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화가, 무관, 풍속화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5:06
신윤복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입니다. 양반의 위선과 여성들의 자유로운 삶을 해학적으로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섬세하고 화려한 채색으로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 4대 풍속화가로 손꼽히며,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적 감성을 대담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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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8
[화가 신윤복 출생]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 신윤복이 태어났다. 본명은 신가권으로, 후에 윤복으로 개명했으며, 그의 본명은 대표작 '미인도'에 찍힌 도장을 통해 밝혀졌다.
영조 34년인 1758년에 화원 신한평과 홍천 피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이름은 가권이었으며, 뒤에 윤복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본명이 가권으로 밝혀진 것은 그가 그린 유명한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서 '신가권'이라는 도서가 찍힌 데서 기인한다.
1780
[도화서 화원으로서 관직에 오름]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을 받아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으며, 첨정과 첨절제사라는 무관 관직을 지냈다. 인물화, 풍경화 외에도 양반의 위선과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연애와 애환을 묘사한 해학적인 풍속화를 많이 남겼다.
아버지 신한평의 뒤를 이어 도화서의 관원이 되었고, 관직은 첨정과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그의 작품은 인물화, 풍경화, 풍속화 등 다양했으며, 특히 양반의 위선과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로운 연애와 삶의 애환을 해학적으로 그려내 당대 사회상을 반영했다. 단원 김홍도, 김득신,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 4대 풍속화가로 손꼽힌다.
1800
[정조 사망 후 작품 활동 쇠퇴]
개혁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자유분방했던 사회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신윤복의 작품 활동도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800년 정조 사후, 개혁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신윤복의 예술 활동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의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풍속화가 설 자리를 잃게 되면서 작품 활동은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813
[마지막 작품 기록]
그가 남긴 작품 중 마지막으로 제작된 것이 1813년의 작품이며, 이 시기까지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신윤복의 작품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지막 작품은 1813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 기록은 그가 해당 연도까지 활발하게 그림을 그렸음을 시사하며, 그의 생애 후반부 예술 활동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1814
[화가 신윤복 사망 추정]
1813년 작품을 마지막으로 남긴 후, 이 무렵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사망일과 장소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1813년 작품 이후, 1814년경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정확한 사망일과 사망지는 현재까지 미상으로 남아 있으며, 향년 56세경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