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종교 지도자, 동학 창시자, 근대 사상가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35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종교 지도자, 동학 창시자, 근대 사상가
report
Edit

조선 말기 서구 열강의 침투와 민중의 고통 속에 탄생한 동학의 창시자이자 초대 교조입니다. 유불선과 서학을 융합하여 '인내천' 사상을 주창하며 신분 평등을 외쳤고, 이는 민중에게 큰 울림을 주어 교세가 급격히 확장됩니다. 정부의 탄압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했지만, 그의 사상은 후일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로 이어져 한국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최제우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824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탄생]

조선 경상도 경주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최복술이었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습니다.

1824년 12월 18일(음력 10월 28일), 조선 경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 근암 최옥과 재가한 어머니 한씨 사이의 자식으로 서자 신분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본명은 최복술이었습니다.

1834

[모친 별세]

10세의 나이에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1834년, 10세에 모친 한씨가 별세했습니다.

1837

[밀양 박씨 부인과 혼인]

13세에 밀양 박씨 부인과 결혼했습니다.

1837년, 13세에 울산의 밀양 박씨 부인과 결혼했습니다.

1840

[부친 별세]

17세에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1840년, 17세에 부친 최옥이 별세했습니다.

1844

[10년 유랑 생활 시작]

21세부터 10여 년간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다양한 사상과 민중의 고통을 체험했습니다.

1844년, 21세에 장삿길에 나선 후 10년 이상 전국을 주유하며 유불선 삼교, 서학, 무속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고 삼정문란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1854

[구도의 사색 시작]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 경주 용담집에서 구도의 사색을 시작했으며, 이후 부인의 고향 울산으로 이사했습니다.

1854년 31세에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경주 용담집에 들어앉아 구도의 사색을 시작했습니다. 음력 10월 부인의 고향인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로 이사했습니다.

1855

[을묘천서 획득 및 49일 기도 시작]

'을묘천서'라는 비서를 얻어 신비 체험을 한 뒤, 천성산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기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2세가 되던 1855년 12월 28일, 우연히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일종의 신비 체험을 했습니다. 이후 경상남도 양산 천성산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기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856

[천성산 기도 중단]

천성산 내원암에서 49일 입산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별세로 47일 만에 중단했습니다.

1856년 33세에 양산 천성산 내원암으로 가 49일간의 입산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별세로 47일 만에 중단했습니다.

1857

[재차 천성산 기도 및 용광업 시작]

다시 천성산 적멸굴에서 49일 입산기도를 마친 후 생업으로 용광업을 경영했습니다.

1857년 34세에 다시 천성산 적멸굴로 가 49일 입산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생업으로 용광업을 경영했습니다.

1858

[용광업 중단]

용광업을 그만두고 구도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1858년 35세에 용광업을 그만두었습니다.

1859

[고향 용담 귀향]

오랜 유랑 생활과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돌아와 정착했습니다.

1859년 36세가 되던 해 울산을 떠나 경주 용담으로 귀향하여 정착했습니다.

1860

[동학 창시 및 초대 교조 등극]

'천사문답'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특별한 종교 체험을 통해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했습니다. 이로써 조선 말기 새로운 민족 종교인 동학의 초대 교조가 되었습니다.

고향에 정착한 지 1년 뒤인 1860년 음력 4월 5일(양력 5월 25일), 최제우는 이른바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 끝에,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창명)하게 됩니다. 이 무렵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과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침입 등 열강의 세력 침투로 조선의 민족적인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서학(천주교)의 전래는 많은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유교·불교·선교 등의 교리를 종합한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하였습니다.

1861

[동학 교리 체계화 및 포덕 개시]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 방법을 정하고 교리 체계를 세운 뒤, 용담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포덕을 시작했습니다.

1861년 음력 4월경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하는 방법을 정하고 교리 체계를 세웠습니다. 음력 6월부터 용담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포덕(布德)을 시작했으며, 음력 7월에 <포덕문>을 지었습니다.

[동학, 서학으로 몰리며 탄압 직면]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최제우의 도를 서학으로 몰기 시작하며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1861년 음력 8월,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최제우가 가르치는 도를 로마 가톨릭교회(서학)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안심가>를 지었습니다.

[경주 관아의 활동 중지 명령, 남원으로 피신]

경주 관아에서 동학 활동 중지 명령이 내려지자, 용담을 떠나 울산, 부산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했습니다.

1861년 음력 11월, 경주 관아에서 최제우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최제우는 용담을 떠나 울산, 부산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했고, 음력 12월에 남원에 당도하여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간 체류했습니다.

1862

[포덕 활동 재개 권유]

경주로 돌아와 박대여 집에 은신하며 측근들에게 포덕 활동을 재개하라고 권유했습니다.

1862년 음력 7월 경주로 돌아가 박대여 집에 은신했고, 음력 8월 측근들에게 포덕에 나서라고 권유했습니다.

[경주진영에 체포, 석방 후 피신 및 접주 임명]

경주진영에서 체포되었으나 며칠 후 석방되어 용담으로 돌아왔고, 이후 흥해 매산리로 피신하여 최초의 접주들을 임명했습니다.

1862년 11월 20일(음력 9월 29일) 경주진영에서 최제우가 체포되었습니다. 최제우는 음력 10월 5일 석방되어 용담으로 돌아왔고, 음력 11월 9일 흥해 매산리로 피신했습니다. 음력 12월에 최초로 접주들을 임명했습니다.

1863

[적극적인 교화 활동 전개]

용담으로 돌아와 적극적인 교화 활동을 펼치며 교세를 확장했고, 최시형을 북도중주인으로 임명했습니다.

1863년 음력 3월 다시 용담으로 돌아왔습니다. 음력 5월 하순부터 적극적으로 교화활동을 벌였습니다. 음력 7월에 최경상(해월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했습니다.

1864

[관군에 체포되다]

동학을 펴기 시작한 지 약 3년 만에 조선 왕조 관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동학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되지 않은 1863년 음력 12월 10일(양력 1864년 1월 18일), 조선 왕조의 관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대구에서 순교하다]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대구 경상감영에서 참형당하며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사후 최시형이 2대 교주를 이어받았습니다.

1864년 4월 15일(음력 3월 10일),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 뜰 앞에서 처형당하며 4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수운의 사망 이후 그의 후계 동학 교주는 최시형이 이어받아 2대 동학 교주가 되었습니다.

1907

[죄명이 풀리다]

대한제국 순종 때 최제우의 죄가 공식적으로 풀렸습니다.

1907년 대한제국 순종 때 최제우의 죄가 공식적으로 풀렸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