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베트남 전쟁
전쟁, 국제 분쟁, 군사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3:41
중국-베트남 전쟁은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중국의 '징벌'로 발발한 한 달간의 국경 분쟁입니다. 양측 모두 승리를 선언했으나, 전쟁은 1990년대까지 국경 충돌로 이어졌고, 1991년에야 공식 관계가 정상화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영유권 분쟁은 지속됩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중국-베트남 전쟁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69
[베트남, 중소 국경 분쟁에서 소련 지지]
베트남이 중소 국경 분쟁에서 소련을 지지하며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1969년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을 때, 베트남은 소련 측을 지지하며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이는 향후 양국 관계 악화의 배경 중 하나가 됩니다.
1975
[베트남 통일 및 인접국 공산화]
북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며 베트남이 공산화 통일되었고, 인접국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화되었습니다.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베트남은 공산화되어 통일되었고, 그 영향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화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공산당은 중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화교 탄압 등으로 양국 관계는 험악해졌습니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캄보디아에서는 론놀의 친미 군사 정권이 전복되고, 이어서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게 됩니다.
1976
[민주 캄푸치아 성립 및 폴 포트 공포 정치 시작]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고 민주 캄푸치아 성립을 선언하며 킬링필드로 불리는 대량 학살 공포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1976년 1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고 민주 캄푸치아를 수립했습니다. 이들은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 정치를 실시하며 통일 베트남과의 대립을 격화시켰습니다.
1978
폴 포트 정권의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 박해와 미확정 국경 문제로 인한 크메르 루주의 국경 침범 및 도발이 반복되면서, 1978년 1월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결국 국교를 단절하게 됩니다.
1979
[베트남, 캄보디아 프놈펜 점령 및 친베트남 정권 수립]
통일 베트남 정부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프놈펜을 점령하고, 헹 삼린을 수반으로 하는 친베트남 정권을 세웠습니다. 이에 중국이 후원하던 폴 포트 정권은 밀림으로 도망쳤습니다.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에 대한 폴 포트 정권의 박해와 끊임없는 국경 도발에 대응하여,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했습니다. 1979년 1월, 베트남군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헹 삼린을 수반으로 하는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이는 중국이 지원하던 폴 포트 정권의 붕괴를 의미했습니다.
[중국 지도부, 베트남 침공 결정]
캄보디아에서 중국이 지원하던 폴 포트 정권이 붕괴하고 친베트남 정권이 들어서자, 중국 지도부는 베트남 북부 침공을 결정했습니다.
베트남 공산당이 1969년 중소 국경 분쟁에서 소련을 지지한 전력이 있는 가운데,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캄보디아에서 중국이 지원하던 폴 포트 정권이 붕괴되고 친베트남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에 덩샤오핑과 화궈펑 등 중국 지도부는 캄보디아 전선에 머물던 베트남군의 주력을 철수시키기 위해 베트남 북부를 침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79년 1월 1일 이후, 중국은 대규모 병력 56만 명을 베트남 국경에 집결시키고 베트남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습니다. 이는 본격적인 침공 전의 군사적 위협 행위였습니다.
[중국, 베트남에 대한 '징벌적 군사행동' 선포]
덩샤오핑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이 캄보디아 침공과 화교 추방을 이유로 베트남에 대한 '징벌적 군사행동'을 공식 발표하며 선전포고했습니다.
1979년 2월 15일, 덩샤오핑 중국 공산당 최고 기관의 중앙위원회 부주석은 베트남의 동맹국 캄보디아 침공과 베트남 내 중국계 화교 추방(베트남 측은 부인)을 이유로 '베트남에 대한 징벌적 군사행동'을 공식 발표하고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중국-베트남 전쟁 발발, 중국군의 베트남 침공]
중월 국경 지대 전역에서 중국군이 중화기 1500문을 동원해 포격을 가하며 베트남을 전격 침공,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0개 군 3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어 라오까이, 까오방, 랑선 등 주요 도시 점령을 목표로 세 방면에서 진격했습니다.
1979년 2월 17일, 중국-베트남 국경 지대 전역에서 중국군이 중화기 1500문을 동원하여 포격을 가하며 베트남을 침공했습니다. 이후 10개 군 30만 명으로 구성된 군대가 서부, 북부, 동북부 세 방면을 통해 베트남 국경을 넘어 라오까이, 까오방, 랑선 각 도시 점령을 목표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개월간 지속될 중국-베트남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군은 압도적인 중국군 병력에 맞서 여러 진지를 구축하고 피해를 주면서 후퇴하는 종심 진지전을 펼쳤습니다. 중국군은 베트남군의 후퇴에 맞춰 진군하며 2월 25일에 까오방을 점령했습니다.
중국군은 베트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2월 26일 라오까이를 점령했습니다. 이는 베트남 북부 주요 거점을 하나씩 장악해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중국군, 랑선 점령 및 철수 결정]
중국군이 베트남 동북부 요충지 랑선을 점령했으나, 하노이 외곽에 집결한 베트남군 주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즉각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중국군은 3월 5일 베트남 동북부의 요충지 랑선을 점령하며 베트남 북부 다섯 지방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하노이 교외에 5개 사단 규모의 베트남 주력군이 합류하기 시작하자 중국 중앙 군사위원회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즉각적인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중국군, 베트남에서 철수 시작]
중국은 "베트남에 군사적 징벌 완료"를 선언하고, 랑선 점령 다음 날인 3월 6일부터 베트남 영토에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중국군이 랑선을 점령한 그날 밤, 캄보디아 방면으로 전개 중이던 베트남군 주력이 하노이 교외의 거대 진지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중국 중앙 군사위원회는 베트남 주력군과의 충돌 시 야전군의 피해가 늘어나고 점령지 유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하여 즉각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다음 날인 3월 6일, 중국은 "베트남에 군사적 징벌 완료"를 선언하며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중국군,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 철수]
중국군이 랑선 점령 후 철수를 시작하여, 점령한 성을 철수하면서 사회기반시설과 인프라를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3월 16일까지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중국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베트남군 주력이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중국군은 점령한 성을 철수하면서 사회기반시설과 인프라를 파괴하는 비인도적인 초토화 작전을 거듭하여 베트남군의 추격을 차단했습니다. 1979년 3월 16일까지 중국군은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양국은 이후 각자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중국-베트남 포로 교환]
전쟁 후 중국이 1,638명의 베트남군 포로를, 베트남이 238명의 중국군 포로를 잡고 있었으며, 5월에서 6월에 걸쳐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 쿤밍군구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군의 전사자는 6,954명, 전상자는 1만 4800명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베트남 국방부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군 사상자는 총 10%에 달했습니다. 포로 교환은 1979년 5월에서 6월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중국군 포로 중 일부는 베트남군에 항복 후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1980
[베트남 화교들의 보트피플 탈출]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로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많은 보트피플이 동남아 해상을 떠돌았습니다.
중국과의 전쟁 이후, 베트남에서는 중국계 화교에 대한 탄압과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고, 이는 1980년대 내내 수많은 화교들이 해상로를 통해 탈출하는 '보트피플'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동남아시아 해상을 떠돌며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베트남, 태국 국경 침공]
베트남이 캄보디아 주둔과 별개로 이웃 나라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 분쟁에 개입하여 태국을 침공하는 등 영향력 강화를 위한 군사 개입을 지속했습니다.
중월전쟁 이후 베트남은 헹 삼린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계속 주둔했습니다. 1980년 6월에는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 분쟁에 개입하며 태국을 침공하는 등, 동남아시아 내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한 군사 개입을 계속했습니다.
1984
[중국-베트남 국경 대규모 폭격]
중국과 베트남은 1980년대 내내 국경선 확정을 두고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 벌였으며, 특히 1984년 4월에는 대규모 폭격이 발생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은 중월전쟁 이후에도 1980년대 내내 국경선 확정을 둘러싸고 산발적인 전투를 지속했습니다. 1984년 4월에는 중국군에 의한 대규모 폭격이 발생하는 등 국경 분쟁이 격화되기도 했습니다.
1988
[스프래틀리 군도 해전 발발]
스프래틀리 군도(베트남명 쯔엉사, 중국명 난샤)를 둘러싸고 중국과 베트남 간의 치열한 해전이 발생했습니다.
1980년대 내내 지속된 중국과 베트남 간의 국경 분쟁은 해상으로도 확산되어, 1988년 스프래틀리 군도(남중국해의 여러 섬과 암초들로 이루어진 군도) 해전을 포함한 치열한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 지역은 현재까지도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989
[베트남군, 캄보디아에서 철군]
베트남이 경제 개발을 위한 개혁개방 노선인 도이모이 체제를 시작하면서 1989년 9월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중월전쟁 이후 헹 삼린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주둔했던 베트남군은 1989년 9월에 철수했습니다. 이는 베트남의 '도이모이' 체제(개혁개방 노선) 시작과 맞물려, 자국의 경제 개발에 집중하려는 정책 기조 변화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로써 중월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캄보디아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1990
[중국-베트남 비밀 정상회담 개최]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면서 양국 관계 정상화를 논의하기 위해 중국 청두에서 비밀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으로 무력 충돌이 끝난 후, 1990년 9월 중국과 베트남은 청두에서 비밀 정상회담을 가지고 관계 정상화에 동의했습니다. 이는 1980년대 내내 이어진 양국 간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991
1990년 9월 청두 비밀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후, 1991년 11월 중국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이는 수십 년간 이어진 양국 간의 대립과 갈등을 마무리 짓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99
[중국-베트남 국경 조약 체결]
수년간의 협상 끝에 중국과 베트남이 육로 국경 조정을 위한 국경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 인해 베트남은 우의관 등 전투로 획득한 중국 땅 일부를 양보했습니다.
1999년, 오랜 협상 끝에 중국과 베트남은 육로 국경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전투를 통해 획득했던 중국 땅의 일부를 양보했는데, 여기에는 베트남의 전통적인 국경선이자 진입 관문이었던 우의관(友誼關)이 포함되어 베트남 내에서 광범위한 분노와 좌절을 초래했습니다.
2001
1999년 체결된 국경 조약의 실제 이행에 대한 보도가 베트남 공식 뉴스 서비스를 통해 2001년 8월경에 이루어졌습니다.
2007
[하노이-쿤밍 고속도로 건설 계획 발표]
전장이었던 국경을 가로지르는 하노이-쿤밍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며 양국 관계 개선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대되었습니다.
2007년 12월, 하노이-쿤밍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고속도로는 과거 전장이었던 국경을 가로지르는 도로로, 국경 지역의 비무장화와 국가 간 무역 및 산업 협력 촉진에 기여하며 중월 관계 개선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었습니다.
2009
[중국-베트남 국경 분계선 공식 완료]
중국과 베트남 간의 육로 국경 분계선 작업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고 양국 외무부 차관급 인사가 서명했습니다.
2009년 1월, 중국과 베트남 간의 육로 국경 분계선 작업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으며, 베트남 외무부 부장관과 중국 측 우다웨이 국방장관이 이에 서명했습니다. 다만 파라셀 제도와 스프래틀리 제도는 여전히 분쟁지대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