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
문신, 실학자, 과학사상가, 천문학자, 수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11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선구적인 과학사상가입니다. 지구 자전설, 우주무한론 등 혁신적인 과학 사상을 제창했습니다. 과거제 폐지, 균등 교육 등 개혁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청나라 방문 후 서양 문물과 천문학 지식을 습득하며 북학파의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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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
[실학자 홍대용 탄생]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인 홍대용이 충청도 청주목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태어났다.
홍대용은 1731년 4월 7일(음력 3월 1일) 충청도 청주목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색으로는 노론 북학파에 가담하여, 미호 김원행에게 글과 학문을 배웠으며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 등과 가깝게 지냈다.
1762
[사설 천문대 '농수각' 완공]
홍대용이 충청남도 천안에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을 완공하고 혼천의, 자명종 등 천문 관측 기기를 만들어 연구를 시작했다.
1762년 홍대용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수촌마을 자신의 자택 인근에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을 완공했다. 이곳에서 혼천의, 자명종 등 천문 연구 기기를 만들어 천문을 관측하고 연구했다. 그는 이곳에서 지구 자전설, 무한 우주론, 지구 구형설 등을 주장한 대표 저서 《의산문답》을 저술하기도 했다.
1765
[청나라 북경 방문, 서양 문물 접견]
35세의 홍대용이 숙부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군관으로 수행하여, 엄성, 반정균 등과 학문적 교류를 하고 서양 문물과 천문학 지식을 습득하며 북학파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765년(영조 41년) 35세의 홍대용은 숙부 홍억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으로 수행하여 3개월여를 북경에 머물렀다. 그는 엄성, 반정균, 육비 등을 만나 경의, 성리, 역사, 풍속 등에 대해 토론하고 천문학, 지리학, 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특히 천주당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고 할레르슈타인, 고가이슬 등 서양인들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를 여러 번 방문하여 천문 지식을 습득했다. 이는 당시 북학파 학자 중 가장 먼저 서양 문물을 접한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1766
[《유포문답》, 《의산문답》 저술]
북경 방문 후 귀국한 홍대용이 천주교와 천문학 이론을 담은 《유포문답》, 지구 자전설 등 혁신적인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저술했다.
북경 방문에서 돌아온 홍대용은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그는 이 저서들을 통해 지구의 자전설, 경제 정책 개혁, 과거 제도 폐지 및 공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 등 혁신적인 개혁 사상을 제창했다.
1774
1774년(영조 50년), 44세가 된 홍대용은 귀국 후 수차례 과거에 실패한 끝에 음서제에 의해 선공감의 종9품 관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780
[영주 군수 취임]
삼사의 사헌부 감찰직 등을 거쳐 경상도 영주군 군수로 임명되어 자신의 학설을 사회에 도입하려는 노력을 했다.
홍대용은 선공감 관직을 시작한 후 한 차례 사직과 삼사의 사헌부 감찰직 등을 거쳐 1780년 5월 20일 영주 군수로 취임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학설을 직접 사회에 도입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783
홍대용은 1783년 11월 17일 경상도 영주에서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의 학설을 사회에 도입하려 노력했으나, 시대 환경에 억눌려 별다른 성과 없이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