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

고구려 장군, 고구려 대신, 살수 대첩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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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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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군, 고구려 대신, 살수 대첩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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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이자 대장군으로, 제2차 고수 전쟁에서 수나라 대군을 살수에서 크게 물리쳐 고구려를 지켜낸 영웅입니다. 그의 생몰연대나 출신 등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살수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후대에는 국난 극복의 상징으로 추앙받으며, 그의 지혜를 담은 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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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을지문덕의 풍자시 '여수장우중문시']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여수장우중문시'는 고구려의 승리를 예견하며 적장을 조롱하는 내용으로, 그의 뛰어난 지략과 문장력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에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5언4구 고시로 평가받는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별동대를 유인하는 작전을 펼치던 중,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라는 제목의 시를 보냈다.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신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싸움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라는 내용으로, 이는 그의 지략과 문장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동시에, 승리에 도취한 적장을 조롱하며 회군을 종용하는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이 시는 한국에 현전하는 이른 시기의 5언4구 고시로 문학사적 가치도 높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시작 및 별동대 조직]

612년 1월, 수 양제가 10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요동성에서 발목이 잡혔다. 이에 수 양제는 6월, 우문술과 우중문 등이 이끄는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직공하도록 했다. 이 별동대는 을지문덕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극심한 피로와 식량 부족을 겪게 되었다.

612년 1월(음력) 수 양제가 100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로 출병하였다. 요동성 전선에서 몇 달간 발목이 잡히자 6월(음력), 우문술, 우중문 등 30만 5천 명의 아홉 군을 별동대로 조직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진군하게 했다. 별동대는 100일 치 양식, 무기, 옷감 등 온갖 물자를 지고 행군을 시작했으나, 병사들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몰래 버리는 바람에 압록강에 닿기도 전에 식량 부족에 허덕였다.

[을지문덕의 수나라 진영 침투]

수나라 별동대가 식량 부족에 허덕일 때,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을 가장하여 수나라 진영에 직접 들어가 적의 형편을 살폈다. 양제의 밀지에 따라 그를 억류하려던 우문술과 우중문을 위무사 유사룡이 설득하여 을지문덕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식량 부족에 허덕이던 수나라 별동대 진영에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을 하며 직접 찾아가 적의 상황을 엿보았다. 수 양제에게서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밀지를 받았던 우문술과 우중문은 그를 억류하려 했으나, 위무사로 종군하던 유사룡의 만류 덕분에 을지문덕은 무사히 진영을 빠져나왔다.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유인 작전]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을 평양성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치밀한 유인 작전을 펼쳤다. 수나라군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일부러 패배를 거듭하며 도주했고, 우중문에게 조롱하는 시까지 보내 심리전을 펼쳤다. 수나라군은 이에 속아 승리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 평양성 코앞까지 다다랐으나 이는 을지문덕이 적을 지치게 하려는 기만 작전이었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빠져나온 것을 후회한 우중문이 다시 오라고 했으나 을지문덕은 이를 무시했고, 수나라 기병이 추격해왔다. 을지문덕은 수나라군과 싸울 때마다 일부러 패배하며 우중문에게 희롱하는 시를 보내 심리전을 펼쳤다. 우중문이 회유하는 답서를 보내자 을지문덕은 영채를 불태우고 철수하며 약을 올렸다. 수나라군이 압록수를 건너 몰려오자 하루에 7번 싸워 모두 지는 등 후퇴를 거듭하며 적을 평양성 30리 앞까지 유인했다. 이는 수나라군이 굶주리고 지쳐있음을 간파하고 그들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려는 을지문덕의 치밀한 유도 작전이었다.

[살수 대첩의 대승]

612년 7월, 을지문덕의 기만 작전과 유인에 지칠 대로 지쳐 회군하던 수나라 별동대가 살수(청천강)를 건널 때, 고구려군은 맹렬히 공격했다.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하루 만에 450리를 도주하는 등 수나라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30만 5천 명 중 겨우 2,700명만이 요동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이 대승으로 제2차 고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수나라군이 평양성 앞에서 지치고 병참에 문제가 생기자, 을지문덕은 다시 한번 거짓 항복 서신을 보내 회군을 유도했다. 수나라군이 방진을 치며 퇴각하기 시작하자 고구려군은 끈질기게 추격하며 싸움을 반복했다. 612년 7월(음력), 마침내 수나라군이 살수에 이르러 강을 반쯤 건너는 순간, 을지문덕은 후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수나라군은 신세웅이 전사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하루 만에 450리 거리를 도주하여 압록수에 닿았다. 30만 5천 명의 별동대 중 요동으로 겨우 2,700명만이 돌아갈 수 있었고, 수많은 군수물자와 공성병기를 모두 잃었다. 수 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총퇴각하여 제2차 여수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1645

[을지문덕을 기리는 사우 건립]

병자호란 이후 국난 극복의 영웅으로 을지문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645년 평양에, 1670년 평안도 안주에 을지문덕을 기리는 사우(祠宇)가 건립되었고, 조선 숙종 때에는 각각 충무사와 청천사로 이름을 받았다.

병자호란 이후, 국난 극복의 상징이자 민족적 자존심 회복을 위해 을지문덕에 대한 평가와 주목이 더욱 커졌다. 1645년 평양에 을지문덕을 기리는 사우가 처음 건립되었고, 1670년에는 평안도 안주에도 사우가 세워졌다. 조선 숙종 때 이 사우들은 각각 '충무사'와 '청천사'라는 사액을 받아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사당이 되었다. 다만, 그 이전에도 을지문덕을 모시는 사당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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