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
건축가, 예술가, 대학교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07:50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로, 독창적이고 개성 넘치는 건축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 부산대학교 본관 등 다수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홍익대학교 건축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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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출생]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 김영필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동군, 중화군, 성천군의 군수를 지냈습니다.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부 진향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동군, 중화군, 성천군의 군수를 지낸 김영필입니다. 이복형으로 서예가 김광업이 있습니다.
1928
경림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39
일본 요코하마 고공 건축과에 입학하여 나카무라 준페이를 사사했습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41
일본 요코하마 고공 건축과를 졸업했습니다.
1942
학교 선배 사카모토 토시오의 소개로 마츠타히라타설계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수년간 일했습니다.
평양에서 김병례(평양서문여고 졸업)와 결혼 후 다시 일본에서 생활했습니다.
1944
귀국 후 평남도청 기수로 3개월 근무, 이어서 조선비행기제작주식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1945
조선주택영단(LH의 전신) 기수로 재직했습니다.
1949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1952
[르코르뷔지에와의 만남 및 아틀리에 합류]
한국전쟁 중 이탈리아 베니스 국제예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를 만났고, 그의 아틀리에에서 4년간 견습생과 정직원으로 근무하며 건축 세계를 심화시켰습니다.
한국전쟁 중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예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습니다. 회의장에서 르코르뷔지에를 만나고 인사를 나눈 뒤, 전쟁 중인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프랑스로 가서 르코르뷔뷔지에 아틀리에를 방문, 견습생으로 시작해서 정직원이 되어 수년간 일했습니다.
1956
[김중업 건축연구소 설립 및 교육 활동]
귀국하여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또한, 홍익대학교 건축 도시계획연구소 초대소장을 역임했습니다.
귀국과 함께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었고 홍익대학교 건축 도시계획연구소의 초대소장이 됩니다.
[문화 활동 및 위원 활동]
국전 심사위원을 시작으로 문화재 보존위원, 문화자유회의전 준비위원, 현대작가초대전 운영위원 등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국전 심사위원을 비롯하여 문화재 보존위원, 문화자유회의전 준비위원, 현대작가초대전 운영위원 등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1962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1988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강남성모병원에서 향년 66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