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 교육자, 정치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45
박은식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일생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주체성 확립에 헌신했으며, 특히 역사 연구와 언론 활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혼란스러운 시기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의 저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담은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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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출생]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대에 가세가 회복되었고, 아버지는 서당 훈장이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박은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아버지 박용호와 어머니 노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몰락했던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인 박종록의 대에 농업으로 재산을 모으고 가세를 일으켰고, 아버지 박용호는 서당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17살 때까지 서당에서 공부를 한 뒤 1875년 황해도에서 널리 이름나 있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서로 사귀면서 여러 의견들을 자주 나누는 등의 교류를 하였다. 이 두 사람은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히 자질이 뛰어났다.
1879
[혼인과 수학, 첫 관직]
연안 차씨와 혼인한 뒤 분가하여 평안남도 삼등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남인계 학자와 화서학파 대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886년 향시에 합격하여 숭인전 능참봉이 되었다.
1877년 부친상을 치른 뒤 1879년 연안 차씨와 혼인하고 분가하여 평안남도 삼등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1880년 경기도 광주로 가서 남인계 정약용 학파의 계승자였던 신기영과 정관섭에게 학문을 수학하였다. 1885년 관서의 대학자였던 화서학파 운암 박문일과 성암 박문오 형제에게서 정주학을 수학하였다. 1년 후 1886년 그는 향시에 참가해서 특선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6년 동안 박은식은 줄곧 숭인전 능참봉이란 벼슬을 맡아 생활하였다.
1898
[독립협회 가입 및 황성신문 주필 취임]
주자학과 위정척사사상에 의문을 품고 신학문과 신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이후 장지연 등과 함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해 《황성신문》으로 바꾸고 공동주필에 취임하며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
박은식은 40세가 가까워오던 무렵부터 여태까지 공부했던 주자학과 위정척사사상의 본질에 의심을 품고 신학문·신지식을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에 절감하여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9월 민족지사 장지연·남궁억·나수연·유근 등과 함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새로이 《황성신문》으로 제목을 바꾸고 창간 보급하였으며, 박은식은 장지연과 같이 공동주필에 취임하였다.
1904
[대한매일신보 주필 활동]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항일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신문은 일제의 검열을 피해 의병투쟁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며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매각되었다.
1904년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그는 대한매일신보에도 주필이 되어 사설을 썼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이 편집인이자 발행인인 한·영 종합일간지였으며, 고종 황제와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의병투쟁을 사실 그대로 보도한 정론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양기탁의 주선으로 박은식이 주필로 활동하였다. 당시 다른 언론들은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았지만, 《대한매일신보》만은 발행인인 배설의 국적이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친교하던 영국이어서 언론의 자유를 다른 신문들보다는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일제가 신문법을 고쳐 대한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이던, 외국에서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이던 모두 압수와 판매 금지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일제는 배설과 양기탁을 구속하였고, 특히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의연금을 횡령, 사취하였다는 죄명을 씌워서 탄압하였다. 결국 1910년 항일언론인인 배설이 물러나고, 영국인 비서였던 앨프리드 W. 마넘이 통감부에 신문을 팔아 넘기고 말았다.
1911
[중국 망명 및 역사서 집필 시작]
경술국치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환인현 동창학교에 머물며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등 6권의 역사서를 집필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그의 망명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박은식은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그 이듬해인 1911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환인현 흥도천에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에서 1년간 머무르면서 ≪대동고대사론≫·≪동명성왕실기≫·≪명림답부전≫·≪연개소문전≫·≪발해태조건국지≫·≪몽배금태조≫를 집필하였다.
1915
[《한국통사》 간행]
1914년 망명 이후 줄곧 써오던 《한국통사》의 집필을 완성하고 이듬해 간행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 책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과정을 다루면서도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해 해외 교포들에게 널리 읽혔다.
이후 그는 중국 각지의 이름난 사람들과 교류를 하다 상해로 와서 1914년 망명 이후 줄곧 써오던 ≪한국통사≫의 집필을 완성하고 이듬해인 1915년에 간행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과정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러면서도 일제에 대한 독립 운동도 중시하여 의병 활동은 정신 역사적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박은식이 쓴 ≪한국통사≫는 중화민국과 러시아 지역의 교포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고, 1917년 미국 하와이에서도 출판되어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집필 및 출판]
3·1운동을 경험한 후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사를 중점적으로 다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하여 책으로 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 민족의 독립 노력은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 확신했다.
1919년 박은식은 3·1운동을 경험하고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하여 책으로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민족의 이러한 노력은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1919년 10월 15일 그는 국민교육의 연구장려 및 유학생파견, 지도 등의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를 상해에서 조직하였으며,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약하였다.
1925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으로 인해 혼란한 상황에서 제2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다. 그는 이후 임시정부 체제를 국무위원제로 바꾸고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파벌 싸움으로 인해 대통령으로서 마땅한 사람이 없자,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7월 오히려 임시정부의 정치 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꾼 뒤, 9월 국무위원제의 최고 대표자격인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또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는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회를 폐지했으며, 헌법을 개정하여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대통령직 사임 및 서거]
건강 악화로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독립된 조선의 광복사를 쓰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같은 해 11월 인후염으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은식은 7월 임시정부의 정치 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꾼 뒤, 9월 국무위원제의 최고 대표자격인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그는 한가지 꿈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독립을 보고 광복사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지병을 이유로 사임하였고,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인후염으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가 20년만 더 버텼더라면 광복사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그는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며, 둘째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모든 수단방략이라도 쓰고, 셋째 동지간의 애증친소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 거행]
임시정부는 그의 국가와 민족에 끼친 공훈을 기려 최초로 국장을 거행했으며, 유해는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중국 언론사들도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1925년 11월 4일 그의 국가, 민족에 끼친 공훈을 추도하여 임시정부 최초로 국장을 거행하여,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로 공동묘지 600번지에 안장되었다. 중국 《중화보》,《상해화보》등의 언론사들도 박은식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는 특집기사를 작성하였다.
1962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3
[유해 서울 국립묘지 안장]
김영삼 정부의 임정 요인 유해 봉환사업에 따라, 사후 68년 만에 그의 유해가 서울로 운구 및 송환되어 서울 국립묘지에 최종적으로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3년초 김영삼 정부의 임정 요인 유해 봉환사업에 따라 사후 68년 만인 1993년 8월 5일 서울로 운구 및 송환되어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에 최종적으로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