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시인, 작가, 방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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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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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후기 방랑 시인으로, 흔히 '김삿갓'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부의 역적 행위를 비판하는 시로 장원 급제한 후, 그 사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여 전국을 유랑하며 풍자와 해학이 담긴 한시를 남겼습니다.-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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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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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

[김병연 탄생]

조선 경기도 양주에서 김안근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선 순조 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가문인 김안근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811

[홍경래의 난과 조부 김익순의 투항]

홍경래의 난이 발발했으며, 당시 평안도 선천부사 겸 방어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반란군에게 항복했습니다.

홍경래의 난이 발발했을 당시, 갓 부임한 평안도 선천부사 겸 방어사였던 조부 김익순은 반란군에게 술에 취해 결박당한 채 항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1812

[조부 김익순 처형]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에 투항한 죄로 조정에서 참수형에 처해졌지만, 김병연을 포함한 가족들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당시 반란군에게 항복한 죄로 조정으로부터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가족들은 역적의 집안이 되었으나, 김병연과 그의 가족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1826

[조부 비판 시로 장원 급제 후 방랑 시작]

20세의 나이로 강원도 영월 백일장에서 조부 김익순의 역적 행위를 비판하는 시로 장원 급제했습니다. 이후 조부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고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 '김삿갓'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자신의 조부 김익순의 역적 행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내용을 써 장원 급제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고, 자괴감에 빠져 삿갓을 쓰고 전국 방랑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부터 본명 '김병연' 대신 '김삿갓'으로 불리게 됩니다.

1835

[기녀 가련과의 동거]

방랑 중이던 중 가련이라는 기녀와 동거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방랑길을 떠난 후, 29세가 되던 해에 가련이라는 기녀와 동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서삼남 김영규를 두었습니다.

1842

[서삼남 김영규 탄생]

측실인 기녀 가련과의 사이에서 서삼남 김영규를 득남했습니다.

측실인 경주 최씨 기녀 가련과의 사이에서 서삼남 김영규를 득남했습니다. 김영규는 훗날 문음으로 천거되어 벼슬을 지냈습니다.

1863

[방랑 시인의 최후]

전라도 동복현에서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이래 가족과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여생을 보냈습니다.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 가족과 연락을 끊고 지내던 그는 전라도 동복현에 들렀다가, 철종 14년 3월 25일 그곳 선비 안 참봉 댁 사랑방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864

[유골 영월로 이장]

둘째 아들 김익균이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유골을 강원도 영월로 이장하여 재차 안장했습니다. 훗날 그의 묘가 있는 곳은 '김삿갓면'이 됩니다.

김병연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들은 둘째 아들 김익균은 전라도 동복현으로 달려가 이듬해 고종 1년 3월 29일, 아버지의 유골을 강원도 영월로 이장하여 다시 안장했습니다. 오늘날 김병연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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