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문신, 유학자, 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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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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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당나라 유학을 통해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고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귀국 후 시무 10여 조를 건의하며 개혁을 시도했으나 진골 귀족의 반발로 좌절되어 결국 관직을 버리고 은거했다. 《계원필경》 등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자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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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

[최치원 탄생]

신라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인 최치원이 금성 사량부(현재 경주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헌안왕 1년에 금성 사량부(현재 경주시)에서 아버지 최견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금돼지에게 납치되어 잉태했다는 탄생 설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868

[당나라 유학 시작]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라 학문에 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문왕 8년에 12세의 나이로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유학했으며,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학업에 정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는 최치원이 국비 유학생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874

[당 빈공과 장원 급제]

당나라 유학 7년 만에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며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경문왕 14년, 당나라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당나라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2년 동안 동도 낙양을 유랑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876

[당나라 관직 시작]

당 희종 건부 3년에 선주 표수현위에 임명되며 당나라에서의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빈공과 급제 후 당 희종 건부 3년에 선주 표수현위로 임명되어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지은 시와 부를 모아 《중산복궤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880

[고병 막하에서 활동 시작]

생활이 궁핍해지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어려움 속에서 절도사 고병의 추천으로 그의 막하에 관역순관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희종 광명 원년 5월, 절도사 고병의 막하로 들어가 관역순관이 되었고, 이후 병마도통 고병의 종사관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881

[《토황소격문》으로 명성을 떨치다]

황소의 난 진압 중 반란군 지도자 황소를 꾸짖는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 전역에 문명을 떨치고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에 올라 자금어대를 하사받았습니다.

광명 2년 7월 8일, 황소의 난이 발생하자 제도행영병마도통 고병의 종사관으로서 반란군 지도자 황소를 꾸짖는 격문, 이른바 《토황소격문》을 지었습니다. 이 격문은 "땅속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의논했다"는 대목에서 황소가 놀라 의자에서 넘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최치원의 문명은 당 전역에 퍼졌습니다. 이 공로로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에 오르고 자금어대를 하사받았습니다.

885

[신라 귀국 및 초기 관직 활동]

당나라에서 쌓은 명성을 뒤로하고 신라로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고, 당에서 저작한 28권의 문집을 헌강왕에게 제출했으며, 《계원필경》은 한국 최고(最古)의 개인 문집으로 꼽힙니다.

헌강왕 10년 음력 10월에 신라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인 헌강왕 11년에 신라에 도착했습니다. 신라에 도착한 최치원은 당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거나 왕실 사찰의 비문을 짓는 등 국가의 중요한 문장 업무를 맡았습니다.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당에서 지은 《사금체시》, 《오언칠언 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계원필경집》 등 총 28권의 문집을 헌강왕에게 제출했습니다. 이 중 《계원필경》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평가받습니다.

[진골 귀족들의 견제와 외직 발령]

헌강왕 사망 후 정강왕이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에게 밀려 태산군 태수 등 외직으로 나가게 됩니다.

헌강왕이 7월에 사망하고 정강왕이 즉위하자,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의 견제로 인해 중앙 관직에서 밀려나 태산군 태수, 부성군 태수 등 외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893

[하정사 임무 무산]

진성여왕 7년, 흉년과 도적들로 길이 막혀 당나라로 파견되려던 하정사 임무가 무산되었습니다.

진성여왕 7년에 당나라로 파견될 하정사로 임명되었으나, 당시 흉년이 들고 도처에 도적들이 들끓어 길이 막히는 바람에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신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894

[시무 10여 조 상소와 개혁 시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상소하여 아찬 관등을 받고 천령군 태수로 재직하며 신라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진성여왕 8년에 혼란한 신라의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시무 10여 조를 상소했습니다. 이를 통해 아찬 관등을 받았으며, 천령군 태수로 재직하며 백성들의 삶을 돌보고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함양 상림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그의 이상은 완전히 펼쳐지지 못했습니다.

908

[관직 은퇴 및 가야산 은거]

시무 10여 조의 좌절 후 관직을 내놓고 산림을 유랑하며 은거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시무 10여 조가 귀족들의 반발로 좌절된 후, 최치원은 난세를 비관하여 관직을 내놓고 경주 남산, 지리산 쌍계사 등 각지를 유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지며, 908년 이후에 사망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부산 동백섬 일대의 경관에 반해 자신의 호 '해운'을 따서 그 지역 지명을 해운대라고 붙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1023

1023 사후 115년

[사후 문창후 추증 및 문묘 배향]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창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었고, 현종 14년(1023년)에는 '문창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습니다. 또한 문묘에 종사되어 학문의 선현으로 숭앙받게 되었습니다. 경주의 서악서원, 태인 무성서원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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