 감독하며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1922년 앨프리드 히치콕은 시모어 힉스(Seymour Hicks)와 함께 공동으로 영화 《항상 부인에게 얘기하세요》(Always Tell Your Wife)를 감독했고,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공동 감독 데뷔작입니다.

1926

[앨마 리빌과의 결혼 및 이직]

영화 편집자 앨마 리빌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에 스카웃되었습니다.

영국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신인 감독으로 자리잡은 앨프리드 히치콕은 1926년 1월 2일 영화 편집자 앨마 리빌(Alma Reville)과 결혼했고,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British International Pictures)에 스카웃되었습니다. 이 회사에서 만든 첫 영화 《링》은 히치콕과 엘리엇 스태너드가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적인 기법이 도입되었습니다.

1927

[독특한 연출 스타일 확립]

영화 《하숙인》을 통해 평범한 일상 속에 악이 침투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세 번째 영화인 《하숙인》(The Lodger)은 평범한 일상 속에 갑작스럽게 악이 침투한다는 히치콕 특유의 설정을 바탕으로 하여, 그가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탄생시킨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1929

[유성영화 《협박》의 성공]

유성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연극 대본을 원작으로 한 영화 《협박》에 부분적으로 소리를 집어넣어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1929년 유성영화의 시대가 열리자 앨프리드 히치콕은 연극 대본을 원작으로 하는 자신의 영화 《협박》(Blackmail)에 부분적으로 소리를 집어넣었고, 이 영화는 평단과 관객 양쪽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히치콕은 영화제작사 측의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연극작품을 영화화하려는 경향'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1935

[범죄 스릴러 전성기]

고먼트 브리티시 사와 재계약 후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39계단》 등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범죄 스릴러 영화들을 제작했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고먼트 브리티시 사와 재계약하며 자신이 바라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범죄 스릴러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The Man Who Knew Too Much), 《39계단》(The 39 Steps), 《비밀 첩보원》(Secret Agent), 《사보타주》(Sabotage) 등 그의 영국에서 만든 대표작들이 발표되었습니다.

1938

[미국 할리우드 진출]

미국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과 계약하며 미국 진출을 결정지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앨프리드 히치콕은 미국 진출을 결정지었고, 1938년 7월 오래전부터 알던 미국의 제작자 마이런 셀즈닉의 동생 데이비드 O. 셀즈닉과 계약했습니다. 감독들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리는 셀즈닉과의 공동 작업은 곧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40

[할리우드 데뷔작 《레베카》의 성공]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레베카》가 아카데미 작품상과 촬영상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레베카》는 제작자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촬영상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영화들 중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유일한 작품입니다. 이후 히치콕은 《의혹》, 《스미스 부부》, 《파괴 공작원》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1954

[대표작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 발표]

《다이얼 M을 돌려라》와 《이창》을 발표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작자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영화 제작사 트랜스애틀랜틱 픽처스를 세웠으나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앨프리드 히치콕은 신인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판권을 사들여 만든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성공에 이어, 1954년 《다이얼 M을 돌려라》와 《이창》을 연이어 발표하며 다시 한번 흥행 감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55

[《히치콕 극장》 진행 시작]

TV 시리즈 《히치콕 극장》의 사회와 작품 감수를 맡으며 대중적 인기를 높였습니다.

1955년부터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히치콕 극장》 시리즈(Alfred Hitchcock Present)의 사회, 작품의 원작과 주제 선정, 감수를 맡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업계가 TV와의 경쟁으로 고전하던 시기에 자신의 인기를 높이고 이름을 알렸습니다.

1956

[미국 시민권 취득]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나 영국 시민권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1956년에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지만, 1980년 당시까지 영국 시민권을 포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영국의 훈장을 정식으로 받는 데에 절차상 문제되는 점은 없었습니다.

[추리소설 잡지 창간]

추리소설 잡지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을 창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956년 12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추리소설 잡지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Alfred Hitchcock Mystery)을 창간하였습니다. 실제로 히치콕 감독은 잡지의 편집 등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이름과 초상권을 대여해준 것뿐이었지만 이 잡지로 인해 그는 연간 1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습니다. 초기에는 평범하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우수 작가들의 참여로 콘텐츠 수준이 높아지면서 꾸준히 간행되고 있습니다.

1958

[《히치콕 극장》 골든 글로브상 수상]

《히치콕 극장》 시리즈가 그 해 최고의 방송 시리즈로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했습니다.

1958년 앨프리드 히치콕이 진행하는 《히치콕 극장》 시리즈(Alfred Hitchcock Present)는 그 해의 최고 방송 시리즈로서 골든 글로브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1961년부터는 방영 시간이 30분에서 1시간으로 늘어나며 제목도 《Alfred Hitchcock Hour》로 바뀌었습니다.

[대표작 《현기증》 발표]

대표작 중 하나인 《현기증》을 발표했습니다.

이 시기 앨프리드 히치콕은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에 이어, 1958년에는 《현기증》(Vertigo)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며 영화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59

[대표작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발표]

대표작 중 하나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발표했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1959년에 대표작 중 하나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발표했으며, 이 영화에는 그의 대표적인 기법인 맥거핀이 두 가지 형태로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1960

[대표작 《싸이코》 발표]

그의 영화 중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인 《싸이코》를 발표했습니다.

1960년 앨프리드 히치콕은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싸이코》(Psycho)를 발표했습니다. 이 영화는 공포 영화 장르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서스펜스 영화의 정점으로 평가받습니다.

1961

[《히치콕 극장》 확장]

《히치콕 극장》 시리즈가 인기가 높아져 방영 시간이 한 시간으로 늘어나고 제목도 《Alfred Hitchcock Hour》로 바뀌었습니다.

1961년부터 《히치콕 극장》 시리즈는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자 방영 시간이 30분에서 한 시간으로 늘어났습니다. 제목도 《Alfred Hitchcock Hour》로 바뀌며 앨프리드 히치콕의 대중적 인기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1972

[《프렌지》로 복귀 및 성공]

일흔을 넘긴 나이에 다시 메가폰을 잡고 영화 《프렌지》를 발표하여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이후에 발표한 《찢어진 커튼》, 《토파즈》는 이전만큼의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앨프리드 히치콕은 일흔을 넘긴 나이에 다시 메가폰을 잡고 1972년 《프렌지》(Frenzy)를 발표해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1976

[마지막 영화 《가족 음모》 발표]

자신의 마지막 영화인 《가족 음모》를 발표했습니다.

평소 과체중에 음주가 잦았던 앨프리드 히치콕은 점차 건강이 악화되었고, 자신의 마지막 영화 《가족 음모》(Family Plot)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차기작을 준비할 생각이었으나 더 이상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영화감독에서 은퇴했습니다.

1980

[대영 제국 훈장 서훈]

대영 제국 훈장 2등급(KBE)을 서훈 받았습니다. 이는 사망 이전에 발표된 것으로 추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1980년 앨프리드 히치콕은 대영 제국 훈장 2등급(KBE, 작위급 훈장)을 서훈 받았습니다. 이 훈장은 사망 이전에 1980년 신년 서훈으로 발표된 것으로, 추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1956년에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지만 영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아 훈장 수여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공식 석상 등장]

미국 영화연구소 시상식에서 연설하며 공식 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980년 4월 16일, 앨프리드 히치콕은 미국 영화연구소 시상식에서 연설하며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사망]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태평양 바닷가에 뿌려졌습니다.

1980년 4월 29일, 앨프리드 히치콕은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향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화장 후 태평양 바닷가에 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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