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백자
도자기, 공예품, 문화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05:20
한국 백자는 고려 말 송나라 정요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전성기를 맞음. 고려 시대에는 청자에 밀렸으나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 백자와 흰색 숭상 풍조에 따라 꾸준히 발전. 임진왜란으로 일본 백자의 모태가 됨. 소박하고 정적인 매력을 지닌 한국만의 특색을 가짐. 청화백자는 조선 후기 백자의 주류를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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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
한국 백자는 고려 말기에 송나라 정요의 영향을 받아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고려 백자는 고려청자에 압도되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송과 원나라 백자의 영향을 받으며 점차 독특한 양식을 갖추게 된다.
1400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명나라 백자의 영향과 흰 것을 숭상하던 일반적 풍조에 따라 백자는 초기부터 꾸준히 발전하여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초기에는 고려에서 시작된 화문자기에 밀려 주류를 이루지 못했으나, 이후 점차 위상을 확보했다.
1433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에 136군데의 자기소가 있었고, 185군데의 도기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시기를 백자 기술이 기술적으로 완성된 시기로 추측하고 있다.
1460
세조 재위 기간 동안 코발트청(청료)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백자는 주기(술잔) 외에는 사용을 금지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당시 백자 생산과 소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465
세조 10년인 1465년에 순천에서 국산 안료인 토청이 채취되었고, 이를 사용하여 청화백자를 만들었다는 최초의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로써 청화백자의 발생 시기는 15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1468
예종 때에는 국내에서도 코발트청(청료)을 채취하도록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수입에 의존하던 청료 문제를 해결하고 국내 백자 생산을 장려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1592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백자 제조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거나 자발적으로 건너가 백자 기술을 전파했고, 이는 일본 백자 발전의 모태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90
임진왜란 이후 조선 백자는 화문 자기풍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근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