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신학자, 목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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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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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목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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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스위스의 대표적인 개혁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신학인 신정통주의를 주창했다. 《로마서 주석》과 미완의 대작 《교회교의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나치즘에 대항하는 《바르멘 선언》을 주도하는 등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현실 참여적 지식인의 모범을 보였다. 그의 사상은 20세기 개신교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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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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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칼 바르트 탄생]

스위스 바젤에서 개혁교회 목사이자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받는 칼 바르트가 태어났다.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 신학자의 장남으로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났다.

1904

[신학 교육 시작]

베른, 베를린,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당시 유럽 신학계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베른에서 보낸 그는 1904년부터 베른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당시 유럽 신학계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1911

[자펜빌 목회 시작]

스위스 자펜빌 교회의 개혁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억압과 착취를 받는 현실을 목격하며 현실참여적 성직자가 되었다.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의 교회에서 개혁교회 목사로 목회하며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를 비판하여 자본가들로부터 '빨갱이 목사'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13

[종교 사회주의 운동 참여]

스위스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며 당시 유럽 교회가 관심을 갖고 있던 종교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참여했다.

자펜빌에서 노동자들의 삶을 목격한 후 1913년 스위스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유럽 교회가 관심을 갖던 종교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914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시작]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전쟁을 지지한 '어둠의 날'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깊은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1914년 8월,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전쟁을 지지하자,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를 설교하지 않고 성경을 윤리책으로 오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깨달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하며 자유주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1919

[《로마서 주석》(초판) 집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환멸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 첫 번째 로마서 주석을 집필했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반영하여 신약성경의 재해석을 시도한 첫 번째 로마서 주석(로마서 I)을 1919년에 집필했다.

1921

[《로마서 주석》(2판) 출판 및 명성]

자유주의 신학과의 공개적인 단절을 선언한 두 번째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21년 두 번째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며 자유주의 신학과의 공개적 단절을 선언했고, 이는 유럽 신학계에 큰 충격을 주어 국제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리게 했다.

1934

[바르멘 선언 발표]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나치즘에 반대하여 고백교회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반 나치 신학선언인 《바르멘 선언》을 발표했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숭배하는 나치즘을 우상숭배로 비판하고 유대인 등 다른 민족을 박해하는 것을 악마적으로 보았다.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1934년 독일 바르멘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다는 내용의 《바르멘 선언》을 발표했다.

[나치 반대 운동으로 추방]

나치 독일의 탄압으로 독일에서 영구 추방되어 스위스 바젤 대학교로 이직했다.

반 나치 운동으로 인해 나치 독일의 탄압을 받고 독일 밖으로 영구 추방되었으며, 이후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1948

[전후 신학 활동 및 에큐메니칼 참여]

전쟁 후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공산주의 국가 헝가리를 방문하고 세계 교회 협의회(WCC) 성립에 참여했다.

히틀러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난 후 독일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1948년에는 공산주의 국가 헝가리를 방문하여 헝가리 개혁교회와 대화했으며, 같은 해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결성된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성립 과정에 참여하는 등 전후 활동을 이어갔다.

1961

[《개신교 신학입문》 저술]

인생 말년인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자신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개신교 신학입문》을 저술했다.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자신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개신교 신학입문》을 저술하여 신학적 사상을 정리했다.

1962

[타임지 표지 장식]

학문적 범위를 넘어 대중 문화로 영향력을 확장하여, 1962년 4월 20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 표지에 등장했다.

20세기 대표적인 신학자로 꼽히며, 그의 영향력이 학문계를 넘어 대중 문화로까지 확장되어 1962년 4월 20일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는 이례적인 인물이 되었다.

1968

[칼 바르트 별세]

미완성 대작 《교회교의학》을 남기고

1968년 12월 10일, 평생의 대작인 《교회교의학》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사망했다. 별세 전날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에 차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는 말을 남기며 세상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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