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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학자, 문장가, 관료, 사상가 + 카테고리
신라 중기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설총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신라 사회의 엄격한 골품제 속에서도 학문적 성취로 우뚝 선 인물입니다. 그는 우리말의 어순에 맞춰 한자를 읽는 이두를 집대성하여 유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신문왕에게 바친 명문장 '화왕계'를 통해 제왕의 올바른 도리를 일깨웠습니다. 사후에도 그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 시대에 홍유후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는 등, 한국 유학의 비조(鼻祖)로서 후대까지 깊은 존경을 받고 있는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655

[파계승과 공주의 아들]

신라의 위대한 고승과 왕실의 공주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부모의 비범한 인연은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으며, 이 아이는 훗날 신라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탄생부터 남달랐던 그의 핏줄은 일생에 걸쳐 특별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머물며 태종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설총을 낳았습니다. 어머니가 진골 내지 성골의 귀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원효가 6두품이었으므로, 당시 신라의 엄격한 골품제 원칙에 따라 설총 역시 6두품의 신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665

[타고난 천재성의 발현]

어린 시절부터 천성에 총명함이 배어 있어 학문에서 놀라운 두각을 나타냅니다. 유교 경전은 물론 역사서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며 박학다식함을 자랑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깊이는 훗날 그가 유학자로 대성하는 탄탄한 밑거름이 됩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설총은 나면서부터 명민했고 자라면서 경전과 역사에 두루 통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천재성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빠르게 성장해 나갔습니다.

680

[이두의 집대성과 보급]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의 어순에 맞게 표기하는 차자 표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이로써 난해한 한문을 쉽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학문의 대중화와 유교 사상의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역사적 업적입니다.
설총이 이두를 최초로 완전히 창제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부터 존재하던 향찰 및 차자 표기법을 집대성하고 완성도를 높여 구경(九經)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도록 체계화했습니다. 이두는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관공서의 행정 실무 등에서 폭넓게 사용되며 국어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681

[한림으로서의 조정 출사]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국왕을 보필하는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문한을 담당하는 요직을 맡아 국가의 주요 문서와 학술적 자문에 응했습니다. 비록 신분상의 제약은 있었으나 그의 탁월한 식견은 조정 내에서 큰 빛을 발했습니다.
신문왕 대에 이르러 설총은 국왕의 측근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학술을 보좌하는 한림(翰林)의 직책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관직에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문장력과 학문적 깊이는 신라 왕실에서 필수불가결한 자산으로 대우받았습니다.

682

[신문왕의 흥미로운 질문]

여름날, 국왕이 궁궐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그를 불러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합니다. 평소 그의 뛰어난 화술과 풍부한 지식을 높이 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 문학사에 깊이 남을 위대한 우화가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비가 갠 어느 늦봄 혹은 초여름, 신문왕이 설총을 불러 '바람이 시원하여 유해진 마음을 달랠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설총은 군주의 올바른 마음가짐을 일깨워주기 위해 식물들을 의인화한 기발한 우화를 즉석에서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꽃의 왕에게 바친 직언]

화려한 모란을 왕으로, 매혹적인 장미를 간신으로, 초라한 할미꽃을 충신으로 의인화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충언을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날카로운 교훈을 이야기에 담아냅니다. 우화의 형식을 빌려 임금의 도리를 직언한 대담한 행보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꽃의 왕인 모란(화왕)은 아첨하는 장미의 매력에 빠져 곁에 두려 하나, 베옷을 입은 늙은 할미꽃(백두옹)이 나타나 군주는 간사한 무리를 멀리하고 정직한 자를 가까이해야 한다고 간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문학사 최초의 창작 우화 소설로 널리 평가받는 《화왕계(花王戒)》입니다.

[후세에 남긴 군주의 거울]

이야기를 경청한 국왕은 그 깊은 뜻을 단번에 깨닫고 크게 감탄합니다. 임금은 이 우화가 군주들에게 훌륭한 경계가 될 것이라며 이를 문자로 기록하게 지시합니다. 그의 재치 있는 언변이 국가의 공식적인 교훈으로 채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신문왕은 설총의 《화왕계》를 경청한 뒤 '그 뜻이 매우 깊으니 글을 지어 후대 임금들의 감계(鑑戒)로 삼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글은 단순히 당시의 왕을 깨우치는 데 그치지 않고, 훗날 《삼국사기》 열전에 전문이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그 뛰어난 문장력과 사상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690

[후학 양성과 유학 진흥]

관직에 머물며 자신이 정리한 새로운 독법을 활용해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유교의 핵심 경전들을 명확하게 해석하여 가르침으로써 국가 전체의 학문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립니다. 이로 인해 신라 사회에 유학이 깊게 뿌리내리게 됩니다.
자신이 체계화한 이두를 바탕으로 육경(六經)과 구경(九經) 등 난해한 유교 경전을 제자들에게 알기 쉽게 가르쳤습니다. 명확한 우리말식 해석이 가능해지면서 유학은 소수 귀족의 전유물을 넘어 더 넓은 지식인층으로 확대될 수 있었고, 이 공로로 그는 신라 유학의 대학종(大宗)으로 굳건히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692

[효소왕 즉위와 지속적 헌신]

신문왕이 승하하고 새로운 국왕이 즉위한 후에도 조정에 남아 굳건히 자리를 지킵니다. 학문적 권위와 국가적 헌신을 바탕으로 변함없이 왕실의 중대한 자문에 응합니다. 여러 대에 걸쳐 국정을 보좌하며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다했습니다.
효소왕이 새롭게 즉위한 이후에도 설총의 학문적 명성과 정치적 조언자로서의 입지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신라 왕실은 주요 문서 작성과 외교 및 행정 실무에서 그의 해박한 유학적 지식과 뛰어난 문장력을 계속해서 필요로 했기에, 그는 관료로서 꾸준히 중용되며 국정에 기여했습니다.

702

[성덕왕 시대의 으뜸 문장가]

태평성대라 불리는 시대가 도래하며 국가의 각종 주요 기록물과 금석문을 작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의 붓끝에서 나오는 유려한 문장들은 국가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습니다. 신라의 찬란한 문화 부흥기에 그 중심에 당당히 서 있었습니다.
성덕왕 대는 신라 중대의 전성기로, 유교 정치 이념이 더욱 굳건히 자리 잡으며 문화가 융성하던 시기입니다. 이 평화의 시대에 설총은 국가의 핵심 문장가로서 여러 금석문을 찬술하는 등 자신의 학문적, 문학적 역량을 최고조로 발휘하며 왕실의 두터운 신임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719

[감산사 조상기 찬술]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널리 인정받아 국가적 사찰의 중대한 불상에 새겨질 명문을 직접 짓게 됩니다. 유려한 필치로 불교적 신앙심과 국가 및 개인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바위에 아로새겼습니다. 이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매우 귀중한 육필 문장 중 하나입니다.
성덕왕 18년(719년), 중아찬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감산사를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할 때, 설총이 그 유래를 정성껏 담은 <감산사 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 阿彌陀如來造像記)>를 지었습니다. 이 금석문은 현존하는 설총의 얼마 안 되는 귀중한 저술로서 그의 뛰어난 한문학적 소양을 생생하게 증명해 줍니다.

720

[거성의 고요한 쇠락]

평생을 학문 연구와 국가 발전에 헌신했던 위대한 학자가 마침내 세상을 떠납니다. 신라의 유학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그의 죽음은 당대 학계에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숭고한 가르침은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후대로 전승되었습니다.
설총의 정확한 몰년은 사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719년 감산사 조상기를 유려하게 작성한 이후의 행적이 전혀 보이지 않아 대략 720년경을 전후하여 조용히 생을 마감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후 그의 무덤은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보덕동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779

[아들 설중업의 일본 사행]

그의 훌륭한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훗날 신라를 대표하는 외교 사절로 선발되어 바다를 건넙니다. 이국땅에서 아들은 위대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빛나는 명성 덕분에 대단히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국경을 넘어 타국에까지 이 가문의 학문적 위상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설총의 아들인 설중업(薛仲業)이 혜공왕 시기에 신라의 공식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저명한 문인 학자인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가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이자 당대 제일의 문장가 설총의 아들임을 알고 즉석에서 찬양하는 시를 지어 극진히 환대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그의 명성은 이미 국제적이었습니다.

1022

[홍유후 시호 추증]

세월이 흘러 왕조가 교체된 후에도, 그의 위대한 학문적 공로가 다시 한번 찬란하게 조명받게 됩니다. 고려의 국왕이 그에게 영광스러운 시호를 특별히 내려 학문적 업적을 국가적으로 기렸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신라의 문인을 넘어 한반도의 위대한 스승으로 공인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고려 현종 13년(1022년),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과 함께 그 눈부신 학문적 공적을 재차 높이 평가받아 '유학을 크게 넓혔다'는 숭고한 의미를 담은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국가로부터 추증받았습니다. 이는 후대 왕조에서도 설총을 한국 유학의 진정한 비조로 확고히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문묘 배향의 영예]

시호 추증과 함께 유학의 최고 성인들을 모시는 국가 최고 사당에 배향되는 더없이 큰 영예를 안게 됩니다. 신라 시대 인물로는 극히 드물게 공자와 함께 제사를 받는 신성한 반열에 올랐습니다. 유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위대한 성취를 사후에 이룩한 것입니다.
현종의 어명에 따라 국립 대학 내에 위치한 성스러운 사당인 문묘(文廟)의 종사(從祀) 인물로 최종 결정되어 위패가 정중히 모셔졌습니다. 이로써 설총은 우리나라 역사상 문묘에 배향된 위대한 '동국 18현(東國十八賢)' 중 핵심적인 한 명으로 영원히 기록되며 후대 유림들의 흔들림 없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1145

[삼국사기 열전 기록]

당대 최고의 역사가가 편찬한 국가 정사에 그의 전기가 독립된 항목으로 매우 비중 있게 수록됩니다. 그가 남긴 명문장과 파란만장한 생애가 공식적인 역사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철저한 문헌을 통해 그의 위대한 업적이 후세에 온전히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김부식이 심혈을 기울여 편찬한 《삼국사기》 제46권 열전에 설총의 전기가 단독으로 실렸으며, 특히 신문왕에게 바쳤던 빛나는 우화인 《화왕계》의 전문이 이곳에 누락 없이 기록되어 보존되었습니다. 이 상세한 열전 기록 덕분에 설총의 생애와 이두 집대성, 그리고 뛰어난 문학적 역량이 오늘날까지 소상히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1285

[삼국유사의 탄생 비화 수록]

야사를 훌륭하게 집대성한 승려의 역사책에 그의 신비로운 탄생 설화와 위대한 아버지의 행적이 매우 상세히 기록됩니다. 정사에서는 굳이 다루지 않았던 가문의 내밀하고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세상에 전해집니다. 이를 통해 그의 탄생 배경이 대중들에게 더욱 입체적으로 조명되었습니다.
승려 일연이 정성껏 저술한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 조에는 아버지 원효가 자루 빠진 도끼를 노래하며 요석궁에 들어가 요석공주와 깊은 인연을 맺고 설총을 낳게 된 극적이고 신비로운 과정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설화적 기록은 설총의 범상치 않은 가계와 신라 중대의 자유로운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1561

[서악서원 제향 건립]

조선 시대에 이르러 지역 유림들의 뜻을 모아 그를 숭고하게 기리는 사액 서원이 새롭게 건립됩니다. 천 년의 기나긴 세월을 뛰어넘어 후학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엄숙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지적 영향력이 조선 선비들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깊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조선 명종 16년(1561년),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 최치원, 그리고 설총을 정성스레 추모하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훗날의 서악서원)를 창건하여 세 사람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이후 이 유서 깊은 서원은 임진왜란의 참화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속에서도 훼철되지 않고 굳건히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그 향사를 경건하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1800

[경주 설씨의 시조로 추앙]

후손들이 그를 가문의 자랑스러운 시조로 삼아 묘역을 성역화하고 체계적으로 족보를 편찬하며 가문의 정통성을 확고히 확립합니다. 신라를 빛낸 최고의 대학자라는 강렬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문중의 결속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위대한 선조의 얼을 기리는 후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장식하게 됩니다.
설총의 직계 후손들은 그를 중시조 내지 시조로 삼아 명문가인 경주 설씨(慶州 薛氏)의 뼈대 있는 가계를 성실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러 문중 차원에서 흩어진 족보를 정비하고 경주 보덕동에 위치한 묘역을 성역화하는 등, 유학의 종장인 설총을 모시는 후손으로서의 뜨거운 자긍심을 세대를 거쳐 깊이 전승하고 있습니다.

1990

[한국 유학의 시조 재조명]

현대에 들어와 고전문학과 국어학, 그리고 역사학계 등 학계 전반에서 그의 업적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활발한 학술 연구가 줄을 이으며 진행됩니다. 단순한 신라의 관료를 넘어 한국 고유의 지성사를 개척한 독보적인 사상가로 찬사를 받습니다. 그의 고귀한 정신은 현대 교육의 중요한 뿌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대 국어학계에서는 설총의 이두 집대성이 외래의 한문 수용 과정에서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우리말 언어 체계를 확립하려 한 위대한 학문적 시도로 높이 평가합니다. 또한 철학 및 문학계에서는 《화왕계》를 비롯한 그의 행적이 한국 유교 사상의 자생적 발전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지표로 꼽으며, 교과서 등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핵심적으로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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