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

실학자, 문신, 시인, 역사가, 사상가,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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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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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서얼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북학파 학자들과 교류하며 실사구시를 주장했고, 특히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사를 고구려 계승 국가이자 신라와 병존한 '남북국 시대'로 재정립하며 한국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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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

[유득공 탄생]

조선 후기의 실학자, 문신, 시인 유득공이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진사 유춘과 남양 홍씨 부인의 외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했습니다. 증조부 유삼익과 외조부 홍이석이 서자였기 때문에 그 역시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1752

[외가 이사]

아버지 유춘이 사망하자 남양의 외가로 이사했다.

1752년(영조 28년) 아버지 유춘이 사망하자 남양의 외가로 이사했습니다.

1757

[한성 귀환]

8세가 되자 외가에서 한성으로 돌아왔다.

1757년 8세가 되자 외가에서 한성으로 돌아왔습니다.

1766

[북학파 박지원 문하 입문 및 학자들과 교류 시작]

18~19세 무렵부터 시짓기를 배웠고, 북학파 박지원에게 사사하며 이덕무, 박제가와 평생의 지기로 교류를 시작했다.

유득공은 18~19세부터 시짓기를 배웠습니다. 20세 이후에는 북학파인 박지원에게 사사하고 이어 이덕무, 박제가를 만나 그들과 평생의 지기로 교류했습니다.

1772

[《영재집》과 《동시맹》 출간]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을 출간하고,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을 편저하였다.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冷齋集)》을 출간하고,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을 편저했습니다.

1773

[생원시 합격]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이후 진사시에도 합격했다.

1773년(영조 49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습니다. 그 뒤 영조 때 진사시에도 합격했으나, 서얼 신분으로 관직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1777

[《중주십일가시선》 출간]

청나라 여행과 관련된 기행문이자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을 출간하였다.

청나라 여행의 기행문이자 여러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을 출간했습니다.

1779

[정조의 서얼허통령으로 규장각 검서관 임명]

정조의 서얼허통령에 따라 시문과 해박한 지식을 인정받아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되었다.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의 4검서'로 불리며 다양한 사료를 접하고 발해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형성했다.

32세 되던 1779년(정조 3)에 정조의 서얼허통령에 따라 시문과 글짓기, 해박한 지식이 인정되어 규장각 검서관(奎章閣 檢書官)에 특별히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그와 함께 임명된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의 4검서'라 불렸습니다. 규장각 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 사료를 읽을 기회를 얻었고, 신라 위주의 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발해사가 국사에서 제외된 것을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1786

[포천 현감 등 관직 역임 시작]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얻어 서얼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포천 현감, 제천 군수, 양근 군수, 가평 군수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기 시작했다.

시문과 재주에 능하여 정조의 특별한 지우를 얻은 계기로 그는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1786년 포천 현감을 시작으로 제천군수, 1788년 양근군수, 1792년 가평 군수 등을 지냈습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규장각 검서 직함을 유지하며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와 함께 4검서로 불렸습니다.

1790

[《발해고》 저술 및 남북국 시대론 제시]

신라 위주의 국사 체계를 비판하고 발해사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인식한 역작 《발해고》를 저술 및 출간하여 신라와 발해를 병존하는 '남북국 시대론'을 제시했다.

규장각 검서관 활동 이후, 신라사 중심의 역사를 비판하며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보고, 발해사가 조선 역사 체계에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의 역사를 조명하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발해사에 대한 초기 연구 중 하나로, 후대 학자들의 연구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800

[정조 승하와 은거 시작]

그를 아끼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국내외를 유람하고 기행문, 소설, 역사서 등의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풍천도호부사로 나갔으나 1800년 8월 18일 그를 아끼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했습니다. 이후 개성, 평양, 공주 등 국내 옛 도읍지를 유람하고 두 차례 중국 베이징에 연행하여 경험을 토대로 기행문과 소설, 역사서 등의 뛰어난 저술을 남겼습니다.

1807

[유득공 사망]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1807년 10월 1일(순조 7년 음력 9월 1일)에 59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송산리(현 의정부시 송산동) 송산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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