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
신라 학자, 언어학자, 작가, 문신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6:55
신라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이다. 중국 한자를 신라어에 맞춰 해석한 이두를 집대성하여 유학 연구와 한문 국어화에 크게 기여했다. 신문왕에게 ‘화왕계’를 지어 바쳐 경계하는 등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 홍유후 시호가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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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
655년에 신라에서 원효대사와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났다. 자는 총지, 호는 빙월당이다.
685
[신문왕에게 '화왕계' 지어 바침]
설총은 신문왕에게 꽃을 의인화하여 왕의 어질지 못함을 풍자하고 스스로 자성할 것을 촉구하는 작품인 '화왕계(戒花王)'를 지어 바쳤다.
설총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화왕계(戒花王)'는 꽃을 의인화하여 이야기를 전개한 한문 단편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당시 신문왕의 비행을 경계하고 왕이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충고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719
성덕왕 18년(719년), 설총은 '나마'의 관등을 지닌 상태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를 저술하였다. 이 기록은 그의 문학적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746
[국학에서 구경 강론 및 이두/구결 집대성]
경덕왕 5년 무렵, 설총은 박사로서 국학에서 구경을 구결로 강론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고대 한국어를 한문으로 표현한 첫 문자 체계인 이두를 창시하고 구결 문자를 집대성하여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설총은 신라 신문왕 때 개설된 국학에서 유학을 공부한 후, 경덕왕 5년(746년) 무렵 박사로 임명되어 강수와 함께 9경을 구결로 강론하며 후학들을 지도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연구를 쉽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특히 이두와 구결 문자를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향찰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022
[홍유후 추증 및 문묘 배향]
고려 현종 13년 1월, 설총에게 홍유후(弘儒侯) 시호가 추증되었고, 문묘 동무에 신라 2현으로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었다.
고려 현종 13년(1022년) 1월, 신라의 학자 설총의 학덕을 기려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이후 그는 문묘 동무에 신라의 2현(신라의 유학자 두 분) 중 한 명으로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에도 제향되어 오늘날까지 숭앙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