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물리학자, 노벨상 수상자, X선 발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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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09: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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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물리학자, 노벨상 수상자, X선 발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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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1895년 X선(뢴트겐선)을 발견하여 인류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공로로 1901년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어려운 학창 시절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연구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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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출생]

프로이센 레네프(현 렘샤이트)에서 직물 생산 및 판매업자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1845년 3월 27일 프로이센 레네프(현재의 렘샤이트)에서 직물 생산 및 판매업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Charlott Constanze Froweindlrh이며 암스테르담 출신이다.

1848

[네덜란드 이주]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아펠도른으로 이주하여 사립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습니다.

1848년 봄, 뢴트겐은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의 아펠도른으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의 사립학교(Institute of Martinus Herman van Doorn)에서 기초교육을 받았다.

1861

[위트레흐트 기술학교 퇴학]

위트레흐트 기술학교에 다녔으나, 친구의 불경한 초상화 문제로 퇴학당하며 다른 학교 입학이 어려워졌습니다.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위트레흐트 기술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교 선생의 초상을 불경하게 그린 친구가 누군지 말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고, 이후로도 다른 네덜란드나 독일의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없었다.

1865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입학]

위트레흐트 대학 입학이 좌절된 후, 시험만 통과하면 입학 가능한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865년에 그는 위트레흐트 대학 입학에 필요한 자격이 없는데도 입학하려 시도하였다. 취리히에 있는 연방 기술전문학교는 시험만 통과하면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곧 그곳에서 기계공학과 학생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1869

[취리히 대학 박사 학위 취득]

취리히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869년에 취리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2

[안나 베르타 루드비히와 결혼]

안나 베르타 루드비히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뢴트겐은 1872년에 안나 베르타 루드비히와 결혼했다.

1874

[스트라스부르 대학 강의 시작]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며 정식 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874년에 뢴트겐은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875

[호엔하임 농업학교 교수 임명]

뷔르템베르크의 호엔하임 농업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1875년에는 뷔르템베르크의 호엔하임에 있는 농업학교(Academy of Agriculture)에서 교수가 되었다.

1876

[스트라스부르 대학 복귀]

물리학 교수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다시 돌아와 연구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876년에는 물리학 교수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으로 돌아왔다.

1879

[기센 대학 물리학장 지명]

기센 대학의 물리학장으로 지명되며 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879년 기센 대학에서 물리학장(chair of physics)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1887

[조세핀 입양]

자녀가 없던 그는 아내의 오빠 딸인 조세핀을 입양하여 가족으로 맞이했습니다.

뢴트겐은 안나 베르타 루드비히와 결혼했고, 안나의 오빠의 딸 조세핀(Josephine Bertha Ludwig)을 1887년에 입양한 것 이외에 자녀는 없었다.

1888

[뷔르츠부르크 대학 물리학 연구소장 역임]

뷔르츠부르크 대학 물리학 연구소장에 역임되었고, 이 곳에서 X선을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1888년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콜라우시의 후임으로 물리학 연구소장의 지위에 올랐다. 이 곳에서 X선을 발견하였고 곧 뮌헨 대학교로 옮겼다.

1895

[X선 관련 논문 3편 발표]

1895년부터 1897년까지 X선에 대한 총 3편의 중요한 논문을 작성하여 해당 분야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1895년부터 1897년까지 X선에 대한 총 3편의 논문을 썼다. 현재 뢴트겐은 진단방사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인류의학의 전환점, X선 발견]

진공관 실험 중, 바륨을 칠한 스크린에서 희미한 발광을 발견하고 이를 'X선'이라 명명하며 역사적인 발견을 이뤄냈습니다. 이는 당시 학계와 세상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1895년 11월 8일 늦은 오후, 뢴트겐은 진공관에 전하가 방전될 때의 외부 작용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는 히토르프-크룩스 진공관을 마분지로 덮고 전극을 유도코일에 연결한 후, 몇 피트 떨어진 벤치에서 희미한 발광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러 번 방전을 시도한 결과, 바륨-시안화백금산염 스크린에서 빛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새로운 종류의 광선, 즉 X선이라고 임시로 이름 붙였다. 그는 이 주말 동안 실험을 반복하고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 다음 주에 그는 실험실에서 먹고 자면서 X선의 특징들을 연구하였다.

[아내의 손, 최초의 X선 촬영]

X선 발견 2주 후, 자신의 아내 안나 베르타 루드비히의 손을 X선으로 촬영하여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의학적 X선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아내는 뼈를 보고 '나의 죽음을 봤다'고 외쳤습니다.

X선 발견으로부터 2주쯤 후에, 뢴트겐은 아내 안나 베르타 루드비히의 손을 X선으로 찍었다. 그녀는 자신의 뼈를 보고 ‘나의 죽음을 봤다’고 외쳤다. 이 사진은 1896년 1월 1일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루드비히 젠더 교수에게 전달되었다.

[X선 발견 논문 출판]

X선 발견에 대한 그의 논문 '새 종류의 광선에 대하여'가 공식 출판되어 전 세계 과학계에 X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뢴트겐의 논문 “새 종류의 광선에 대하여(On A New Kind Of Rays(Über eine neue Art von Strahlen))”는 50일 후인 1895년 12월 28일에 출판되었다.

1896

[럼퍼드 메달 수상]

X선 발견의 공로를 인정받아 럼퍼드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896년 럼퍼드 메달을 수상했다.

[마테우치 메달 수상]

X선 발견의 공로로 마테우치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896년 마테우치 메달을 수상했다.

[X선 발견, 언론에 보도]

오스트리아 신문에 뢴트겐의 X선 발견 소식이 보도되면서 대중에게도 X선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896년 1월 5일에, 오스트리아의 신문에 뢴트겐이 새로운 방사선을 발견한 것이 실렸다.

1900

[뮌헨 대학으로 이직]

바이에른 정부의 요청으로 뮌헨 대학으로 옮겨 계속해서 연구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00년에는 바이에른 정부의 요청으로 뮌헨 대학으로 옮겼다. 뢴트겐의 가족은 미국 아이오와에 있었고, 그는 이민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뉴욕시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으로 가기로 했고, 대서양을 건널 표까지 샀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그는 계획을 바꿔 뮌헨에 남기로 했다.

1901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X선 발견의 혁혁한 업적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상금을 자신의 대학에 기부하며 과학 발전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1901년, X선 발견이라는 위대한 업적으로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뢴트겐은 상금을 그의 대학에 기부했으며, 피에르 퀴리처럼 그의 발견에 대한 특허권을 받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그는 새로운 광선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서 따서 짓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1923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사망]

악성 종양으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종양은 X선 연구 때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뢴트겐은 1923년 2월 10일 악성 종양으로 사망했다. 그의 종양은 그의 전리 방사선(ionizing radiation)을 이용한 연구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방사선 연구를 한 기간은 짧았고, 납 보호막을 계속 사용했기 때문이다. 뢴트겐은 사망할 즈음에 거의 파산상태였다.

2004

[111번째 원소, 뢴트게늄 명명]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 111번째 원소가 '뢴트게늄'(Roentgenium, Rg)으로 명명되었습니다.

뢴트겐의 업적을 기려 2004년 111번째 원소가 '뢴트게늄'(roentgenium (Rg))으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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