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국가, 이슬람 국가, 서아시아 국가, 고대 문명 발상지, 산유국, 다민족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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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은 서아시아에 위치한 이슬람 공화국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 중 하나로, 엘람, 메디아, 아케메네스 제국 등을 거치며 찬란한 고대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7세기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급격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고, 사파비 왕조 시기 시아파 맹주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근현대에는 외세의 개입과 내부 혁명을 겪으며 팔라비 왕조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현재 지역 강국이자 막대한 석유 및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나, 핵 개발과 인권 문제 등으로 국제사회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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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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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k

[엘람 왕국 건설 시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이란 지역에서 엘람 왕국이 건설되기 시작하며 고대 문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들의 발상지 중 하나로, 기원전 4000년 경 엘람의 왕국들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이 시기 수사 지방을 중심으로 도시 문명이 발달했다. 거대한 도시들이 들어섰으며, 엘람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근방에서 번영을 누렸다.

BC 2k

[엘람에 쐐기문자 도입]

엘람 문명은 인근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받아 쐐기문자가 도입되며 사회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엘람에서는 인근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3000년 경에 쓰기와 쐐기문자 등이 도입되었고, 이를 통하여 활발한 사회 발전과 경제적 진흥이 일어날 수 있었다.

BC 1k

[고대 이란인 및 아시리아인의 정착]

유라시아 스텝을 거쳐 고대 이란인들이 현재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고, 아시리아인들도 이란 서부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2000년경 유라시아 스텝을 거쳐 고대 이란인들이 현재의 이란 지방에 정착하여 원주민과 협력 및 전투를 통해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이들은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으로 갈래가 나뉘었다. 비슷한 시기 아시리아인들도 이란 서부 지방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BC 10C

[아시리아 제국의 이란 지방 통일]

이란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약 300여 년간 통일되었다.

기원전 1000년에서 700년 사이에 이란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 제국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이 시기는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BC 8C

[메디아 제국 건설]

데이오세스 왕 하에 메디아인들이 통합되었고 메디아 제국이 세워져, 기원전 612년경에는 이란 전역과 아나톨리아 동부를 통치하는 거대 제국을 이루었다.

기원전 728년 경에는 메디아인들이 데이오세스 왕 하에 통합되었으며, 메디아 제국을 세워 기원전 612년 경에는 현재 이란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까지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기도 했다.

BC 6C

[키루스 대제의 아케메네스 제국 건설]

캄비세스 1세의 아들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워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며 리디아, 바빌론, 이집트 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50년,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었던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워 인근 도시 국가들을 무릎 꿇리며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는 리디아, 바빌론, 이집트를 정복하며 동쪽으로 발칸과 동유럽, 서쪽으로 인더스 강 유역까지 뻗어나갔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정복]

페르시아 군대가 오피스에서 바빌로니아 군대를 꺾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 400여 년간 이어진 메소포타미아 주도권을 장악했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군대가 오피스에서 바빌로니아 군대를 꺾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하였다. 키루스 대제가 바빌론에 입성하여 스스로를 메소포타미아의 지도자로 천명하고 문화의 계승 및 융합을 선언하며 페르시아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BC 5C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발발]

아케메네스 제국이 서부 국경에서 그리스인들과 분쟁을 겪으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발발, 결국 발칸과 동유럽 지배권을 포기하며 후퇴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서부 국경에서 그리스인들과 점차 분쟁을 겪게 되면서 기원전 500년 경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케메네스 제국은 발칸 지역과 동유럽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서쪽으로 후퇴했다.

[아케메네스 왕조 인구 절정]

기원전 480년 경 아케메네스 왕조의 인구는 약 5천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44%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기록을 세웠다.

기원전 480년 경 아케메네스 왕조의 인구는 약 5천만 명 정도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전세계 인구의 44%를 자신의 신민으로 거느리는 압도적인 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기록은 그 이후에도 깨지지 않았다.

BC 4C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아케메네스 제국 멸망]

기원전 4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며 멸망했고, 헬레니즘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4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퇴하면서 아케메네스 제국은 멸망하였고, 그 자리에 여러 헬레니즘 국가들이 세워지면서 쪼개지게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아케메네스 제국을 침공하였고,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3세가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며 제국은 멸망한다.

BC 2C

[파르티아 제국 건국]

페르시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파르티아 제국을 세웠다.

기원전 3세기에는 페르시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파르티아 제국을 세웠으며, 약 500여 년 동안 존속하며 서방의 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마찰을 겪었다.

224

[사산 제국 건국]

224년 경 사산 제국이 파르티아 제국을 승계하여 새롭게 들어섰고, 이후 약 400여 년 동안 세계적인 제국으로 군림하며 로마-비잔티움 제국과 경쟁했다.

파르티아 제국은 봉건적 군주제를 통하여 약 500여 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224년 경에는 사산 제국이 파르티아 제국을 승계하여 새롭게 들어섰다. 사산 제국은 이후 로마 제국과 그 뒤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서방 세계와 신경전을 벌였으며, 이 두 국가는 약 40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두 국가들로 확고히 자리하게 된다.

651

[이슬람 세력의 사산 제국 정복 및 이슬람화]

7세기 아랍인 무슬림들이 사산 제국을 정복하며 페르시아 지방의 급격한 이슬람화가 진행, 이슬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번영하며 이슬람 황금기를 이끌었다.

로마-페르시아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진 사산 제국은 7세기경 새롭게 쳐들어온 아랍인 무슬림들의 침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결국 라쉬둔 칼리파조에, 이후 우마이야 칼리파조, 아바스 칼리파조에 복속당하기 시작한다. 이후 점진적인 이슬람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조로아스터교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사회가 점차 이슬람 중심 사회로 변모하였다. 페르시아 지역은 이슬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번영하며 이슬람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750

[아바스 칼리파조의 우마이야 칼리파조 전복]

아바스 칼리파조가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몰아냈고, 페르시아인 엘리트들이 정치 요직을 장악하며 아랍 귀족의 권력이 약화되었다.

750년, 아바스 칼리파조가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몰아내었다. 이 시기 페르시아인들은 이미 아랍의 이슬람 문화에 상당수 동화가 진행된 상태였고,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페르시아인들은 아랍과 페르시아의 엘리트 지배계층으로 떠올랐다. 점차 페르시아인들과 튀르크인들이 아랍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치 요직들과 부를 빼앗아갔다.

900

[페르시아 중심의 이슬람 황금기]

페르시아 지방은 이슬람 황금기의 중심지로, 문학, 철학, 수학, 약학, 천문학, 예술 등 수많은 학문들이 번성하며 세계 과학의 개척지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에서는 찬란한 문학, 철학, 수학, 약학, 천문학, 예술 등 수많은 학문들의 꽃이 피어났으며, ‘이슬람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 이슬람 문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슬람의 황금기는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10세기와 11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시기 페르시아는 세계 과학의 중심지이자 개척지이기도 했다.

[튀르크계 민족의 이란고원 이주]

10세기 중앙아시아로부터 수많은 튀르크계 민족들이 이란고원으로 이주해왔으며, 이들은 맘루크 전사로 활용되며 군사력을 독점, 이후 튀르크계 제국들이 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10세기 중앙아시아로부터 수많은 튀르크계 민족들이 이란고원 지방으로 이주해왔다. 아바스 칼리파조는 이들을 노예전사 계급인 맘루크들로 활용하였고, 이로 인하여 군대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점차 군사력을 독점하게 된 맘루크들의 힘이 강력해졌고, 이후 튀르크계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하였다.

999

[가즈나 제국 등장]

맘루크계 국왕이 다스리는 가즈나 제국이 들어섰으며, 이후 셀주크 제국과 화레즘 제국 등 튀르크계 제국들이 연이어 발흥했다.

999년 경에는 맘루크계 국왕이 다스리는 가즈나 제국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셀주크 제국과 화레즘 제국과 같이 튀르크계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하였다.

1219

[몽골 제국의 침공]

화레즘 제국 시기 페르시아는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에게 침공당해 전국토가 황폐화되었고, 전 국민의 4분의 3에 달하는 1천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규모 인명 피해를 겪었다.

1219년부터 1221년까지, 화레즘 제국의 시기에 페르시아는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국가가 멸망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에 대략 1,000만 명에서 1,500만 명에 달하는, 전 국민의 4분의 3이 사망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으며, 이로 인하여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란이 20세기 중반까지도 인구를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1256

[일 칸국 건국]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 칸이 페르시아 지방에서 일 칸국을 건국하였고, 일 칸국은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였다.

1256년, 칭기즈 칸의 손자였던 훌라구 칸이 페르시아 지방에서 일 칸국을 건국하였다. 일 칸국과 티무르 제국 모두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후기로 갈수록 거의 페르시아인과 자신을 동일시할 정도로 완전히 흡수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1370

[티무르 제국 건국 및 이스파한 대학살]

정복자 티무르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티무르 제국을 세웠으며, 이스파한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시민을 대학살하는 잔혹한 행위를 자행했다.

1370년, 또다른 정복자였던 티무르가 훌라구 칸의 전례를 따라 또다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티무르 제국을 세워 약 156년 간을 지속하였다. 1370년에는 티무르가 이스파한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고, 이때 약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대학살하였다.

1501

[사파비 왕조 건국 및 시아파 국교화]

아라다빌의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왕조를 세우고 수도를 타브리즈에 두었으며, 당시 수니파가 주도하던 페르시아 사회에 시아파를 강제적으로 국교로 삼아 이란을 시아파 맹주국으로 만들었다.

1500년 초에는 아라다빌의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왕조를 세웠으며, 수도는 타브리즈에 두었다. 이스마일 1세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하여 점차 이란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당시 페르시아 사회는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이스마일 1세는 이를 뒤집고 시아파를 내세우며 강제적으로 교파를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변혁이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는 전국민적으로 시아파 신도들이 더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 영향으로 이란은 현대까지도 주요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시아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1587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

아바스 1세 재위기에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을 능가하는 유라시아 서부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며 과학, 예술을 선도하는 전성기를 맞았다.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의 재위기인 1500년대 후반부터 16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때 국력은 오스만 제국을 넘어섰으며 유라시아 서부 지역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과학, 예술 등을 선도하는 국가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 코카서스 인종이 점차 대규모로 이란 사회에 본격적으로 동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아예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향후 이란의 역사에 지대한 힘을 끼치고는 했다.

1722

[사파비 왕조 멸망]

내전과 외세와의 전쟁으로 약해진 사파비 왕조는 파슈툰 반란군이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하며 멸망했다.

사파비 왕조는 1700년대 초에는 이전의 영광을 거의 되찾지 못하였다. 이 시기 사파비 왕조 내에서는 내전이 끊임없이 발발했으며,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등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가 내우외환의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 사파비 왕조는 1722년에 파슈툰 반란군들이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샤의 군대를 꺾으면서 멸망하고야 만다.

1729

[나디르 샤의 아프샤르 왕조 건국 및 재통일]

코라산의 장군 나디르 샤가 파슈툰 반란 세력을 몰아내고 이란을 재통일했으며, 이후 이란은 서부와 중부 아시아의 최강 제국 중 하나로 부상했다.

1729년, 코라산의 장군이었던 나디르 샤가 파슈툰 반란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란이 혼란스러운 동안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빼앗아갔던 코카서스 지방들을 일부 수복하는 데에도 성공하면서 이란을 재통일하고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하였다. 나디르 샤의 재위기에 이란은 사산 제국 이래 최대 영토를 정복하면서 코카서스 지방 전역에 이란의 헤게모니를 이룩하였으며, 서부와 중부 아시아를 통틀어 당대 최강의 제국들 중 하나라는 명성을 누리기도 했다.

1738

[나디르 샤의 인도 침공]

나디르 샤가 인도를 침공하여 델리를 약탈했으나, 이후 코카서스 원정 후 암살당하며 이란은 내전에 휩싸였다.

나디르 샤는 1730년대 후반에는 인도를 침공하였으며, 델리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디르 샤의 이러한 군사적 업적도 반란을 일으킨 레지그인들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한 코카서스 북부 원정 이후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하였고, 결국 나다르 샤가 암살당하면서 이란 전역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한 내전이 펼쳐지며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1750

[잔드 왕조 건국]

카림 칸이 내전을 진압하고 이란을 통일하며 잔드 왕조를 세워 평화를 되찾았다.

1750년에 카림 칸이 내전을 진압하고 이란을 다시 통일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이후 카림 칸은 잔드 왕조를 세우면서 다시 이란에 평화를 되찾아왔다.

1779

[잔드 왕조 내전 발발 및 카자르 왕조 등장]

카림 칸 사망 후 내전이 터졌고, 1794년 아가 모하마드 칸이 카자르 왕조를 세우며 혼란이 일단락되었다.

1779년에 카림 칸이 사망하자 또다시 내전이 터졌고, 1794년에 아가 모하마드 칸이 등장하여 카자르 왕조를 세우면서 혼란이 일단락된다.

1795

[카자르 왕조의 코카서스 영향력 강화]

카자르 왕조가 조지아 반란을 진압하고 티빌리시를 점령하며 코카서스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1795년에 조지아인들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이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카자르 왕조는 대군을 파병하여 티빌리시를 점령하고 러시아 세력을 코카서스 전역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코카서스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였다.

1800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영토 및 이권 상실]

1800년대 초중반 러시아와의 두 차례 전쟁에서 패배하며 트란스코카서스, 다제스탄 등 수백 년간 이란 고유 영토였던 코카서스 지방 상당수를 잃고 러시아에 이권마저 넘겨주었다.

1800년대 초중반에 발발한 2차례의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이란은 코카서스 지방의 영토 상당수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 때 이란은 몇 백년 동안 이란 고유의 영토라고 여겨졌던 트란스코카서스와 다제스탄 지방을 잃어버렸으며, 러시아 제국에게 여러 이권들마저 넘겨주어야만 하였다.

1870

[대기근으로 150만 명 사망]

1870년대 초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기근이 발생하여 인구의 20~25%인 1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1870년대 초에는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기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인구의 20%에서 25%가량에 이르는 1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기도 했다.

1905

[입헌 혁명 발발]

서구 열강의 이권 요구에 대한 반발로 입헌 혁명이 발발했으며, 1906년 첫 이란 헌법이 제정되고 국회가 열렸다.

1872년과 1905년 사이에, 카자르 왕조의 국왕들은 점차 서구 열강의 협박에 못이겨 그들에게 이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05년에는 입헌 혁명이 일어났다. 1906년에는 첫 이란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처음으로 국회도 열렸다.

1909

[모함마드 알리 샤 퇴위]

개혁 반대와 주도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테헤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 당시 국왕 모함마드 알리 샤가 강제로 퇴위했다.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과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들 간의 반발은 갈수록 극심해졌으며, 이로 인하여 결국 1909년에는 테헤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며 당시 국왕이었던 모함마드 알리 샤가 강제로 퇴위하게 된다.

1911

[러시아의 이란 북부 점거]

러시아가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이란 북부를 점거하여 수 년간 점령했으며, 이는 외세와 카자르 왕조에 대한 민중의 공분을 일으켰다.

직후 러시아는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1911년에 이란 북부를 점거하였으며, 수 년동안 강제로 점령하며 돌려주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외세와 무능한 카자르 왕조에 대한 공분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대대적인 민중 시위가 일어났다.

1914

[제1차 세계대전 중 이란의 피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했으나, 오스만, 러시아, 대영제국에 의해 서부가 점령되어 전투에 휘말렸고 최소 2백만 명 사망, 도시 파괴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란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모두 이란 서부를 강제적으로 점령하면서 전투를 벌였으며, 1921년이 돼서야 겨우 군대를 물렸다. 이 시기에 최소 2백만 명에 달하는 이란인들이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려 사망하였으며, 공장들과 도시들이 파괴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21

[영국 배후 쿠데타로 카자르 왕조 멸망 및 팔라비 왕조 개창]

불안정한 정세 속 영국이 배후에서 주도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카자르 왕조가 멸망하고, 레자 샤 팔라비가 팔라비 왕조를 개창했다.

카자르 왕조의 이러한 빈약한 행정력으로 인하여 이란은 세계 대전 동안 주권조차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21년에 영국이 배후에서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레자 샤가 팔라비 왕조를 개창하면서 결국 카자르 왕조도 멸망하고야 만다. 레자 샤는 이란의 총리에 직위한 이후, 1925년에 국왕직에 올랐다.

1935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변경]

레자 샤가 국제사회에 자국을 '페르시아' 대신 '이란'으로 불러줄 것을 요청하여 점차 '이란'이 국호로 굳어졌다.

1900년대까지만 해도 서방 세계의 영향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이란 지방을 ‘페르시아’라고 칭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1935년에 레자 샤는 국제사회에게 자국을 ‘페르시아’라고 칭하지 말고 현지에서 더 많이 쓰이는 이름인 ‘이란’으로 불러주기를 요청하였고, 이후 점차 국제적으로도 ‘페르시아’라는 단어보다 ‘이란’을 훨씬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란이 완전히 국호로 굳어지게 된다.

1941

[영국과 소련의 이란 기습 침공]

레자 샤가 독일인 추방을 거부하자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기습 침공했고, 레자 샤는 항복 후 퇴위,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게 왕위를 승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영국은 이란 정부에 이란 내 독일인 추방을 요구했다. 레자 샤가 주권 간섭으로 보고 거부하자 1941년 8월 25일 영국과 소련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국력이 부족했던 레자 샤는 즉시 항복했으며, 연합국은 소련 공급선 유지, 페르시아 만 유전 확보, 독일군 차단 등의 이점을 얻었다. 레자 샤는 침공 직후인 1941년 9월 16일 퇴위하고 당시 21세 왕세자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게 왕위를 승계했다.

1943

[테헤란 회담 개최]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등 연합국 3개국 정상들이 테헤란 회담을 열어 전후 이란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 국경을 확정지었다.

1943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국의 3개국 정상들이 모여 테헤란 회담을 열기도 하였으며, 이 회담에서 전후 이란의 독립을 확고히하고 이란 국경을 확정짓기도 하였다.

1946

[소련군 이란 영토에서 퇴각]

전쟁이 끝났음에도 이란을 떠나기를 거부하며 2개의 위성국을 세웠던 소련군이, 이란 북서부 유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946년 5월 이란 영토에서 모두 퇴각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즈음에도 소련 군대는 이란을 떠나기를 거부하였고, 이란 북서부 지역에 2개의 위성국을 세웠으니 이 것이 바로 아제르바이잔 인민공화국과 마하바드 공화국이다. 이로 인하여 이란과 소련 간의 갈등이 첨예해졌으며, 소련에게 유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946년 5월에야 소련군이 모두 이란 영토에서 퇴각하였다. 참고로 두 위성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으며, 유전 할양은 후에 취소되었다.

1951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 취임 및 석유 국유화]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총리에 취임하여 석유 기업과 유전들을 국유화하며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1951년에는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이란의 총리에 취임하였으며, 이란의 석유 기업들과 유전들을 국유화한 이후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대중세를 탔다.

1953

[이란 쿠데타로 모사데그 총리 실각]

모사데그 총리는 영국과 미국이 공모한 쿠데타로 실각했고, 이는 미국이 냉전 시기 해외 정부 전복에 참여한 첫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모사데그 총리는 영국과 미국이 뒤에서 공모한 1953년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참고로 이 사건은 미국이 냉전 시기 동안 해외 정부를 전복하는 데에 참여한 첫 사건이기도 하였다.

1962

[대한민국과 수교]

대한민국과 이란이 수교를 맺어 외교 관계를 시작했다.

1962년 10월 23일에 대한민국과 수교하였다.

1963

[팔라비 국왕의 백색 혁명 실시]

팔라비 국왕이 이란의 서구화와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백색 혁명'을 실시했으나, 비밀경찰을 동원한 탄압으로 독재를 심화시켰다.

팔라비 국왕은 이란의 서구화와 현대화를 내세웠으며, 이란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제거하고 세속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내용의 백색혁명을 창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SAVAK이라는 이름의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임의체포, 고문 등을 자행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는 등 막강한 독재 정치를 펼치기도 했다.

1964

[루홀라 호메이니 이란에서 추방]

백색 혁명에 반대 의견을 개진하며 정부를 부정했던 급진 이슬람 율법학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란에서 추방당했다.

급진적인 이슬람 율법학자였던 루홀라 호메이니는 팔레비 국왕의 백색혁명에 반대 의견을 활발히 개진하면서 국왕의 정치적인 반대파로 급부상하였고, 이후 정부를 아예 부정하기까지 하면서 1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64년에 출소한 이후에도 호메이니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하여 결국 이란에서 추방되고야 만다.

197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

이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3년에 수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란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던 적이 있었다.

[유가 상승과 인플레이션]

석유가가 정점을 찍으면서 이란 경제에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으나,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고 부정부패가 심화되며 사회 불만이 고조되었다.

1973년에 석유가가 정점을 찍자, 이란 경제에는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다. 1974년에는 이란 경제는 두 자리수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면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고, 현대화 정책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부정부패가 벌어지면서 정부는 갈수록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1979

[이슬람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 멸망 및 호메이니 귀환]

팔라비 왕조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실망한 국민들이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슬람 혁명을 일으켰고, 레자 팔라비 국왕이 망명하며 팔라비 왕조가 멸망, 호메이니가 귀환했다.

팔라비 왕조의 부정부패와 서구와의 결탁, 탄압 등에 실망한 국민들이 1979년에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슬람 혁명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현재의 이슬람 공화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79년에는 팔라비 왕조의 반대세력들이 모여 이슬람 혁명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1979년 2월에는 레자 팔라비 국왕이 미국으로 망명하고 루홀라 호메이니가 망명 생활에서 벗어나 테헤란으로 귀환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마침내 이란 최후의 왕조인 팔라비 왕조마저 무너지게 된다.

['이슬람 공화국' 체제 전환]

국민투표를 통해 이란은 일반 국가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체제를 전환했다.

이후 1979년 4월에 국민투표를 거쳐서 이란은 일반국가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체제를 전환하였으며, 1979년 12월에는 또 국민투표를 거쳐 신정헌법 제정에도 박차를 가했다.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발생]

팔라비 국왕 송환 거부에 반발한 무슬림 학생들이 주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 52명의 외교관과 시민들을 인질로 잡으며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국이 레자 팔라비 국왕이 송환된 직후 처형당할 것이 뻔했기에 국왕의 이란 송환을 거부한 직후인 1979년 11월 4일에 무슬림 학생들 일부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였으며, 52명의 외교관들과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미국에 협박문을 보냈다.

1980

[팔라비 국왕 사망]

팔라비 국왕이 미국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7월 27일에 암으로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팔라비 국왕은 이후 미국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7월 27일에 암으로 이집트에서 그대로 사망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이라크 군대가 이란 서부 지역을 침공하며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고, 1988년까지 지속된 전쟁으로 이란은 약 2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1980년 9월 22일에는 이라크 군대가 이란 서부 지역을 침공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당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점하였으나, 1982년 중반에 이르자 전세가 역전되어 이란군에 의하여 이라크군이 다시 이라크로 쫒겨 들어가게 된다. 1982년 7월에는 이라크가 수세로 들어갔고, 이란군이 오히려 공세 작전을 펴면서 바스라 등과 같은 이라크의 대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은 이라크가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이라크의 패배로 끝날 때인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란의 전쟁 사상자는 약 23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졌다.

1989

[라프산자니 총리 취임]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 후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총리가 취임, 친자본주의 정책과 경제 복구에 초점을 맞췄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된 후인 1989년에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총리가 취임하였으며, 친자본주의 정책을 피고 경제 복구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정책들을 펴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슬람 정책에 위배되거나 급진 이슬람 정책을 완화하는 방향으로는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직 승계]

호메이니 타계 이후 알리 하메네이가 이란의 종교적 최고지도자인 라흐바르 자리에 올랐으며, 현재까지 이란을 통치하고 있다.

현재 이란의 라흐바르는 1989년 이래 호메이니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알리 하메네이이다. 그는 환경, 경제,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여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선거 개입 권한도 가지고 있다.

1993

[인터넷 개통]

이란에 인터넷이 개통되었으며, 2017년 기준으로 인구의 69.1%가 인터넷 사용자로 세계 17위를 기록했다.

이란은 1993년에 인터넷이 개통되었으며, 2017년 기준으로 이란 인구의 69.1%가 인터넷 사용자라고 한다. 이란은 인터넷 사용자 수로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17위에 속한다.

1997

[모하마드 하타미 총리 취임]

라프산자니 총리의 뒤를 이어 중도 개혁주의자 모하마드 하타미가 총리로 취임했으나, 이란을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1997년에 라프산자니 총리는 중도 개혁주의자인 모하마드 하타미 총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하타미 총리는 이란을 조금 더 자유주의적, 민주적으로 만드려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2005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당선 및 녹색 혁명]

보수주의적 포퓰리스트 정치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으나, 2009년 재선 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며 '녹색 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주의적인 포퓰리스트 정치인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내무부가 현직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전체 표수의 62.63%를 득표했다고 발표하였고, 2위인 모사비 후보가 33.75%를 득표했다고 밝혔으나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도 존재했다. 이로 인하여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시위와 관련된 정치적 움직임을 '녹색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란 핵개발 프로그램 국제사회 화두]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이 국제 사회의 주요 문제로 부상하며, 미국과 UN 안보리의 제재로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는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이 국제 사회의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면서 이란은 점차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국제 사회의 맹주 격인 미국이 이란의 핵무기를 전략적 위험으로 판단하고 시정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설득하여 이란에 대한 대대적인 제재에 나서면서 미국과 이란 간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닫았다.

2013

[하산 로하니 대통령 취임]

하산 로하니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15일에는 하산 로하니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로하니 대통령의 재임기에 이란은 타 국가들과 관계를 점차 개선해나가기 시작하였다.

2016

[이란 핵협정 이행으로 경제제재 해제]

이란이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잘 이행함에 따라, 이란에 대한 모든 국제 경제제재가 해제되었다.

2016년 1월 16일 이란이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잘 이행함에 따라서, 이란에 대한 모든 경제제재는 해제되었다.

2017

[반정부 항의 시위 발생]

이란에서 어려운 경제·정치 상황 해결을 촉구하는 반정부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2017년과 2018년에 이란에서는 종교 최고지도자에게 이란이 처한 어려운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정부의 통제 탓에 시위의 전반적 규모는 추정키 어렵지만 몇 천명에 달하는 시위자들이 체포되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될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다.

2019

[연료 가격 인상 반대 시위 및 인터넷 차단]

정부의 연료 가격 300% 인상 발표 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 정부는 1주일간 인터넷을 차단하는 최악의 시위 탄압을 자행했다.

2019년과 2020년에도 정부가 연료 가격을 300%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후에 시위가 일어났으며, 몇 시간 만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후 정부는 시위자들의 연락을 끊기 위하여 1주일가량 동안 이란 전역의 인터넷을 끊어버렸고, 이로 인하여 이슬람 공화국 창립 이래 최악의 시위 탄압이 이루어졌다. 몇 만명이 체포되었고, 수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군대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다.

2020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 암살]

혁명수비대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이 이라크에서 미국에 의해 암살되며 미국과 이란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2020년 1월 3일에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이 이라크에서 미국에 의하여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이란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군 기지 공격 및 우크라이나 항공 752편 격추]

솔레이마니 장군 암살 보복으로 이라크 주둔 미군 기지를 공격했으나, 실수로 우크라이나 항공 752편을 오인 격추하여 176명의 민간인을 살해하는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3일 후, 이란의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이라크 주둔 미군에게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실수로 우크라이나 항공 752편을 군 관련 비행기로 오인하여 176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악수를 두면서 전세계적인 비판을 들었다. 국제적인 조사 끝에 이란 정부 역시 3일 간 사실을 부인하다가 결국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를 ‘인적 사고’라고 부르며 책임을 회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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