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문신, 학자, 정치가, 역사가, 저술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00
고려 중기의 문신, 학자, 정치가, 역사가입니다.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편찬을 지휘했습니다. 이자겸 전횡에 묵종하며 승진했으나,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반란 진압 후 높은 관직에 오르며 정권을 장악했으나, 만년에는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박학다식함으로 송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습니다. 사후 무신정변으로 부관참시를 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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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
김부식은 1075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본관은 경주 김씨입니다. 신라 왕실의 후예로, 지위가 높은 가문이 아니었기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1100
[과거 급제 및 관직 진출]
고려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직한림원, 좌사간, 중서사인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경륜을 쌓았습니다.
김부식은 고려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 사록과 참군 녹사로 배치되었습니다. 임기가 끝난 후에는 직한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하는 등 차근차근 관직을 높여갔습니다.
1121
[예종에게 경사 강의]
고려 예종 16년, 김부식은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면서 학자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1121년(예종 16년), 김부식은 임금인 예종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아 왕실 교육에 기여했습니다.
1126
[송나라 사행 및 『예종실록』 편찬 참여]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당시 혼란스러웠던 송나라의 상황을 직접 목격했고, 귀국 후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며 역사 편찬의 중요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1126년과 1127년에 김부식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또한 박승중, 정극영과 함께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훗날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시기 어사대인, 호부상서, 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로 승진했고, 수사공을 더했습니다.
[이자겸 피살 후 정치적 지위 급성장]
이자겸이 피살된 후, 김부식은 추밀원사로 승진하며 재추의 반열에 올라 정치적 지위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는 서경파가 득세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되면서 그의 전횡은 끝났고,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했습니다. 이 시기 김부식은 추밀원사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했습니다.
1134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저지]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에 반대하며 인종의 서경 행차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서경파의 정지상 등이 연판장을 돌려 천도를 주장할 때, 김부식은 이를 거부하며 개경 중심 세력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은 1129년(인종 7년) 무렵부터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서경파의 정지상 등이 묘청을 추앙하며 연판장을 돌렸으나, 김부식을 비롯한 몇몇 신료만이 이를 거부했습니다. 서경의 서기 조작이 탄로나고 악천후가 잇따르면서 김부식 등의 반대파 의견이 우세해졌고, 그리하여 1134년(인종 12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1135
[묘청의 난 진압 착수]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 조광, 유담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가 되어 반란 진압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는 개경에 있던 서경파 정지상 등을 처형하고 서경으로 출전했습니다.
1135년(인종 13년)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 조광, 유담 등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가 되어 일단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정지상, 김안, 백수한을 처형하고 출전했습니다. 김부식은 중군장으로서 좌군장 김부의, 우군장 이주연을 거느리고 서경으로 향했습니다.
1136
[묘청의 난 진압 성공 및 정권 장악]
묘청의 서경 반란 잔당을 완전히 소탕하며 반란 진압에 성공했습니다. 이 공로로 수충정난정국공신 칭호와 함께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라는 높은 관직에 임명되며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서인들이 묘청, 유담 등을 죽이고 항복했으나 조광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서경을 포위하고 이듬해인 1136년에 잔당을 완전히 소탕했습니다.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 칭호와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로 임명되었습니다. 김부식은 이 전공을 이용하여 정적인 윤언이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1142
1140년(인종 18년) 이후 김부식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1142년(인종 20년) 스스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145
[『삼국사기』 편찬 완료]
인종의 명을 받아 10인의 편찬자들과 함께 집필을 지휘했던 한국 역사서의 중요한 기록인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을 완료했습니다.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1145년(인종 23년), 인종의 명을 받아 정습명, 김효충 등 10인과 함께 편찬을 지휘했던 『삼국사기』 50권이 완료되었습니다.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등 여러 학자들이 편수에 참여했습니다.
1151
1151년(의종 5년) 김부식은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 개국후로 봉해졌고, 그 후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했습니다. 사후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1170
[무신정변으로 인한 부관참시]
김부식이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체가 훼손되는 '부관참시'를 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김부식이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인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하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고려 시대의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