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실학자, 북학파, 정치인, 외교관, 저술가, 시인, 화가, 경제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12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북학파의 거두.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하며 조선의 폐쇄성과 구태의연함을 비판했다.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개혁 사상을 펼쳤으나, 시대적 한계와 정치적 격변 속에 유배되어 불운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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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
[초정 박제가 출생]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가 한성부에서 아버지 박평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50년 11월 5일, 한성부에서 아버지 박평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여 읽은 책은 반드시 세 번씩 베껴 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고 한다. 변소에 가면 옆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앉아서는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하는 등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1760
[아버지 박평 사망]
11세 때 아버지 박평이 사망하면서 본댁에서 나오게 되어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으나,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11세가 되던 해 아버지 박평이 사망하였다. 이후 본댁에서 나와 거처를 자주 옮겨다니며 어머니가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박제가는 이러한 어머니의 지극 정성을 가슴 깊이 새기며 밤을 새워가며 공부에 매진했다. 이 경험은 훗날 사회적 천대와 멸시, 양반 제도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766
[이관상의 서녀와 혼인]
16세에 이순신 5대손이자 선비인 이관상의 서녀와 혼인하여 그의 학문 연구를 지원받았고, 이관상의 집에서 거주하며 성리학과 글을 배웠다.
1766년, 16세의 박제가는 이순신의 5대손이자 학자인 이관상의 둘째 서녀와 혼인하여 서녀사위가 되었다. 이관상은 박제가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주를 아껴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신의 집에서 거주하며 독서를 지원했고, 서실에 출입하게 하여 성리학과 글을 가르쳤다.
1769
[연암 박지원 문하에서 수학]
19세에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 당대의 많은 실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폭을 넓혔고, 특히 이덕무와는 절친한 벗이 되었다.
1769년, 19세가 되던 해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 당대 명망 있는 실학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특히 이덕무와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이 시기에 홍대용 등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과 사회적 차별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1773
[서얼 신분으로 인한 음서 출사 좌절]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려 했으나, 서얼이라는 이유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여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다.
1773년 3월, 박제가는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려 시도했으나,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결국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는 그가 사회적 불평등과 봉건적 신분제도의 모순에 대해 더욱 깊이 성찰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776
[시집 '건연집' 청나라에 소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합작한 시집 《건연집》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사대가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776년,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까지 소개되면서 박제가는 조선의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그의 문학적 재능이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778
[청나라 사은사 수행 및 '북학의' 저술 시작]
29세에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원, 반정균 등 학자들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접했고, 귀국 직후 《북학의》를 저술하기 시작하며 개혁 사상의 기틀을 마련했다.
1778년, 29세의 나이로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청나라의 학자 이조원, 반정균 등과 학문을 교류하고 서양의 선진 문물을 직접 보고 느꼈다. 귀국 직후 그는 도구의 개량과 사회, 정치 제도 개혁에 관한 내용을 담은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 저서는 실사구시 사상을 토대로 실생활 개선과 정치·사회제도 전반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1779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 임명]
정조의 서얼 중용 정책에 따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되어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함께 등용되었다. 숙직 중 책을 읽다 잠든 그를 정조가 격려하는 등 왕의 신임을 받았다.
1779년 3월,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설치하고 박제가를 비롯한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 서얼 출신 학자들을 특명으로 임명하여 등용했다. 박제가는 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며 비장된 서적들을 탐독하고, 정조 및 국내 저명 학자들과 교류하며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 간행했다. 정조는 밤새 숙직하며 책을 읽다 잠든 그를 직접 격려하며 담요를 덮어주기도 했다.
1785
[전설서 별제 임명 및 서얼 등용 상소]
전설서 별제에 임명된 후 사직하려 했으나 정조의 만류로 취임했고, 시정 개혁 상소를 통해 유능한 서자들의 관직 진출(허통)을 강력히 주장하여 정조의 수용을 이끌어냈다.
1785년, 전설서 별제(典設署別提)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하려 했으나 정조의 간곡한 만류로 취임하였고, 이때 시정 개혁 상소를 올려 서자들 중에도 유능한 인재가 많으므로 이들의 관직 진출을 막는 것은 부당하다며 서얼들의 허통(許通)을 상소하였다. 주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그의 상소를 받아들여 서얼 등용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1786
['병오소회' 상소로 개혁 방안 제시]
전설서 별제로서 '병오소회(丙午所懷)'를 정조에게 상소하여 상공업 장려, 신분차별 타파, 해외통상, 서양인 선교사 초청, 과학기술 교육 진흥 등 혁신적인 국가 부강책을 건의했으나, 당시 지배층의 반발로 묵살되었다.
1786년, 정조가 관리들에게 시정 폐단을 고칠 방안을 구언했을 때, 전설서별제 박제가는 '병오소회(丙午所懷)'를 상소로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상공업 장려, 신분차별 타파, 해외통상, 서양인 선교사의 초청 및 과학기술 교육의 진흥 등 파격적인 국가 부강책과 국민 생활 향상 방안을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당시 지배층의 이해와 상반되었기에 묵살되었고, 오히려 노론 벽파 세력의 심한 반발과 비판을 받았다.
1790
[건륭제 팔순 잔치 진하사절 수행]
건륭제 팔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하사절의 수행원으로 유득공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790년 5월, 건륭제의 팔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하사절이 파견될 때 박제가는 진하사 황인점, 부사 서호수의 수행원으로 유득공 등과 함께 청나라에 동행했다.
1791
[군기시정 임명 후 청나라에 동지사 수행]
정조의 특명으로 임시 군기시정에 임명된 후 다시 연경에 다녀왔고, 귀국 후 정식 군기시정에 임명된 그해 겨울 동지사를 수행하여 또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건륭제의 팔순 축하 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정조의 특명으로 정3품 임시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명되어 원자(훗날 순조)의 탄생을 축하해준 건륭제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다시 말머리를 돌려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791년 귀국 후 정식 군기시정이 되었고, 그해 겨울 동지사(冬至使)가 파견되자 이를 수행하여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1793
[부여 현감 재임 중 '문체반정' 자송문 제출]
부여 현감으로 재직 중 정조의 '문체반정' 지시에 따라 비속한 문체를 쓴 데 대한 반성문인 '비옥희음송' 자송문을 왕에게 바쳤다.
1792년 부여 현감으로 나갔다가 1793년 승정원에서 보낸 내각관문을 받고,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반성문인 자송문을 왕에게 지어 바쳤다. 이는 정조가 북학파 인사들에게 '문체반정'을 선언하며 바른 글을 쓸 것을 지시한 데 따른 것이었다.
1794
[춘당대 무과 장원 급제 및 오위장 임명]
춘당대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오위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양평 현감, 영평 현령, 부여 현감 등을 역임하며 관료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이후 1796년 양평 현감(陽平縣監)이 되고, 같은 해 영평 현감(永平縣令)으로 부임했으며, 1798년에는 다시 부여 현감으로 재직하는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다.
1798
['북학의' 진소본 작성 및 '응지농정소' 상소]
왕에게 바치기 위해 《북학의(北學議)》 진소본을 작성하고, 영조의 적전 친경 60주년을 기념해 농서 구언에 응하여 '응지농정소'와 '소진본북학의'를 올렸다.
1798년, 왕에게 바치기 위한 《북학의(北學議)》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했다. 또한 같은 해 영조가 적전(籍田)에 친히 농사에 참여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가 널리 농서를 구할 때, '북학의'의 내용 일부를 발췌, 골자로 한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와 '소진본북학의(疏進本北學議)'를 올렸다.
1801
[정조 사후 흉서사건 연루로 유배]
정조 사후 정치적 격변기에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았고, 친분이 있던 윤행임의 몰락과 사돈 윤가기의 흉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00년 정조 사후, 노론 벽파의 득세와 함께 소론, 남인, 실학파 계열 학자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1801년 네 번째 연행을 마치고 돌아왔다가 사돈 윤가기가 주모한 흉서사건에 연루되었고, 친분이 깊었던 윤행임까지 연루되면서 박제가 역시 윤가기, 윤행임의 당여로 몰렸다. 결국 정순왕후와 노론 영수 심환지를 비방하는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9월 함경북도 회령의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1805
[유배 해제 후 사망]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은 채 1805년 7월 6일 사망하였다. 만년에는 시력 악화와 둘째 딸의 죽음 등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1805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 이후의 행적과 죽음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가족 정보에 1805년 7월 6일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년에는 검서관 생활로 인한 시력 악화로 왼쪽 눈에 이어 오른쪽 눈 시력까지 희미해졌고, 시집간 둘째 딸이 먼저 죽는 아픔을 겪는 등 개인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 암현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실전되었다.
1997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
그의 학문적 업적과 개혁 사상이 재평가되며 1997년 7월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현대에 와서 그의 가치가 재조명되었다.
1997년 7월, 박제가의 학문적 업적과 개혁 사상이 재평가되면서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이는 그의 시대를 앞서간 통찰력과 개혁 정신이 현대에도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의 학통은 김정희를 거쳐 흥선대원군으로 이어지는 등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