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농민 운동가, 종교 지도자, 교육인,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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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양반 출신으로,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 침략에 맞서 민중을 이끌었습니다. 동학 사상을 기반으로 고부 농민 봉기를 시작하여 동학 농민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사회 개혁을 목표로 했으며, 일본군에 맞선 항일 투쟁을 벌였습니다.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그의 뜻은 민중에게 깊이 새겨졌습니다. 녹두장군이라 불리며, 오늘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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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

[녹두장군 전봉준의 탄생]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서 몰락 양반인 전창혁과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한문을 수학하고 한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전봉준은 1855년 1월 10일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의 몰락 양반 전창혁과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천안, 초명은 명숙, 다른 이름은 영준이며, 호는 해몽입니다. 그의 체구가 작아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억력이 총명하여 5세 때 한문을 수학하고 13세 때는 백구시라는 한시를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서당 훈장, 접주, 지관, 상인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1888

[동학 입교 계기 마련]

혼란스러운 조선 사회와 외세 침략 상황 속에서 나라의 장래를 고민하던 중, 동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인 손화중과 접촉했습니다.

20, 30대 청년기 전봉준은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탐관오리들의 착취로 극심한 혼란에 빠진 조선 사회를 보며 나라의 장래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경 손화중과 접촉하며 동학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890

[동학 입교 및 고부접주 임명]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 '보국안민'의 뜻을 품고 동학에 입교했습니다. 이후 고부 지방의 동학접주가 되어 민중을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1890년 무렵, 전봉준은 자신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황하일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습니다. 체포 후 재판에서 그는 동학이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이며 충효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하려는 것이었다고 진술하며 동학 입교의 경위를 밝혔습니다. 이후 그는 고부 지방의 동학접주가 되어 민중을 조직하고 이끌었습니다.

1893

[아버지 전창혁의 죽음과 개혁 의지 고취]

아버지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 모진 곤장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봉준의 사회 개혁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습니다.

1893년,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저항하다가 조병갑 모친상에 부조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진 곤장을 맞고 결국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과 사회 개혁에 대한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894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과 재봉기 결의]

고부 봉기 후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농민군을 '동비'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감행하자, 전봉준은 다시 봉기를 결의했습니다.

고부 농민 봉기 이후 조선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후임 군수를 파견했지만,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는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무고한 농민들까지 처벌했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농민군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무자비한 탄압을 감행하는 이용태에 분노하여 다시 봉기를 결의하고 국가 정치와 사회 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할 뜻을 굳혔습니다.

[고부 농민 봉기 주도]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수백 명의 동학교도를 이끌고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를 공격하여 제1차 봉기를 주도했습니다.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단하며 백성들에게 세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1894년 3월 21일, 전봉준은 거병을 선언하고 선두로 나서 수백 명의 동학교도를 이끌고 만석보를 파괴했습니다. 이들은 고부 관아를 공격하여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냈습니다. 전봉준은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세금을 나누어주었으며, 부패한 아전들을 처단했습니다. 또한, 감정이 격해져 죄 없는 관리들까지 처벌하려던 농민군을 만류하며 진정시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봉기는 조정의 회유책으로 잠시 해산되었습니다.

[백산 봉기 및 4대 강령 발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한 농민군은 백산에 집결하여 8천여 병력으로 대오를 편성하고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등의 4대 강령을 발표하며 백성의 궐기를 호소했습니다.

1894년 음력 3월 초(양력 4월경),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손화중 등을 장령으로 삼은 농민군은 고부의 백산에 집결하여 8천여 병력으로 대오를 편성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는 4대 강령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백성의 궐기를 호소했습니다. 이 봉기에는 정읍, 김제, 부안 등지의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달했습니다.

[전주성 함락 목표로 진격]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금구 원평에 진을 치고 관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봉준은 척왜·척양과 부패한 지배 계급 타파 등 4대 강령을 내세웠습니다.

1894년 음력 4월 초(양력 5월경),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금구 원평에 진을 쳤습니다. 전봉준은 동학군 남접의 지도자이자 동도대장이 되어 척왜(斥倭)·척양(斥洋)과 부패한 지배 계급의 타파 등 4대 강령을 내세웠습니다. 농민군은 대부분 일반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며, 탐관오리 제거, 조세 수탈 시정, 균전사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흥선대원군 복위 요구 밀서 발송]

전주성 점령 직후, 전봉준은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밀서를 보내 흥선대원군을 권좌에 복위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주성 점령 직후인 1894년 5월 4일, 전봉준은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밀서를 보내 '태공(대원군)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토록 함은 그 이치가 심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불궤라고 합니까?'라며 흥선대원군을 다시 권좌에 복위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주성 점령]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 홍계훈을 황토현에서 대파하고 부안, 정읍, 고창, 무장 등을 장악한 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1일) 전주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1894년 음력 4월 초(양력 5월경) 금구 원평에 진을 친 농민군은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 홍계훈을 황토현에서 크게 물리쳤습니다. 이후 부안, 정읍, 고창, 무장 등을 차례로 장악한 농민군은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1일) 마침내 전주성 점령에 성공했습니다. 이 전주성 점령은 동학 농민 혁명의 주요한 성과 중 하나였습니다.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 입국]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오고 톈진조약을 빌미로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하며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전주화약 직전,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오고 동시에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음력 5월 6일(양력 6월 9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외세의 압박으로 더욱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및 청일전쟁 발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으며, 이어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정세는 더욱 험악해졌습니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습니다. 이어서 7월 25일(음력 6월 23일)에는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조선에서의 침략 행위를 더욱 노골화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동학 농민 혁명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에 대항하는 제2차 농민 봉기]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침략 행위에 분격한 농민군은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다시 봉기했습니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넘어 일본에 대항하는 반외세 항쟁이 주요 목표가 되었습니다.

제1차 봉기 후 정부가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고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여 왕궁을 점령하는 등 침략 행위를 가속화하자, 전봉준은 이에 격분했습니다. 1894년 음력 9월(양력 10월경), 그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다시 봉기했습니다. 이 2차 봉기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했던 1차 봉기와 달리 일본에 맞서 항쟁하고자 하는 반외세 투쟁이 주요 목표였습니다. 동학 교주 최시형도 초기 반감을 접고 전봉준의 무장 투쟁 노선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공주 전투 패배 및 은신]

2차 봉기 이후 충청남도 공주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우수한 무기와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퇴하고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2차 봉기 후 농민군은 1894년 음력 9월(양력 10월경) 충청남도 공주에서 관군과 싸웠습니다. 충청관찰사 박제순은 전봉준의 군사를 방어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토벌대장 이규태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규태의 관군이 가세하면서 농민군은 공주 싸움에서 패퇴하여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농민군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태인 싸움 패배 후 은신]

태인 싸움에서 패배한 후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입암산성으로 들어가 은신했습니다.

1894년 11월 27일, 태인 싸움에서 패배한 전봉준은 몇몇 수행원들과 함께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군 모리오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백양사로 은신처 이동]

추격 정보를 듣고 입암산성에서 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내장산 백양사로 은신처를 옮겼습니다.

1894년 11월 30일, 전봉준은 남하하는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 정보를 듣고 입암산성에서 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내장산의 백양사로 이동하여 은신했습니다. 백양사에 머물며 김개남의 은신 소식을 접했습니다.

[금구 전투에서 최종 패배]

남접 접주로서 북접과 연합하여 항일 구국 항일전을 전개했으나, 음력 11월(양력 12월경) 금구 전투를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전봉준은 음력 9월 삼례에서 남접 접주가 되어 1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 북접 접주 손병희의 10만 명 병력과 연합하여 항일 구국 항일전을 전개했습니다. 한때 중부·남부의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이천, 목천, 공주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하였고, 음력 11월(양력 12월경)의 금구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습니다.

[순창 피노리에서 김경천 만남]

김개남을 만나기 위해 태인으로 가던 중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부하 김경천을 찾았습니다.

1894년 12월 1일 저녁, 전봉준은 백양사에 은신하던 중 김개남이 태인에 은신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행원들과 함께 태인으로 가던 중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부하 김경천을 찾아갔습니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하여 순창의 한 민가에 은신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

순창군 피노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과 한신현 등 현상금을 노린 이들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되었습니다.

1894년 12월 28일 새벽, 전봉준은 옛 부하 김경천이 한신현을 사주하여 전주부 관가에 자신을 고변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하자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 했으나, 피노리 주민이 던진 몽둥이에 다리를 얻어맞고 결국 붙잡혔습니다.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한신현과 김경천 등의 배신으로 피로리에서 관군에 체포되었고, 김영철, 정창욱 등의 제보와 마을 사람 9명의 제보도 있었습니다.

1895

[한성부 의금부 감옥에 수감]

체포된 후 순창, 담양, 나주, 전주를 거쳐 1895년 1월 13일 한성부에 도착하여 의금부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1894년 12월 28일 피노리에서 체포된 전봉준은 순창군 관아에 갇혔다가 담양군 관아에서 조선 관군에게 인계되었습니다. 이후 나주부와 전주부를 거쳐 1895년 1월 13일(음력 1894년 12월 18일) 마침내 한성부에 도착하여 의금부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한성부로 압송]

의금부 감옥에 갇힌 전봉준은 동지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과 함께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었습니다.

1895년 음력 3월(양력 4월경), 전봉준은 그의 동지들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과 함께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들은 함께 의금부의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교수형으로 순국]

의금부의 옥에 갇혀 무수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원군과의 내통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5차에 걸친 일본 영사관 심문에서도 굴하지 않다가, 1895년 4월 24일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했습니다.

의금부의 옥에 갇힌 전봉준 등에게는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특히 흥선대원군과의 내통 사실 여부가 집중적으로 추궁되었으나, 전봉준은 이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습니다. 고문이 계속되자 일본 영사관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5차례에 걸쳐 일본 헌병의 심문을 받았지만 목적이나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했습니다. 당시 상처로 인해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어 아전의 부축을 받아 사형장으로 갔으며,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향년 41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라는 유시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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