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
무신, 정치가, 발명가, 과학기술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6:36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자 정치가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 개발에 성공한 인물입니다.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다양한 화약 무기를 만들고, 진포 해전 등에서 왜구를 격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고려의 국방력을 강화하고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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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5
[최무선 출생]
고려 충숙왕 12년, 영주(현 경상북도 영천)에서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술과 병법에 밝았으며, 화약 무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최무선은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영주(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에서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았으며, 병법 논하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어려서부터 화약 무기에 관심을 가져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중국어에도 뛰어났다.
1370
[중국인 이원에게 화약 제조법 전수받음]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고자 화약 무기 개발에 몰두하며, 원나라 강남 상인 이원으로부터 화약 제조에 관한 비법을 어렵게 전해 들었다.
문하부사의 벼슬을 지내던 최무선은 왜구의 노략질에 대응하기 위해 화약과 총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화약 제조법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화약 제조법은 중국의 철저한 비밀이었으나, 그는 원나라의 강남 상인 이원과 친분을 쌓아 화약 제조에 관한 몇 가지 비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염초 추출 방법과 유황, 목탄 혼합 비율 등 핵심 기술을 습득했다.
1377
[화통도감 설치 건의 및 초대 제조 취임]
수년간 화약 제조의 중요성을 도당에 끈질기게 건의한 끝에, 우왕 3년 화약 무기 개발을 전담하는 관청인 화통도감이 설치되었다. 최무선은 초대 제조로 임명되어 다양한 화약 무기 개발을 총괄했다.
최무선은 직접 화약을 만들어 시험해본 후 도평의사사에 화약 개발과 시험을 건의했지만, 처음에는 믿지 않거나 사기꾼으로 여기는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건의한 끝에 우왕 3년(1377년) 10월, 그의 성의가 인정받아 화약 무기를 만드는 관청인 화통도감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제조로서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 석포, 화포, 신포, 화전, 화통 등 여러 종류의 총포류 및 발사용, 기타 화기를 개발하고 전함 개량에도 힘썼다.
1380
[진포 해전에서 화약 무기로 왜선 5백 척 격파]
1380년 왜구 선단 5백 척이 진포에 침입하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참전하여 직접 개발한 화통과 화포를 사용하여 왜선 전체를 불태우는 대승을 거두며 고려의 화력을 세계에 알렸다.
1380년 왜구 선단 5백 척이 진포에 출몰하여 서천과 금강 어구까지 올라와 약탈을 자행했다. 최무선은 부원수로 임명되어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출항, 직접 개발한 화통과 화포 등을 사용하여 왜선 500척을 모두 불살라 격파했다. 이 해전은 왜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사관은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1383
[관음포 전투에서 왜구 재차 격퇴]
1383년 왜구가 남해 관음포에 재차 상륙하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출정하여 화기를 활용해 또다시 왜선을 격침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로써 왜구의 침입이 크게 줄어들었다.
1383년 왜구가 다시 남해의 관음포에 상륙하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출정하여 이 전투에서도 화기를 써서 왜선을 격침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후 화약 병기의 사용은 왜구 격퇴에 크게 기여하여 왜구의 침입이 대폭 줄어들었다.
1389
[화통도감 혁파 및 군기시 통합]
창왕 1년 조준 등의 주장으로 화통도감이 혁파되고 군기시에 통합되었다. 이는 왜구의 침입 감소를 명목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신흥 무인 세력이 화약 무기 보급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우왕 14년(1388년)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이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고, 이듬해인 창왕 1년(1389년) 조준 등의 주장으로 화통도감은 혁파되어 군기시에 통합되었다. 이는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어 더 이상 무기 제조가 필요 없다는 이유였지만, 실은 화약 무기의 보급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까 걱정한 때문이었다. 같은 해 최무선은 왜구의 본거지로 알려진 대마도 정벌에 출정하여 포로로 끌려간 고려인 백여 명을 구출하기도 했다.
1392
[조선 개국 후 관직 임명]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한 후, 이방원의 건의로 70세 가까운 나이에 정헌대부 검교참찬 문하부사 겸 판군기시사에 임명되며 조선의 화약 기술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연 공양왕 4년(1392년) 7월, 태종 이방원의 건의로 최무선은 정헌대부 검교참찬 문하부사 겸 판군기시사가 되었다. 당시 그는 이미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다.
1395
[최무선 사망]
태조 4년 4월 19일 사망했다. 임종 시 아들 최해산에게 화약 제조법과 염초 채취 방법을 기술한 '화약수련법', '화포법' 등의 저술을 물려주어 후대에도 기술이 이어지도록 했다.
태조 4년(1395년) 4월 19일에 사망했다. 태조실록에 실린 졸기에 따르면 최무선은 임종할 당시 책 한 권을 부인에게 주며 아들이 다 자라면 줄 것을 당부하였고, 아들 최해산의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유언대로 최무선의 책을 물려주었는데, 그것은 화약의 제조법과 염초의 채취 방법 등을 기술한 '화약수련법', '화포법' 등의 저술이었다. 그의 아들 최해산은 그 비법을 배워 조선의 군기시 직무에 활용하였다.
1401
[사후 우정승 및 영성부원군 추증]
사망 후 태종 1년(1401년) 그의 공을 인정받아 의정부 우정승 영성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이는 국가에 대한 그의 지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태종 1년(1401년) 조정은 그가 세운 공을 참작하여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