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사제, 순교자, 천주교 성인, 여행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26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순교자로,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천주교 박해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15세에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신학을 공부했으며, 1845년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선교 활동 중 체포되어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며,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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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
[김대건 가문의 천주교 귀의]
김대건의 백조부, 조부, 증조부가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며 가문이 천주교에 귀의하기 시작했습니다.
1784년경 김대건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하급 관리였던 증조부 김진후도 관직에서 물러나 입교해 가문이 천주교에 귀의하였습니다.
1801
신유박해로 인해 증조부 김진후는 1801년부터 감옥에 드나들기를 반복했습니다.
1804
증조부 김진후는 1804년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해미성지에서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옥사하였습니다.
1814
증조부 김진후는 해미성지에서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습니다.
1816
김대건의 작은 할아버지인 김한현은 1816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되었습니다.
1821
[김대건의 탄생]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인 김대건이 충청남도 당진시 솔뫼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솔뫼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김제준, 어머니는 고 우르술라였습니다.
1828
김대건이 태어날 때 이미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었고,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시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였습니다.
1836
15살 때인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마카오 유학길에 오름]
김대건은 평신도 신학자 정하상 등의 도움으로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나 만주와 요동을 거쳐 마카오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한양에서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 김대건은 평신도 신학자인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조선교회에서 활동한 이광렬(요한), 조선에서 중국 청나라로 귀국하는 유방제(파치피코)신부의 도움으로 1836년 12월에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났으며, 만주와 요동을 거쳐서 마카오로 향했습니다.
1837
[마카오 도착 및 유학 시작]
김대건 일행은 유학의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신학, 철학, 지리, 역사, 라틴어, 프랑스어 등을 배우며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동양경리부의 불란서 가톨릭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온 신학생들에게 직접 신학, 철학, 지리, 역사,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라틴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습니다.
김대건 신학생의 약한 체질, 서양과 동양의 전통이 다른 문화충격, 최방제 신학생의 병사(위열병, 1837년 11월 26일에서 27일)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1839
[아버지 김제준의 순교]
기해박해의 여파로 아버지 김제준이 아들 김대건을 서양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 보낸 죄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며 순교했습니다.
기해박해 여파로 아버지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을 서양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을 보낸 중죄인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선교사들과의 마닐라 피신]
마카오의 정치 상황이 불안정해지자 파리 외방전교회 지침에 따라 선교사들과 김대건 신학생은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했습니다.
조차지인 마카오를 통치하던 포르투갈 정부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불이익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세종로성당에서 연재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사에 따르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정치가 불안해지면 피신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 지침에 따라1839년 4월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했습니다.
[롤롬보이 수도원에서의 학업]
필리핀 롤롬보이의 성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이동하여 안정된 환경에서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들과 수사들의 친절 덕분에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고 학문 정진에 힘썼습니다.
1839년 5월 이동한 필리핀 롤롬보이의 성 도미니코 수도원 성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서 공부할 때에 안정된 환경과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들과 수사들의 친절덕분에 몸과 마음의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1840
[당고모 김 데레사의 순교]
김대건의 당고모였던 성녀 김 데레사가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서울포청에서 교사당하며 순교했습니다.
또한 당고모였던 성녀 김 데레사도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840년 초 서울포청에서 교사되었습니다.
1842
[프랑스 함대 통역 및 조선 귀국 시도]
프랑스 함선 에리곤 호의 함장이 조선 방문을 위해 통역을 요청하자, 김대건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함선에 올라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아 조선에 돌아가려 했습니다.
1842년 2월 프랑스의 프리깃함인 에리곤 호 선장인 장 밥티스트 세실이 조선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선교부 소속인 리브와 신부에게 통역 한 사람을 비밀리에 요청하였다. 신학생이 라틴어로 대답하면, 선교사가 프랑스어로 옮길 수 있도록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가 에리곤 호에 올랐습니다.
[난징조약 체결 현장 참관]
프랑스 함선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 난징조약 체결 현장을 참관하며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견문을 넓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프랑스 함선을 타고 조선에 돌아가는 여행길에 오른 김대건은 난징조약 체결현장 참관(1842년 8월 29일)등의 경험으로써 견문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조선 귀국 재차 좌절]
프랑스 함장 세실이 함선 내 환자 발생과 짧은 여행 예정 기간을 이유로 조선 항해를 망설이자, 김대건의 귀국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1842년 9월 세실 함장이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갈 항해를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의 여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1844
[조선 동북방 입국로 탐색]
조선 입국을 위해 힘쓰던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용기와 열정이 남다른 김대건은 훈춘에서 두만강을 건너 경원으로 입국하는 동북방 입국로의 이용 가능성을 알아보도록 지시를 받고 출발했습니다.
1844년 조선 입국을 위해 애쓰던 페레올(Ferréol, 高) 주교는 용기와 열정이 남다른 김대건에게 훈춘(琿春)에서 두만강을 건너 경원으로 입국하는 동북방 입국로의 이용 가능성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김대건은 1844년 2월에 출발하였습니다.
김대건은 1844년 2월에 출발하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4월에 돌아왔습니다.
김대건은 1844년 12월 가톨릭 부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845
[라파엘호 타고 상하이로 출항]
부제 때 조선에 잠시 들어온 김대건은 선박 '라파엘호'를 구입하여 천주교 신자 12명과 함께 제물포항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습니다.
부제 때 조선에 잠시 들어온 김대건 부제는 당시 돈 146원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천주교 신자 12명과 함께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하이로 갔습니다.
[한국인 최초 사제 서품]
상하이 진쟈샹 성당에서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샹(金家港,금가항)성당에서 세번째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가톨릭 사제 성품을 받았습니다. 당시 같이 따라간 조선의 천주교 신자 12분, 선교사, 중국 천주교 신부 1분등이 서품을 축하했습니다. 특히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이 교회를 사랑하셔셔 조선 처음의 천주교 사제가 서품받았다'라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한국인 최초 미사 집전]
사제 서품 일주일 후, 상하이 횡당성당에서 한국인 최초로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중요한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일주일 후인 8월 24일 상하이 진쟈상 성당에서 30킬로미터가 떨어진 상하이 횡당성당(상하이 예수회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천주교 미사를 드렸습니다. 상하이 예수회 고틀랑 신부가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1845년 7월 8일자 서한(9월 12일 추신을 적어 발송)에는 '… 그(김대건 신부)는 그의 첫 미사를 8월 24일 주일, 다블뤼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완담(즉 횡당) 신학교에서 드렸습니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조선 귀국을 위한 출항]
사제 서품 후 조선으로 돌아가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났습니다.
1845년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났습니다.
[제주도 표착]
상하이 출항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고, 2~3일간 배를 수리하고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황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현재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하게 되었습니다.
[제주도 출항]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서 배 수리와 음식 준비를 마친 후, 다시 조선 본토로 향하기 위해 출항했습니다.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조선 입국]
길고 험난했던 여정 끝에 금강 하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하며 조선 입국에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즉, 김대건은 1845년 10월 조선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 내 사목 활동]
조선 입국 후, 기해박해로 무력화된 교회 상황 속에서도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으며,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12월까지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기해박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선교사들의 순교로 교회가 무력화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사목을 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박해를 피해 전전하던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1846
[항로 개척 중 체포]
외국 선교사 입국에 필요한 항로 개척 지도를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참수형 선고]
학식이 출중하여 대신들의 구명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고 외국인과 접촉했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 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김대건의 순교]
26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국문 효수형을 받고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1857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김대건을 가경자로 선포하였습니다.
1925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습니다.
1960
[시신 이장]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경기도 안성의 미리내 성지에서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성당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비밀리에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김대건의 시신을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안의 성당에 이장되었다.
1972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
김대건 신부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동상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이는 그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2년 5월 12일 동상 제막식이 열렸는데 최성모 신동아그룹 창업주가 자금 전액을 헌납하기도 했습니다.
1984
[성인 시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어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으로 시성하였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2019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지정 신청]
충남 당진시가 프랑스,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으로부터 지지 선언을 확보한 뒤, 유네스코에 김대건 신부의 세계기념인물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충남 당진시는 2019년 6월에 프랑스,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으로부터 지지 선언을 확보한 뒤 유네스코에 세계기념인물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 권고]
유네스코 집행이사회가 제207차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를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19년 10월 17일 제207차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를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 확정]
유네스코가 프랑스 파리 본부에서 제40차 총회를 열고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최종 확정했습니다. 이는 그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 이념과 부합한다고 인정받은 세계적인 영예입니다.
2019년 11월 14일, 유네스코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제40차 총회를 열고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부합한다는 점을 들어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2023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성상 건립]
순교 177주년을 기념하여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이 세워졌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2023년 9월 16일 오후 4시 30분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이 세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