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언론인)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 기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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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자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의 창립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육, 언론, 기업 활동을 통해 민족 실력 양성에 힘썼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친일 행적 논란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는 등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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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 김성수 탄생]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조선 시대 성리학자 김인후의 13대손으로 태어나, 민족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 기업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의 13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한성부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부안군 줄포에서 성장했습니다. 후에 아들이 없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1903

[소년 김성수, 첫 결혼]

13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다섯 살 많은 고광석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1903년, 13세의 김성수는 자신보다 다섯 살 연상인 춘강 고정주의 딸 고광석과 결혼했습니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으로,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장학재단 호남학회 발기인에 참여한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1906

[신학문의 길, 송진우와의 만남]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여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 신학문을 배웠으며, 평생 동지가 될 송진우와 백관수를 만나 친분을 쌓았습니다.

1906년, 김성수는 장인 고정주가 전남 담양군 창평에 설립한 창흥의숙에 입학하여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 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고, 후에 백관수도 이곳에서 함께 수학하며 우의를 다졌습니다.

1908

[금호학교 입학, 근대 학문에 눈 뜨다]

금호학교에 입학하여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1908년 4월, 김성수는 줄포 근처 후포에서 열린 교육계몽운동가의 강연을 들은 것을 계기로 금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하며 민족의식과 실력 양성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한 결단, 일본 유학]

민족의 실력 양성이라는 신념 하에 부모님께 사죄 편지를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1908년 10월, 김성수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워 동포를 계몽하겠다는 신념으로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투를 단발하고 송진우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와 수학을 배웠고, 1909년 긴조중등학교 5학년에 편입학했습니다.

1910

[와세다 대학 입학, 미래 지도자들과의 교류]

송진우와 함께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며 장덕수, 신익희, 안재홍 등과 교류했습니다.

1910년 4월,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11년 예과를 마치고 본과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며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등 훗날 대한민국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며 식견을 넓혔습니다. 그는 간디이즘에 감화되어 절약과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1914

[귀국 후 교육 열정, 좌절된 학교 설립]

와세다 대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좌절되었습니다.

1914년 7월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한 김성수는 귀국 후 '인재배양, 경제자립, 언론창달'의 세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해 가을 교육계몽을 위해 사립 중등학교 설립을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의 거절로 무산되었고, 최남선, 안재홍 등과 '백산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백두산을 뜻한다는 이유로 다시 좌절되었습니다.

1915

[중앙고등보통학교 인수,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경영난에 처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으로 취임, 직접 경제학을 가르치며 실력양성론을 강조하고 이광수 등 어려운 학생들을 후원했습니다.

1915년 4월,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수락하고 학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양아버지 김기중의 지지 속에 인수 비용을 마련하여 학교를 살리고, 직접 경제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실력양성론'을 강조했습니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을 지원했으며, 특히 이광수를 일본 와세다대학에 편입시키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이광수 일본 유학 후원]

학비 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시켰습니다.

1915년 9월, 김성수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 곤란으로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는 인재 양성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과 실천적 의지를 보여줍니다.

1917

[민족 산업의 기틀, 경성직뉴주식회사 인수]

민족 산업 육성을 위해 재정난을 겪던 광목 제조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기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제 제품에 의존하는 것을 보며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 산업을 일으키기로 결심했습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광목 제조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며 민족 자본 육성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18년에는 사명을 중앙상공주식회사로 바꾸고 직접 면의류 생산에 돌입했습니다.

1918

[민족자결주의와 독립운동 준비]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 송진우와 함께 3.1 운동을 준비했습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송진우에게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함께 일본 도쿄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며 독립선언을 준비했습니다. 그의 자택은 이승훈, 한용운, 최남선, 최린 등 독립지사들의 3.1 운동 준비 회합 장소로 제공되었습니다.

1919

[3.1 운동 준비와 희생]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했으나, 운동 직후 체포 위기에 처해 송진우가 대신 투옥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김성수는 이승훈, 한용운, 최남선, 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하도록 장소를 제공하며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운동 직후 밀정의 밀고로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 위기에 놓였습니다. 송진우는 김성수가 교육사업 등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며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김성수는 투옥을 피했습니다.

[임시정부 독립 자금 지원]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3.1 운동 이후 김성수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익명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원이 그의 자택에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자, 일부러 자리를 비워 단원들이 필요한 자금을 가져갈 수 있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또한 송진우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대규모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민족 기업 경성방직 창립]

박영효 등을 초대 사장으로 영입하여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립하고 민족 자본 육성에 힘썼습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는 박영효 등과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경성방직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일본의 방직회사들과 경쟁하기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기법을 구사하며 일본과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했습니다. 경성방직은 3년 만에 국내 옷감, 의류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며 민족 경제 자립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20

[이아주와의 인연과 재혼]

3.1 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옥고를 치르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던 이아주를 문병하며 인연을 맺었고, 후일 이아주와 재혼했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6개월형을 언도받고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아주를 문병했습니다. 이 인연으로 후에 이아주와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이아주는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200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기도 했습니다.

[민족 언론의 탄생, 동아일보 창립]

민족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함께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습니다.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보며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한 김성수는 1920년 4월 1일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함께 동아일보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하며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언론을 통해 민족 계몽과 실력 양성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의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을 겪으며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동아일보, 일제 탄압 시작]

동아일보가 평양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창간 직후 판매와 배포가 금지되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가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했습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 내용을 해명해야 하는 등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 직면했습니다.

[유근 주필 추대와 민족 문화 사업]

유근이 출옥하자 그를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하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유적 보존 등 민족 문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1920년 10월 초 유근이 출옥하자, 김성수는 그를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했습니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 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 민족 문화 보존 및 계몽 사업을 주도하며 일제의 눈총을 샀습니다.

1921

[민립대학 설립 운동의 시작]

실력 양성의 일환으로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김성수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과 모금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 당국의 탄압과 관동대지진, 가뭄 등으로 인해 동력을 잃고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지지부진해졌습니다.

1922

[태극성 광목 출시와 일제와의 갈등]

조선 기술로 최초 대량 생산된 광목 '태극성 광목'을 출시, 상표의 태극 문양으로 일제의 추궁을 받았습니다.

1922년 3월, 김성수는 경성방직에서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 '태극성 광목'을 출시했습니다.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일제에 소환되어 추궁을 받았으나, 그는 상표가 회사의 무궁한 발전과 조선 팔도를 의미한다고 항변하여 풀려났습니다. 이는 일제 감시 속에서도 민족 정기를 지키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줍니다.

1923

[국산품 애용, 물산장려운동 추진]

조만식, 안재홍, 송진우 등과 함께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 아래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했습니다.

1923년부터 김성수는 조만식, 안재홍, 송진우 등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 생산품 애용을 호소하며 민족 경제 자립을 역설했습니다. 경성방직에서 생산된 제품을 직접 홍보하지 않고도 국산품 애용 운동에 앞장서며 민족 자본의 힘을 키우고자 했습니다.

1924

[자치운동 '연정회' 설립 추진과 중단]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 설립을 추진했으나,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었습니다.

1924년 김성수는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민족개량주의 노선으로,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을 사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항상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고 피력했습니다.

1926

[6.10 만세 운동 배후 지목]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습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 인산일을 계기로 중앙중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자, 김성수는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학교 걱정 말고 가서 싸우라'고 독려하며 학생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습니다.

1927

[마하트마 간디와의 서신 교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식민지 조선을 위한 고언을 구했고, 간디로부터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 사상에 감화된 김성수는 1926년 10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했습니다.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김성수의 독립 의지를 격려했습니다.

1929

[세계 일주 중 임시정부 지원]

구미 여행 중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한인 학교에 거액을 기부하고 임정 요인들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1929년 말 출국하여 구미 여행길에 오른 김성수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러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습니다. 또한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하여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했습니다.

1930

[동아일보 정간, 언론 탄압]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게재된 축사 문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5개월간 정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193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네숀 주필이 보내온 축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는 이를 트집 잡아 5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를 정간시켰습니다. 김성수는 이러한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 언론의 역할을 굳건히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1931

[민중 속으로, 브나로드 운동 주도]

세계일주 후 귀국하여 송진우 등과 함께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하며 농촌 계몽 및 문맹 퇴치에 앞장섰습니다.

1930년 미국, 유럽 여행 후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이때부터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 아래 농촌 계몽 운동을 추진했으며, 대학생들이 방학 기간을 이용해 농촌 문맹 퇴치와 질병 예방에 참여했습니다. 이 운동은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932

[보성전문학교 인수, 민족 교육의 수호자]

자금난으로 위기에 처한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며 민족 교육의 명맥을 이어나갔습니다.

1932년 3월 26일,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했습니다.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재정난을 겪던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승격되어 오늘날에 이릅니다. 김성수는 교사 정비, 건물 신축, 조선어/한국사/교련 과목 필수 지정 등 민족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했습니다. 일제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처하자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학교에 대한 애착이 컸습니다.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 취임]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여 민족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했습니다.

1932년 6월 4일,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부친 상중에도 학교 현장을 직접 독려하며 교사 정비와 건물 신축에 힘썼습니다. 특히 조선어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여 조선총독부의 의심을 샀으나, 민족의 역사와 언어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며 무마시켰습니다.

1934

[민족 교육 강화, 조선어와 한국사 필수 지정]

보성전문학교에 조선어,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여 민족 교육을 강화했습니다.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해명하며 교육을 통한 민족 정신 함양에 주력했습니다.

1935

[보성전문학교장직 사퇴]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35년 5월,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대한 애착은 여전하여, 재정난으로 학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친구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1936

[일장기 말소 사건, 민족정신 표출]

동아일보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 보도하자,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습니다.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삭제하여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고, 동아일보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3일 복간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다만, 김성수가 일장기 말소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37

[안창호 보석금 및 치료비 지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과 치료비를 마련하여 지불했습니다.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의 호소로 김성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했습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으나 3월 10일 안창호는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추모비 건립에도 참여했습니다.

[보성전문학교장 재취임]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다시 취임하여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했습니다.

1937년 5월 26일, 김성수는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했습니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는 일제의 민족말살통치가 심화되던 암흑기로, 그는 독립을 멀리 내다보며 강경하게 맞서기보다는 교육을 통해 민족의 저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습니다.

1938

[흥업구락부 관련 보고]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 중 한 사람으로 총독부 경찰에 보고되었으나,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습니다.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따르면 김성수는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 사람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일제 감시망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민족운동에 관여했음을 보여줍니다.

1939

[경성방직 고문직 사퇴]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1939년 9월, 김성수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되어 회사에 타격을 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는 회사를 동생 김연수와 매제 김용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1940

[동아일보 강제폐간과 칩거]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키자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광복 때까지 칩거했습니다.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광복 때까지 칩거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했으나 거절했으며, 귀족원(상원의원) 제안도 거절하는 등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1941

[창씨개명 거부]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했지만, 김성수는 이를 거절하며 민족의 이름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는 많은 지식인들이 창씨개명에 응했던 당시 상황에서 그의 저항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1942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와 모면]

조선어학회 사건의 배후 지원자로 지목되어 연행, 심문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투옥은 모면했습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여 이희승, 이병기, 김선기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을 때, 조선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했습니다. 그는 가혹한 고문에도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 독립이 된다면 진작 편찬하지 왜 이제 하겠는가'라며 반박하여 혐의점이 없어 투옥은 모면했습니다. 잡혀간 이극로 등의 안부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44

[보성전문학교 강제 격하]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보성전문학교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김성수가 교장으로 있던 보성전문학교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했습니다. 이는 일제의 민족말살통치와 민족 교육기관에 대한 탄압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총리에게 충성 맹세 논란]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기록이 있어 훗날 친일 행적 논란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1944년 7월 22일, 김성수가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기록이 존재하여 훗날 그의 친일 행적 논란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지목됩니다. 다만, 김성수의 이름으로 발표된 글들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일제의 강압에 의한 단순 명의 도용인지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아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1945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거절]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요청받았으나, 송진우 등과 상의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1945년 8월 16일, 광복 직후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요청받았습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옹호하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 참여를 거절했습니다. 이는 해방 정국에서 그의 정치적 노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해방 정국, 한국민주당 창당 주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참여 요청을 거절하고, 송진우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임시정부 법통을 옹호하는 우익 세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요청을 거절하고,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문교부장 선임도 거부했습니다. 김성수는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충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해방 정국의 주요 우익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참여 거절]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송진우와 함께 임시정부 정통성을 주장하며 이를 부정했습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을 때,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인공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가진다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고 참여를 거절했습니다.

[이승만 독립촉성중앙회 가입]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여 정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여기에 가입했습니다. 주한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여 미 군정을 세운 후, 한민당에서 군정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김성수도 하지 사령관을 만나 면담하는 등 해방 정국에서의 정치 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 참여]

김구의 강력한 반탁운동에 참여하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 결과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하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반탁 노선을 주장하며 미소공동위원회 참여에도 반대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1946

[고려대학교 승격 및 이사장 취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고 이사장에 취임했습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김성수는 고려대학교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상윤을 총장으로 임명하며 자신이 평생을 바친 교육 기관이 민족의 최고 학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 피선]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습니다.

1946년 1월 16일, 김성수는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부위원장에 피선되었습니다. 그는 반탁 운동의 핵심 인물로서 활동하며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섰습니다.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민족 경제 재건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1946년 2월 14일, 김성수는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해방 후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 속에서 민족 산업과 경제를 재건하는 데 기여하고자 노력했으며, 민주의원 창립 시 자발적으로 기금을 내는 등 새로운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한민당 활동을 위한 교장직 사퇴]

한민당을 맡게 됨에 따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현상윤을 후임자로 내정했습니다.

김성수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이끌게 됨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했습니다. 그는 후임자로 현상윤을 내정하며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내려놓고 해방 정국에서의 정치 활동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민족통일총본부 위원 선출]

민족통일총본부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민족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6년 6월 29일, 김성수는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분열된 민족을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에 동참하며 새로운 국가 건설의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1947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 재선출]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되어 반탁 운동을 계속 주도했습니다.

1947년 1월, 김성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되며 반탁 운동의 핵심 인물로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같은 해 1월 18일에는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하는 등 적극적인 반탁 활동을 펼쳤습니다.

[트루먼 독트린 찬사와 미군정과의 협력]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내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했습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당시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김성수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이며 한반도에서의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추가 보선]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습니다.

1947년 9월 5일, 김성수는 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 실현을 정치 목표로 삼았습니다.

1948

[민족지도자 33인 선발]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습니다.

1948년 3월 5일, 김성수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여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 참여를 결정했습니다. 이 시기 남로당으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5.10 총선거 참여 결정]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했습니다.

김성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여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했습니다. 이는 해방 정국에서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적인 국가 기반을 마련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농지개혁법 수용, 국가를 위한 결단]

호남 지역의 대규모 농지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진오의 설득을 받아들여 농지개혁법 수용에 동의하며 국가 발전을 위한 희생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국회와 농림부에서 농지개혁을 추진할 당시, 김성수와 그의 친인척들은 호남 지역에 3,247 정보에 달하는 막대한 농지를 소유한 최대 지주였습니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김성수를 찾아가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했고, 김성수는 주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가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재무장관 제의 거절]

정부 수립 시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 생각하여 거절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하여 거절했습니다. 이는 이승만이 그와 한민당의 기여에 비해 낮은 직책을 제안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장택상이 거듭 요청했음에도 거절했습니다.

1949

[야당 통합의 시작, 민주국민당 창당]

한국민주당이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최고위원으로 취임하며 야당 정치 활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1949년 2월 10일, 김성수가 이끌던 한국민주당은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고, 김성수는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했습니다. 이는 훗날 대한민국 제2공화국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그는 민주국민당의 대표격으로서 해방 후 대한민국 정치의 주요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어 민족 진영 통합에 노력했습니다.

1949년 8월 20일,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약칭 민강위)가 조직되었을 때 김성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는 등 민족 진영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1950

[대통령 후보직 사양]

대통령 후보 출마 권고를 받았으나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사양했습니다.

1950년 5월, 김성수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했습니다. 그는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을 배려하여 이윤영을 위해 여러 번 출마를 사양하는 등 개인적인 영달보다는 대의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과 피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 시내에 은신하다가 정부를 따라 대전, 대구, 부산으로 이동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 시내에 은신해 있다가 정부를 따라 대전, 대구, 부산으로 이동하며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부산 피난지에서는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을 당했음에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 소탈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1951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취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적 행보에 맞서 갈등하다 사임했습니다.

1951년 5월 17일, 김성수는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했습니다. 처음에는 이승만 정부의 실정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아 부통령직 제의를 거절했으나 동료들의 간청으로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부통령 재임 중 이승만이 신성모를 일본 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반대하고, 부산 정치 파동으로 이승만이 재선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려 하자 이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각하' 호칭을 없애려 하는 등 권위주의에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1952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부통령직 사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적 행보와 부산 정치 파동에 대한 강력한 항의로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습니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발췌개헌으로 재선을 추진하며 부산 정치 파동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를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에서 중도 사임했습니다. 그는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민주구국 선언대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정치폭력배의 난입으로 실패하는 등,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야당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그의 사표는 7월 6일에 수리되었습니다.

[부산 정치 파동과 반독재 선언 실패]

부산 정치 파동 당시 이시영, 장면 등과 함께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했으나 정치폭력배의 난입으로 실패했습니다.

1952년 6월, 이승만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에 이시영은 장면, 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했으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폭력배들의 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953

[중풍 발병과 투병 생활]

중풍에 걸려 병상에 누웠고, 병원에 다니며 통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1953년 초, 김성수는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누웠고, 이후 병원에 다니며 통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만년에는 중풍 외에도 심근염 등 여러 질병으로 고생했지만, 야당 인사들의 단결과 통합 야당 창당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4

[통합 야당 창립 노력, 호헌동지회 참여]

이승만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고 통합 야당인 민주당 창립 준비에 관여했습니다.

만년에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김성수는 야당 인사들의 단결을 주문했습니다. 1954년 11월 30일, 이승만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호헌동지회를 구성할 때 참여했습니다. 그는 혁신계 조봉암의 신당 운동 참여를 호소하며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조봉암에게 '공산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통합 야당 창립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955

[야당 통합 위한 조봉암 영입 찬성]

호헌동지회 총회에서 혁신계 조봉암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야당 통합에 힘썼습니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민주대동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는 갈등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적극 찬성했습니다. 그는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며 영입 결심을 굳혔고, 조봉암에게 자신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민족의 선각자, 김성수 서거]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뇌일혈, 위출혈 등 지병으로 서울 자택에서 만 6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병중에도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던 김성수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뇌일혈, 위출혈 등 여러 합병증으로 고생했습니다.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서울특별시 계동 자택에서 심근염 등이 악화되어 만 6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임종 직전 장면의 권유로 천주교 세례를 받고 세례명 바오로를 받았습니다. 허정은 그를 '조국이 가장 필요하게 여길 때 이 나라를 버렸다'며 아쉬워했습니다.

[국민장 거행과 안장]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1955년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장의위원장 함태영)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장례위원으로는 함태영, 신익희, 변영태, 변영로, 조병옥, 장면, 최두선 등이 구성되었습니다. 그의 묘소는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습니다.

1962

[건국공로훈장 추서 및 서훈 박탈]

민족 실력 양성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나, 훗날 친일 행적 논란으로 2018년 서훈이 박탈되었습니다.

김성수는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수록되는 등 친일 행적 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에서 거짓 서훈으로 인정되어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며 복잡한 역사적 평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65

[인촌기념상 수립 및 기념회 재창립]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인촌기념회가 재단법인으로 재창립되었습니다.

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으며, 1965년에는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습니다. 같은 해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는 등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1973

[인촌문화상 제정]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어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기리는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73년에는 김성수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교육, 언론, 기업 활동이 우리 사회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기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정되었습니다.

1991

[인촌기념관 건립]

고려대학교 교내에 그의 호를 딴 인촌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1991년 10월 18일, 김성수 탄신 1백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고려대학교 교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었습니다. 인촌기념관은 그의 교육 이념과 업적을 기념하고 학문 연구와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남서울대공원 동상 건립]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김성수 동상이 건립 및 제막되었습니다.

1991년 11월 11일, 김성수 탄신 1백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성금으로 남서울대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고 제막되었습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2002

[친일파 명단 수록]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습니다.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김성수의 이름이 수록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일제강점기 행적에 대한 재평가와 친일 논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2009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포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09년에는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김성수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은 역사적 재조명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습니다. 다만, 명의 도용 등 반론도 존재합니다.

2018

[독립유공자 서훈 박탈]

친일 행적 논란 끝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최종적으로 박탈되어 역사적 평가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습니다.

김성수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논란으로 인해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수록되었습니다. 이러한 논란이 지속되던 중 대법원 판결을 거쳐 2018년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평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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