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

소설가, 외교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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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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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이자 외교관인 너새니얼 호손은 뉴잉글랜드 청교도 전통과 마녀사냥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와 죄의식을 윤리적 관점에서 분석하며 사회의 위선과 금욕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주홍글씨'가 있으며, 친구 프랭클린 피어스의 대통령 당선으로 리버풀 영사를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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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

[고조부, 세일럼 마녀사냥 재판관 역임]

호손의 고조부 존이 세일럼 마녀사냥에서 엄혹한 재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후대에 그의 작품 세계에 '저주'와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17세기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발생한 세일럼 마녀사냥 당시, 너새니얼 호손의 고조부인 존이 재판관으로서 엄혹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호손의 가정 배경과 함께 그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청교도적 전통과 '저주'의 그림자를 형성하며, 그의 문학 작품에서 인간 내면의 윤리적 갈등과 죄의식을 탐구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1804

[너새니얼 호손 출생]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선장 너새니얼 헤이손과 엘리자베스 클라크 메닝 부부 사이에서 너새니얼 헤이손(본명)이 태어났습니다.

너새니얼 호손은 1804년 7월 4일,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선장 너새니얼 헤이손과 엘리자베스 클라크 메닝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너새니얼 헤이손이었으며, 뉴잉글랜드 지방의 청교도적 전통은 그의 가정 배경과 함께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1816

[메인주 산골 생활]

가족과 함께 메인주 산골 레이먼드로 이주하여 3년 동안 고독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는 그의 내면세계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816년, 호손은 가족과 더불어 메인주 레이먼드의 산골로 이주하여 3년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사람들과의 교류 없이 고독하게 생활하며 독서와 사색에 몰두했고, 이는 그의 내면세계를 깊이 탐구하고 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819

[세일럼으로 귀향]

메인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세일럼으로 돌아왔습니다.

메인주 산골에서의 3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1819년, 호손은 다시 세일럼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그는 보든 대학교에 입학하여 학문의 길을 걷게 됩니다.

1821

[보든 대학교 입학]

17세의 나이로 보든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업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미국 문학 창조의 야망을 품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821년, 17세의 나이로 호손은 보든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업에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으나, 이 시기에 그는 영국 문학에 비견될 만한 미국 문학을 창조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재학 중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호레이쇼 브리지, 그리고 훗날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피어스 등과 교유하며 문학적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1828

[첫 소설 <팬쇼> 출판 및 회수]

보든 대학 시절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 소설 <팬쇼>를 익명으로 자비 출판했으나, 후에 불만족하여 모두 회수하고 없애버렸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칩거 생활을 하던 호손은 1828년, 보든 대학 시절을 소재로 한 로맨틱 소설 <팬쇼>를 익명으로 자비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작품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모든 서적을 회수하여 없애버릴 정도로 초기작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30

[문예지 단편 발표]

문예지 <더 토큰>에 단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30년, 호손은 문예지 <더 토큰>에 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838년까지 44편에 달하는 단편 및 소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습니다.

1837

[단편집 <트와이스 톨드 테일스> 출판]

<더 토큰> 및 여러 잡지에 발표되었던 작품들을 모아 단편집 <트와이스 톨드 테일스>를 출판했습니다. 이 작품은 대학 동창인 롱펠로의 칭찬을 받는 등 호평을 받으며 외부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37년, 호손은 <더 토큰>과 기타 잡지에 발표했던 단편 작품들 중 18편을 엄선하여 단편집 <트와이스 톨드 테일스>를 출판했습니다. 이 단편집은 대학 동창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에게 '천재'라는 극찬을 받는 등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다소 호평을 받으며, 작가 너새니얼 호손이 바깥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842

[소피아 피바디와 결혼]

소피아 피바디와 결혼하여 콩코드의 에머슨 소유 구 목사관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1842년 7월 9일, 너새니얼 호손은 소피아 피바디와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콩코드에 있는 에머슨 소유의 구 목사관에서 가난에 쪼들린 생활을 시작했지만, 서로에게 깊은 사랑과 신뢰를 보내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소피아는 남편의 창작 활동을 격려하고 내조하는 헌신적인 아내였습니다.

1849

[세관 해고와 <주홍글씨> 집필 계기]

세관에서 해고되었으나, 아내 소피아의 격려와 미리 저축해 둔 돈 덕분에 생계 걱정 없이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홍글씨> 집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손은 세관에서 근무하다 해고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소피아는 남편이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생활비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미리 저금해 두었던 돈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내의 깊은 배려에 감동받은 호손은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이 될 <주홍글씨>의 집필에 몰두하게 됩니다.

1850

[대표작 <주홍글씨> 출판]

미국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장편 소설 <주홍글씨>를 발표했습니다.

너새니얼 호손은 1850년, 그의 대표작이자 미국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소설 <주홍글씨>를 출판했습니다. 이 작품은 청교도 사회의 위선과 죄의식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851

[<일곱 박공의 집> 출판]

장편 소설 <일곱 박공의 집>을 출판했습니다.

1851년, 호손은 장편 소설 <일곱 박공의 집>을 출판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뉴잉글랜드의 역사와 청교도적 유산을 배경으로 가족 대대로 이어지는 저주와 죄의 문제를 다루며, 그의 문학적 깊이를 보여주었습니다.

1852

[친구 피어스 대통령 선거 지원]

친구 프랭클린 피어스가 대통령에 출마하자 자진하여 그를 위한 전기를 집필했습니다. 이후 피어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852년, 너새니얼 호손은 오랜 친구인 프랭클린 피어스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자발적으로 그를 위한 전기인 <피어스 전>을 집필하며 선거 운동을 지원했습니다. 다행히 피어스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호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웨이사이드로 이사]

결혼 후 처음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누릴 수 있는 웨이사이드로 이사했습니다.

1852년 5월, 호손 가족은 웨이사이드로 이사하여 결혼 후 처음으로 경제적 안정과 함께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블라이드데일 로맨스> 출판]

부르크 농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상사회와 자선사업에 대한 풍자를 담은 소설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를 출판했습니다. 이 작품은 <주홍글씨>나 <일곱 박공의 집>보다는 평이 좋지 못했습니다.

1852년 7월, 호손은 부르크 농장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이상사회와 자선사업에 대한 풍자 및 삼각연애를 그린 소설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를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전의 <주홍글씨>나 <일곱 박공의 집>에 비해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평을 받았습니다.

1853

[리버풀 영사 임명 및 영국 부임]

대통령에 당선된 친구 피어스의 임명으로 리버풀 영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가족과 함께 보스턴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853년 7월 6일, 친구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의 임명으로 호손은 리버풀 영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보스턴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외교관으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그의 창작 활동에 잠시 공백을 가져왔지만, 유럽 문화와 풍경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857

[영사직 사임 및 유럽 여행]

리버풀 영사직을 사임하고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1857년 8월, 호손은 리버풀 영사직을 사임했습니다. 이후 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와 풍경을 경험했고,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860

[유럽에서 귀국 및 재정착]

유럽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여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의 웨이사이드 저택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다시 집필 활동을 시작하며 영국의 풍경과 생활을 스케치풍으로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1860년 6월 28일, 호손은 유럽 각지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의 웨이사이드 저택에 정착하여 다시 집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영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의 풍경과 생활풍습 등을 스케치풍으로 그린 작품들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1864

[너새니얼 호손 사망]

건강 악화로 친구 프랭클린 피어스와 뉴햄프셔로 요양 여행 중 플리머스에서 60세의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점차 창작력과 건강이 쇠퇴하던 너새니얼 호손은 1864년 5월, 친구 프랭클린 피어스와 함께 뉴햄프셔 힐로 요양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여행 도중 플리머스에서 60세의 일기로 객사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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