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배우, 코미디언, 영화 감독, 음악가, 영화 제작자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8- 18:31:01
찰리 채플린은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빈곤 속에서 태어나 무성 영화 시대의 세계적인 아이콘이 된 영국 배우, 코미디언, 영화 감독이자 음악가입니다. '리틀 트램프' 캐릭터로 전 세계적 사랑을 받았으며, 자신의 영화 대부분을 직접 제작, 감독, 각본, 주연, 음악까지 맡은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작품에 사회 비판과 풍자를 담아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치적 논란과 매카시즘으로 미국에서 추방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수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1889
[출생 및 불우한 어린 시절]
영국 런던에서 뮤직홀 가수이자 배우였던 부모님 사이에서 찰스 스펜서 채플린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1889년 4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뮤직홀에서 공연하는 가수이자 배우였습니다. 채플린이 3세가 되던 해 부모가 이혼하였으며 이후 어머니와 함께 여러 곳을 이사하며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이 있었고, 1901년 결국 알코올 의존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채플린은 9살이 되기 전까지 보육원에 2차례 보내졌고, 14살에는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등 가난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1894
[5세, 무대 위로의 데뷔]
알더샷 극장 무대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어머니를 대신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습니다. 관객들이 던진 동전을 줍겠다고 노래를 멈추는 당돌함으로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이것이 전설적인 코미디언의 첫 공연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실패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6
[한웰 학교(구호소) 수용]
가정 형편이 극도로 악화되어 7세 때 빈민 구호소인 한웰 학교에 수용되었습니다. 삭발과 체벌이 일상인 그곳에서 겪은 굴욕감과 권위에 대한 공포는 훗날 그의 영화 속 '경찰'이나 '공장장' 캐릭터에 투영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정신병원 입퇴원이 반복되면서 채플린과 형 시드니는 고아원과 구호소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는 런던 거리의 취객과 빈민들의 몸짓을 관찰하며 연기를 배웠습니다.
1908
[프레드 카노 극단 입단]
형 시드니의 추천으로 당대 최고의 코미디 기획자 프레드 카노의 극단에 합류했습니다. 이곳에서 정교한 신체 연기와 팬터마임의 정수를 배우며 완벽주의적 기질을 다졌습니다.
'술 취한 신사' 연기 등을 통해 비틀거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이는 '리틀 트램프'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헤티 켈리와의 만남]
프레드 카노 극단에서 일하던 중 헤티 켈리를 만나 연인 관계를 맺었으나, 켈리의 어머니 반대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채플린은 프레드 카노의 극단에서 일하던 1908년에 헤티 켈리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헤티 켈리의 어머니가 둘의 사랑을 금지하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켈리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습니다.
1910
[첫 미국 순회 공연]
프레드 카노 극단과 함께 미국 순회 공연에 나섰습니다. 이 공연에서 미래의 희극 배우 스탠 로렐과 한 방을 쓰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찰리 채플린은 프레드 카노와 함께 미국 순회 공연에 나섰습니다. 1910년 5개월 동안 순회를 마친 뒤 영국으로 돌아갔다가 1912년 다시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순회 공연 동안 채플린은 뒷날 스탠 로렐로 널리 알려진 희극 배우 아서 스탠리 제퍼슨과 한 방을 썼습니다.
1912
1912년 미국 순회 공연이 끝난 후, 동료 로렐은 영국으로 돌아갔으나 채플린은 미국에 체류하며 영화 제작자의 초청을 받아 할리우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됩니다.
1913
[할리우드 진출 (키스톤 스튜디오)]
미국 순회공연 중 맥 세넷의 눈에 띄어 키스톤 스튜디오에 영입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거친 슬랩스틱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해 고전했으나, 곧 자신만의 템포와 스타일을 관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주급 150달러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하며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맹렬한 속도감보다는 캐릭터의 심리와 상황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연기를 선호했습니다.
1914
['리틀 트램프' 캐릭터 첫선]
키스톤 스튜디오에서 '마벨의 이상한 재난'에 출연하며 그의 상징적인 '리틀 트램프' 캐릭터를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이 캐릭터는 이후 전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맥 세넷의 키스톤 스튜디오에 발탁된 채플린은 《생활비 벌기》(1914)에 처음 출연했으며, 1914년 2월 9일 제작된 《마벨의 이상한 재난》에서 둥근 챙모자에 꽉 끼는 웃도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지팡이를 든 그의 전형적인 '리틀 트램프'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이 캐릭터는 곧바로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채플린을 스타덤에 올렸습니다.
1916
[뮤추얼 필름과의 대규모 계약]
뮤추얼 필름과 12개의 영화를 제작하는 조건으로 67만 달러에 계약했습니다. 이 시기에 《손쉬운 길》, 《전당포》 등 많은 히트작을 남기며 미국의 대표적인 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16년 뮤추얼 필름은 채플린에게 12개의 영화를 제작할 것을 요청하며 67만 달러를 지급했습니다. 채플린은 이후 18개월에 걸쳐 12개의 영화들을 만들었으며, 이때 만들어진 작품 가운데 《손쉬운 길》(Easy Street), 《어느 날 오전》(One AM), 《전당포》(The Pawnshop), 《모험가》(The Adventurer) 같은 영화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영화들은 크게 성공하였으며 채플린은 미국의 대표적인 배우로 떠올랐습니다.
1918
[밀드레드 헤이스와의 결혼]
배우 밀드레드 헤이스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채플린은 창작의 고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1918년 밀드레드 헤이스와 결혼했지만, 채플린은 점점 더 그녀와 관계가 멀어져 갔으며, 상상력이 고갈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둘은 1921년 이혼합니다.
1919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공동 설립]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 W. 그리피스와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공동 설립하여 영화 제작자와 스튜디오의 횡포에 맞서 독립적인 영화 제작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1919년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 W. 그리피스와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설립했습니다. 이들은 영화 제작자들과 스튜디오의 횡포를 막기 위해 독립 영화를 지원하고 배급하는 것을 목표로 영화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채플린은 자신의 영화를 독자적으로 만들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습니다.
1921
[최초 장편 영화 '키드' 발표]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재키 쿠건과 함께 촬영한 자신의 첫 장편 영화 《키드》를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며 명감독 반열에 올랐습니다.
퍼스트 내셔널 픽처스와의 계약 하에 《집 없는 아이》의 촬영을 시작하면서 아역 배우 재키 쿠건을 만나게 됩니다. 재키 쿠건을 이끌면서 촬영된 영화는 《키드》로 이름을 바꾸게 되며 1921년 개봉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키드》는 채플린 최초의 장편 영화로 평가받으며 그를 명감독 반열에 오르게 했습니다.
1924
[리타 그레이와 재혼]
리타 그레이와 재혼하여 찰스 채플린 주니어와 시드니 채플린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결혼도 1927년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채플린은 1924년 리타 그레이와 재혼했으며, 이 결혼 생활 동안 찰스 채플린 주니어(1925년)와 시드니 채플린(1926년)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 역시 1927년 이혼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25
['황금광시대' 대성공]
《황금광시대》를 제작하여 큰 인기를 끌었으며,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채플린은 우연히 한 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1925년 《황금광시대》를 제작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되자 큰 인기를 끌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적자가 해소되었으며, 비극적인 결말을 상업적 타협으로 해피엔딩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채플린의 천재적인 팬터마임 능력이 정점에 달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1928
[어머니의 사망]
어머니 한나 채플린이 사망했습니다. 채플린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어머니가 다시 가수 생활을 하게 되자 찰리 채플린은 워크하우스로 보내졌지만, 훗날 채플린은 어머니를 할리우드로 불러 같이 살았습니다. 채플린의 어머니는 1928년 사망했습니다.
1931
[무성 영화 '시티 라이트'의 성공]
유성 영화의 유행 속에서도 무성 영화 《시티 라이트》를 제작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유성 영화를 거부하는 그의 예술적 신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926년부터 유성 영화가 인기를 끌었지만 채플린은 이를 거부하고 1931년 무성 영화 《시티 라이트》를 제작해 개봉했습니다. 놀랍게도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채플린은 영화 개봉을 위해 파블로 피카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하트마 간디, 윈스턴 처칠 등 여러 인사들과 만나며 수개월 동안 여행을 보냈습니다.
1933
[폴레트 고더드와 비밀 결혼]
폴레트 고더드와 비밀리에 결혼했습니다. 채플린은 그녀를 '자신이 아무 걱정 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자'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수개월 동안 방황하던 채플린은 폴레트 고더드와 만나 1933년 배 위에서 비밀 결혼을 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회고록에 따르면 채플린은 파울레트를 '자신이 아무 걱정 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자'라고 말하며 그녀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였습니다. 둘은 1942년 이혼합니다.
1936
['모던 타임스' 개봉 및 사회 비판]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는 영화 《모던 타임스》를 제작 및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의 작품 중 가장 비판적인 영화로 평가받습니다.
1936년 《모던 타임스》를 제작해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자본가, 컨베이어 벨트, 경찰, 파업, 마약, 정부를 비판하는 등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영화 중간에 채플린이 빨간 깃발을 줍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잡혀가는 장면은 큰 충격을 주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장면을 삭제한 후 상영하기도 했습니다.
1940
['위대한 독재자' 개봉 및 히틀러 풍자]
아돌프 히틀러를 풍자한 정치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개봉하여 흥행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연설 내용으로 '용공주의자'로 몰리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더의 말을 떠올린 채플린은 1939년 아돌프 히틀러를 풍자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협박 편지와 정치 문제로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1940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대다수 평론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흥행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연설 내용으로 용공주의자로 몰리기도 하였습니다.
1942
[반나치 연설로 공산주의자 의심]
독일 나치에 대항하여 제2전선의 결성을 촉구하고 소련의 전쟁을 지원하자는 연설을 하면서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채플린은 독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에 대항해 제2전선의 결성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소련의 전쟁을 지원하자는 연설을 해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1943
[우나 오닐과의 결혼 및 스캔들]
조앤 배리와의 스캔들에 시달리던 중 54세의 나이에 18세인 우나 오닐(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36살의 나이 차이로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으나, 두 사람은 평생의 반려자로 서로를 지켰습니다.
1943년 조앤 배리라는 여성과의 스캔들에 시달렸습니다. 같은 해에 우나 오닐과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결혼하였으나, 조앤 배리는 채플린의 아이가 있다며 친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채플린은 우나 오닐과의 결혼 생활을 통해 장녀 제럴딘 채플린(1944년)과 아들 마이클 존 채플린(1946년)을 비롯해 6남 7녀를 두었습니다.
1947
['무슈 베르두' 개봉과 매카시즘의 시작]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영화 《무슈 베르두》를 개봉했으나, 이로 인해 반미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며 매카시즘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1947년 《살인광 시대》(무슈 베르두)를 개봉했습니다. 그러나 베르두의 살인 유희를 통한 사회 비판과 풍자로 채플린은 반미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채플린은 그 전부터 연방수사국(FBI)에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으며, 이 영화의 개봉으로 인하여 매카시즘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1952
[미국 입국 금지 및 영주권 포기]
영화 《라임라이트》 홍보를 위해 영국으로 갔을 때, FBI의 요청으로 미국 이민심사국으로부터 미국 입국을 금지당했습니다. 채플린은 이에 반발하여 1953년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에 정착했습니다.
1952년 채플린은 영화 《라임라이트》를 홍보하기 위해 영국으로 갔습니다. FBI의 존 에드거 후버 국장은 이때를 맞춰 미국 이민심사국에 채플린의 귀국을 거절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이 요청으로 인해 채플린은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1953년 채플린은 '선동이 횡행하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다'며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 브베에 정착했습니다.
1957
['뉴욕의 왕' 주연 및 마지막 스크린 등장]
매카시즘과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 《뉴욕의 왕》에서 주연을 맡으며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등장했습니다.
채플린은 미국에서 쫓겨났지만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57년에 개봉된 《뉴욕의 왕》에서 채플린은 마지막으로 주연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는 매카시즘과 자본주의 사회의 미국을 비판하였으나 평판은 좋지 않았습니다. 채플린은 이 영화를 '정치적이지 않고 풍자적이며, 내 영화 중에 가장 반체제적인 영화'라고 설명했습니다.
1962
1962년, 채플린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업적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면모까지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7
[마지막 영화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개봉]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배급한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을 개봉했으나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이 참여하고 개봉한 마지막 영화로 기록되었습니다.
채플린의 마지막 영화는 1967년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배급한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이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소피아 로렌과 말론 브란도가 출연하였으나 흥행에 참패하게 되었고, 이 영화는 채플린이 참여하고 개봉한 마지막 영화가 되었습니다.
1972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 및 미국 귀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기 위해 20년 만에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영화인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그의 영화 예술에 대한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았습니다.
1972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지난 세기 동안 그가 만든 헤아릴 수 없는 기법들이 이후 영화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공로상을 수여받았습니다. 미국 입국이 금지된 지 20년 만에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으며, 영화인들이 시상식장에서 채플린을 뜨거운 박수로 환대했습니다. 1973년에는 《라임라이트》로 아카데미 음악상도 받았습니다.
1975
[대영 제국 훈장 수훈]
대영 제국 훈장 2등급(KBE, 작위급 훈장)을 수훈하며 고국 영국으로부터 높은 영예를 받았습니다.
1975년 찰리 채플린은 대영 제국 훈장 2등급(KBE, 작위급 훈장)을 수훈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업적과 영국 문화에 대한 기여를 고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1977
[찰리 채플린 사망]
크리스마스 아침, 스위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8세를 일기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마을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희극왕의 죽음은 전 세계적인 애도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안식'은 두 달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1978
[엽기적인 시신 강탈 사건]
두 명의 자동차 정비공(바르다스와 가네프)이 몸값을 노리고 채플린의 묘지를 파헤쳐 관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미망인 우나 오닐에게 60만 스위스 프랑을 요구하며 협박했습니다.
세기의 시신 도난 사건으로 전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범인들은 카센터를 차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황당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미망인의 단호한 거절]
범인들의 협박 전화를 받은 우나 오닐은 "찰리라면 이 상황을 아주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몸값 지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남편의 영혼이지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범인들은 아이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했지만, 경찰은 이미 대규모 수사망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봉인과 재안장]
되찾은 관은 원래 묘지에 재안장되었으며, 다시는 도굴되지 못하도록 관 위에 1.8미터 두께의 강화 콘크리트를 부어 봉인했습니다.
이는 더 이상 그 누구도 '리틀 트램프'의 안식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물리적 조치였습니다.
[범인 검거와 옥수수밭의 관]
스위스 경찰이 200여 개의 공중전화를 감시한 끝에 범인들을 체포했습니다. 범인들은 시신을 묻은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경찰이 옥수수밭을 샅샅이 뒤진 끝에야 관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관은 범행 현장에서 불과 1.6km 떨어진 옥수수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아엎기 직전에 발견되어 시신 훼손을 면했습니다.
[사과와 용서]
옥살이를 하던 주범 바르다스가 우나 오닐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고, 우나는 "다 용서한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 사건은 2014년 영화 <영광의 대가>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비극으로 시작해 블랙 코미디로 번졌던 사건은 결국 인간애와 용서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채플린의 명언처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임을 증명한 에필로그였습니다.
1989
[AFI 선정 위대한 배우 10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남자 배우 50명' 중 10위에 선정되며 사후에도 그의 위대한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1989년 미국 영화 연구소는 100명의 스타들 중에 남자 배우로 채플린을 10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는 그가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09
찰리 채플린과 리타 그레이 사이에서 1926년 태어난 아들 시드니 채플린은 《라임라이트》와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등 아버지의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는 2009년 3월 8일에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