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 (1596년)

조선시대 문신, 학자,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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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선은 1596년 안동에서 태어나 인조 3년에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유곡도 찰방 등 여러 직책을 거쳤으며, 특히 당진현감과 흥해군수 재임 시에는 부당한 세금과 무역 폐단을 시정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권력자들의 견제로 여러 차례 파직되기도 했으나, 백성을 위한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됩니다. 1656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매학당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다 166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서로는 '매학당유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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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

[김선 출생]

경상도 안동부 북선면 주촌리에서 승사랑 김수선과 진성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종 때 재상 김담의 6대손이며, 백암 김륵의 종손입니다.

1596년 1월 24일 경상도 안동부 북선면 주촌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에서 아버지 승사랑 김수선과 어머니 진성이씨 이희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조선 세종 때 재상 이조판서 김담의 6대손이며, 백암 김륵의 종손이기도 합니다. 후에 안동 주촌리에서 영천 고산(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고산)으로 이주했습니다.

1625

[별시 문과 급제 및 관직 시작]

인조 3년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며 성균관 학유,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유곡도 찰방 등을 역임했습니다. 이후 사직했다가 다시 형조좌랑, 성균관직강, 형조좌랑 겸 영서도찰방 등을 거쳤습니다.

1625년(인조 3) 을축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유곡도찰방 등을 역임했습니다. 유곡도찰방에 이르러 사직하고 돌아왔다가 그해 가을 다시 형조좌랑이 되고 성균관직강을 거쳐 다시 형조좌랑 겸 영서도찰방을 역임했습니다.

1637

[형조좌랑 직위 해제]

형조좌랑으로 재직 중 지방에 있어 기한 내에 서울로 올라오지 못하여 형조의 보고로 개차되었습니다.

1637년 다시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그해 8월 9일 지방에 있어 기한 내에 미처 올라오지 못하자, 낭관 중 사고자 3인을 개차할 것과 서울 사람을 임명할 것을 청하는 형조의 보고로 개차되었습니다.

1642

[병조좌랑 임명 및 사직]

병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했습니다.

1642년 1월 16일 병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643년 상을 당하여 사직했습니다.

1646

[황해도 도사 겸 춘추관 기주관 임명]

황해도 도사로 부임하며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했습니다.

1646년 2월 3일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다가 겸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했습니다.

1649

[예조좌랑 임명 및 왕명 수행]

예조좌랑에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 7일에는 왕명을 받아 이민환을 치제하러 의성군에 파견되었습니다.

1649년 1월 26일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7일 예조좌랑으로 왕명을 받아 죽은 이민환을 치제하러 의성군에 파견되었습니다.

[당진현감 임명 및 파직]

예조좌랑으로 재임명된 후 당진현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당진현의 불균등한 부세를 바로잡으려 노력했으나, 건강 문제와 권력자들의 견제로 인해 암행어사에 의해 파출되었습니다.

1649년 6월 5일 다시 예조좌랑에 재임명되고 6월 11일 당진현감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진현에는 권귀들의 농장이 많아 부세가 균등하지 못했는데, 김선은 이를 직접 바로잡고 조정 유력자의 재산이라 해서 조금도 봐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어사가 계를 올려 건강 문제를 지적하여, 11월 27일 홍청도 암행어사에 의해 파출당하고 서목 보고되었습니다.

1655

[청주판관 임명 및 체직]

청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8일 후 이름이 가볍고 근래 쇠퇴했다는 이유로 승정원의 계에 따라 부임 도중 체직되었습니다.

1655년 1월 15일 청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1월 23일 명칭이 가볍고 근래 쇠퇴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계로 인해 부임 도중 체직되었습니다.

[전적 임명]

전적에 임명되었습니다.

1655년 10월 27일 전적에 임명되었습니다.

1656

[낙향 및 매학당 건립]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영천 고산으로 낙향하여 순흥 도강면 송내에 매학당을 짓고 여생을 보냈습니다. 저서로는 '매학당유고' 2권이 있습니다.

이후 김선은 더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영천(榮川, 현재의 영주시)의 상석리(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고산(孤山)으로 낙향했으며, 효종 7년(1656년) 순흥 도강면(道講面)의 송내(松內, 후일 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에 편입)에 매학당(梅鶴堂)을 짓고 여생을 보냈습니다. 저서로는 매학당유고(梅鶴堂遺稿) 2권이 있습니다.

[흥해군수 임명 및 파직]

흥해군수로 부임하며 경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직했습니다. 그는 향리와 아전들의 무역 폐단을 없애고 어호들의 세금을 감면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으나, 지역 유지들의 무고로 파직되었습니다.

1656년 2월 2일 흥해군수로 부임하여 경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직했습니다. 흥해군수 재임 중 향리, 아전들이 중간에서 일으키는 무역의 폐단을 없애고, 어부, 양식장 등 어호(漁戶)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감면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는 지역 유지들의 무고로 조정에 탄원서가 제출되었고, 그해 8월 19일 경상감영의 봄여름 지방관 근무성적 포폄에서 하를 받았습니다. 결국 10월 3일 경상좌도화재경차관의 탄핵을 받고 파출되었습니다.

1660

[김선 사망]

매학당에서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1660년 6월 8일 매학당에서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1674

[매학당 중건]

화재로 전소된 매학당을 그의 증손자 김행추 등이 순흥 문단의 사암으로 옮겨 중건했습니다. 동쪽에 고산이 있어서 고산의 옛 이름 그대로 편액을 달았습니다.

순흥 도강면의 매학당은 수년 뒤 갑자기 화재가 발생돼 전소되었습니다. 그러나 1674년(숙종 15) 그의 증손자 사정 김행추(金行秋) 등이 일부를 순흥 문단(文丹)의 사암(蛇巖)으로 옮겨 중건하였습니다. 순흥부 문단면 사암리는 한때 김선이 살던 곳이라 하며 동쪽에 고산이 있어서 고산의 옛 이름 그대로 편액을 달았습니다.

1913

[매학당 이건]

그의 10대손 김동진이 매학당을 영주군 부석면 상석리 솔안부락으로 이건했습니다. 현재 매학당과 양출헌 2개의 건물이 있으며 숭모비가 같이 있습니다.

1913년 그의 10대손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다시 영주군 부석면 상석리 솔안부락으로 이건하였습니다. 영주 고산 매학당은 매학당과 양출헌 2개의 건물이 경내에 있으며, 경내에는 후대에 대한민국 시대에 세워진 숭모비가 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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