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독립운동가, 교육자, 시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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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독립운동가, 교육자, 시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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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다.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요인들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감행하여 한인애국단 활동의 정점을 찍었다.이 의거는 중국 장제스 주석의 극찬을 받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의거 후 체포되어 일본에서 순국하였으며, 그의 숭고한 희생은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농촌 계몽 운동과 문학 활동에도 힘쓴 교육자이자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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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윤봉길, 충남 예산에서 출생]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시대 명장 윤관의 후손이다.

1911

[저한당으로 이주]

4세 때 출생지인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했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918

[덕산보통학교 입학 및 자퇴]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식 식민지 교육에 불만을 품고 이듬해 3.1운동에 자극받아 학교를 자퇴하고 한학을 공부했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일본인 교장에 불만을 가졌다. 다음 해 3·1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며 학교를 자퇴하고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21

[매곡 성주록의 오치서숙 입학]

유학자 매곡 성주록의 서당 오치서숙에 들어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의 서당 오치서숙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22

[배용순과 결혼]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과 결혼했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과 결혼하였다.

1923

[오치서숙 춘추 시회 장원]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

[아호 '매헌' 사용 시작]

'매헌'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1927

['농민독본' 3권 저술]

농민 계몽 활동의 일환으로 '농민독본' 3권을 저술했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

[시집 '오추' 등 발간 및 부흥원 설립]

시집 <오추>, <옥수>, <임추> 등을 발간하고 부흥원 설립 기념 공연 및 월례강연회를 개최했다.

18세 되던 해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위친계,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했다.

1929

[오치서숙 졸업 및 농촌 계몽 활동 시작]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농촌 계몽 활동,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이후 농촌 계몽 활동, 농촌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30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했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1931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 가입]

상하이에서 채소 장사를 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헌신할 각오를 밝히고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를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

[거사 전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 및 시 작성]

훙커우 공원 의거 이틀 전, 두 아들에게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는 유언을 비롯한 4편의 시를 작성했다.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에서의 거사를 앞두고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의거]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연 및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고위 간부들을 처단 및 중상을 입혔다. 이 의거는 중국 장제스 주석의 극찬을 받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김구와 협의했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원에 입장,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묵념의 틈을 노려 수통 폭탄을 단상에 정확하게 명중시켰다. 이로 인해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이 처단되고,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 절단 등 일본 군 고위 간부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불발된 도시락 폭탄 대신 태극기를 흔들며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치다 체포되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의 4천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내다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라며 극찬했고, 이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 육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

훙커우 의거 직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김구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았으며, 육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훙커우 의거 후 일본 헌병들에게 제압당해 구타당한 뒤 1932년 5월 25일 육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은 김구를 잡기 위해 윤봉길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윤봉길은 고문당하는 동안 김구의 위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일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

사형 집행을 위해 일본 기선 타이요마루에 실려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사형 선고 6개월 후인 1932년 11월 18일 일본 기선 소속 '타이요마루' 여객선에 실려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됐다.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송]

사형 집행을 위해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보내졌다.

사형집행을 위해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보내졌다.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순국]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에서 십자가 목재 형틀에 묶여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죽음 앞에서도 침착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으로 끌려온 윤봉길은 사형직전까지도 두려움 없이 침착하고 입가에는 웃음을 띠는 등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십자가 목재형틀에 양팔이 묶이고 눈은 헝겊으로 가려진 채, 유언이 있냐는 간수의 질문에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고 답한 뒤 오전 7시 27분 미간에 총알이 명중하며 13분 뒤 숨을 거두었다.

1946

1946.03.06 사후 14년

[일본 가나자와에서 유해 발굴]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의 요청으로 박열과 재일동포들이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발굴했다.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km 떨어진 가나자와(金沢)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1946.06.30 사후 14년

[서울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

발굴된 유해가 서울에 도착하여 국민장으로 엄수되었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1963

[고향 예산에 충의사 건립]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충의사가 건립되었다.

1963년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다.

1965

1965.06.29 사후 33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설립]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1972

[충의사 경역 사적 제229호 지정]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세워진 충의사의 생가와 고택 및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63년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고,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87

[매헌기념관(윤봉길의사 기념관) 건립]

윤봉길 의사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을 세웠다.

1987년 윤봉길 의사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현재 양재시민의숲역의 부역명도 그의 호를 딴 '매헌'이다.

2011

2011.03.01 사후 79년

[SBS 스페셜, 윤봉길 의사 체포사진 조작 사실 밝혀]

SBS 스페셜 특집 다큐멘터리를 통해 널리 알려진 훙커우 의거 직후의 윤봉길 의사 체포 사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 방송에서 윤봉길의 사진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상해 총영사관의 외무성 경찰사에서는 "윤봉길은 두들겨 맞고 기절해 군인과 헌병의 힘에 의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 두 장 또한 컴퓨터 그래픽 판독 결과 각각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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