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종교 전쟁, 기독교, 이슬람, 중세, 유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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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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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전개한 종교 전쟁입니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소집으로 시작되어 약 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동지중해 지배권 획득을 시도했으나 모든 십자군 국가가 멸망하며 성지 경략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유럽 내 이교도 토벌 및 정치적 목적의 십자군도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서양 문명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상업 발전, 문화적 교류를 촉진했지만, 약탈과 학살 등 도덕적 비판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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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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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

[무함마드 사망 및 아라비아 반도 통일]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하며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하나의 정체로 통일했습니다. 이는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팽창의 시작점이 됩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사망하기 전까지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하나의 정체로 통일시켰습니다. 이는 7세기와 8세기에 걸쳐 아랍인들이 군사 정복을 통해 급속히 팽창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637

[예루살렘 이슬람에 함락]

예루살렘이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습니다. 이 사건은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공성전 끝에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습니다. 이는 십자군 전쟁의 핵심적인 배경 중 하나인 성지 탈환의 명분을 제공하게 됩니다.

1054

[동서 교회의 분열 발생]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상호 파문하며 기독교 세계가 두 갈래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는 서방 교회 교황의 권력 증대와 동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한 십자군 소집의 동기 중 하나가 됩니다.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상호 파문하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세계가 두 개로 나뉘었으며,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을 통해 동방 교회를 서방 교회의 수장 아래 통합하려는 목적을 가졌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1071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군 대패]

셀주크 튀르크족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육군을 대패시켰습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군사 원조를 요청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며, 십자군 소집의 명분으로 작용합니다.

셀주크 튀르크족이 비잔틴 육군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패시켰습니다. 당시 아나톨리아를 정복하며 위협을 가하던 튀르크족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위기감은 교황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배경이 됩니다.

1085

[알폰소 6세, 톨레도 탈환]

레온-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이베리아반도의 톨레도를 탈환하면서 기독교 세력의 이슬람 몰아내기 운동인 레콩키스타가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기독교도들이 우마이야 칼리파조에게 정복당했던 영토를 재정복하는 레콩키스타를 8세기부터 진행해 왔습니다. 1085년 레온-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탈환하면서 레콩키스타 운동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1095

[교황 우르바노 2세,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소집]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 소집을 설교하며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는 십자군 전쟁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의 군사 원조 요청이 있었고, 같은 해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이를 논의하며 십자군 소집을 설교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교황이 동로마 제국을 도움으로써 갈라진 동서 교회를 재통합하고 자신이 그 수장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우르바노 2세의 선동에 서유럽의 모든 계층이 열광적으로 호응했으며, 이것이 이후 다른 모든 십자군들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1096

[군중 십자군, 라인란트 학살 자행]

피에르 레르미트가 이끄는 군중 십자군이 독일에서 유럽사 최초의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력 사태인 '라인란트 학살'을 일으켰습니다. 성지로 가는 길에 유대인들을 적대시하며 학살을 벌인 것입니다.

클레르몽 공의회 직후 피에르 레르미트라는 자가 수천 명의 기독교도 빈민들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이 '군중 십자군'은 성지로 가는 길에 독일에서 유럽사 최초의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력사태인 라인란트 학살을 일으켰습니다. 스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 등지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행위가 발생했습니다. 이후 군중 십자군은 동로마에 도착한 뒤 알렉시오스 1세의 충고를 무시하고 니케아로 쳐들어갔다가 튀르크족의 기습을 받고 대패, 불과 3천 명만 살아남는 키베토트 전투를 겪었습니다.

1099

[제1차 십자군, 예루살렘 함락]

제1차 십자군이 거대한 공성병기로 예루살렘 성벽을 깨뜨리고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이후 이틀에 걸쳐 십자군은 예루살렘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여 '성지에서의 학살'이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킨 십자군은 몇 달간의 분쟁 끝에 이집트의 파티마조가 튀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탈취한 기회를 포착,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제노바인들의 보급품 지원으로 거대한 공성병기를 건조하여 고드프루아가 지휘한 공성병기가 예루살렘 성벽을 깨뜨렸습니다. 이후 십자군은 이틀에 걸쳐 예루살렘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여 십자군의 평판이 야만으로 굳어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고드프루아는 파티마조 지원군을 아스칼론 전투에서 깨뜨리며 프랑크인의 우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1120

[성전기사단 창설]

교황들은 새로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을 돕기 위해 소규모 십자군을 계속 파병했으며, 이 시기에 성전기사단이 창설되었습니다.

12세기 초 교황들은 새로이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을 돕기 위해 동지중해 지역으로 소규모 십자군들을 계속 파병했습니다. 이 시기에 풀크 5세 당주 백작의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십자군 등이 있었으며, 특히 중요한 사건으로 성전기사단이 창설되었습니다.

1144

[장기, 에데사 함락]

모술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가 에데사를 함락시키면서 서유럽에 위기감이 조성되었고, 이는 제2차 십자군 소집의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모술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가 1128년 알레포를, 그리고 1144년 에데사 공방전에서 에데사를 함락시키면서 서유럽에서는 큰 위기감을 느꼈고, 이는 제2차 십자군 소집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1147

[제2차 십자군 소집 및 활동]

에데사 함락 소식에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이 소집되었으나, 이렇다 할 승리 없이 유대인 학살을 재발시키고 리스본, 토르토사 탈환 등 이베리아반도와 북유럽의 십자군 활동만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에데사 함락으로 위기감을 느낀 서유럽에서 제2차 십자군이 소집되었습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각기 프랑스와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군했지만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제1차 십자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십자군들은 라인란트, 쾰른, 마인츠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을 일으키며 금전을 요구했습니다. 한편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아폰수 1세가 리스본을, 러몸 버렁거 4세가 토르토사를 함락시키는 등 기독교도 제후들이 승세를 점했습니다. 북유럽에서는 아직 고대신을 믿는 슬라브족 민족인 벤트족을 토벌하는 벤트 십자군이 조직되었습니다.

1162

[벤트인 소멸]

북유럽 벤트 십자군 활동의 결과로 벤트인들이 소멸하며 발트 지역의 기독교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1147년에 시작된 벤트 십자군에 색슨인들과 데인인들이 참여하여 메클렌부르크와 루사티아 일대의 비기독교 부족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습니다. 이 시기 제2차 십자군 이외의 십자군을 공인하는 교황칙서가 내려진 적은 없지만, 마침내 1162년 벤트인들은 소멸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1187

[살라흐 앗딘,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포위 섬멸]

살라흐 앗딘이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최대 규모 군대를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 섬멸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왕국에 치명타를 입히고 예루살렘 함락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누르 앗딘 사망 후 권력을 장악한 살라흐 앗딘은 라틴 십자군에 대한 전역을 개시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왕 기는 예루살렘 왕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을 동원하여 야전에서 영격에 나섰지만, 살라흐 앗딘은 기의 부대를 수자원 보급이 불가능한 사막 속으로 끌어들인 뒤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섬멸했습니다. 이 대패는 팔레스타인 지역 거의 대부분이 살라흐 앗딘의 수중에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곧바로 예루살렘 공방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살라흐 앗딘, 예루살렘 함락]

하틴 전투의 승리 직후 살라흐 앗딘이 5일간의 공성전 끝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교황 우르바노 3세가 충격으로 사망하는 등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살라흐 앗딘은 기독교도들에게 평화롭게 살거나 40일 안에 퇴거하라는 선택지를 제시했습니다. 이후 왕도 예루살렘마저 5일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되었습니다. 아바스 베네딕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교황 우르바노 3세가 이 소식을 듣고 침통한 나머지 10월 19일 홧병으로 선종했다고 합니다.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소집하는 아우디타 트레멘디 칙서를 발표하며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었습니다.

1190

[프리드리히 1세, 살레프 강에서 익사]

제3차 십자군을 이끌던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살레프 강에서 익사하면서, 그의 지휘 아래 있던 독일군 대부분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3차 십자군이 지중해 동해안까지 가는 길은 다사다난했습니다.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살레프 강에서 익사해 버려서, 프리드리히가 지휘하던 독일군 중 목적지까지 도달한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편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는 바다를 통해 이동 중 키프로스에서 난파한 약혼자와 누이를 구하기 위해 무슬림보다 먼저 키프로스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191

[제3차 십자군, 아크레 함락]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이 아크레를 공성한 끝에 무슬림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내고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제3차 십자군의 주요 승리 중 하나입니다.

1189년 8월 28일부터 기 드 뤼지냥이 아크레를 포위하며 2년간의 공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가 도착하면서 전세가 반전되었고, 아크레의 무슬림 수비대장이 7월 12일에 항복했습니다. 필리프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고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리처드는 지중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아르수프 근교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항구도시 자파를 탈환했습니다.

1202

[제4차 십자군, 자다르 공성으로 파문당함]

베네치아에 집결한 제4차 십자군이 배삯을 지불할 수 없어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세속적 야심에 이용되어 기독교 도시 자다르를 공성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을 파문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 소집을 개시했습니다.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독일왕 필리프 폰 슈바벤은 자신들의 세속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했습니다. 십자군이 베네치아인들에게 배삯을 지불할 수 없었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약탈을 해서 배삯을 충당하기로 했습니다. 그 전초전으로 십자군은 기독교도 도시인 자다르를 공성했고, 식겁한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을 즉각 파문했습니다. 이 파문은 나중에 철회되었습니다.

1204

[제4차 십자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및 약탈]

제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약탈했습니다. 본래 목적지인 예루살렘과는 무관한 기독교 도시를 공격한 이 사건은 동서 기독교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자다르 공성으로 교황에게 파문당했던 제4차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암살당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재점령했습니다. 이번에는 도시를 약탈하여 교회를 분탕질하고 시민들 절대다수를 학살했습니다. 제4차 십자군은 본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1,000마일 떨어진 위치에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이 사건은 서방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습니다.

1209

[알비 십자군 시작]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카타리파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소집했습니다. 이 십자군은 프랑스 남부에서 카타리파를 잔인하게 진압하며 툴루즈 백국이 프랑스 왕령에 속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알비 십자군(1209년–1229년)은 알비파라고도 하는 카타리파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한 십자군입니다. 카타리파는 프랑스 남부에서 상당한 교세를 모으고 있었고, 십자군에게 잔인하게 진압당했습니다. 교세 중심지였던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왕령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툴루즈 백작위의 유일한 추정상속인이 루이 9세의 남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 백작과 결혼했고, 아이가 태어나지 못한 채 상속인이 죽자 툴루즈 백국은 카페 왕조의 직할령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프랑스왕 입장에서 알비 십자군의 실제 동기 중 하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1212

[어린이 십자군 발생]

열광적 신앙심이 민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나면서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성지 탈환을 위해 모인 어린이 십자군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순수함으로 성지 탈환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지만, 대부분 동지중해까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13세기는 열광적 신앙심이 민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였고, 그 결과 어린이 십자군 같은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청소년 및 소년들 여러 무리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고, 어른들은 실패했던 성지 탈환이 자신들의 순수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동지중해까지 도달한 어린이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가장 희박하지만, 당시 천명된 대의에 대하여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시사해주는 지표가 됩니다.

1217

[제5차 십자군 소집 및 활동]

교황 인노첸티오 3세가 제5차 십자군을 소집하여 이집트-시리아 공격을 목표로 했습니다. 다미에타를 함락시켰으나 이집트 본토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습니다.

1217년, 인노첸티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집트-시리아 일대의 살라흐 앗딘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5차 십자군입니다. 지휘관은 헝가리왕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였고, 병력은 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 프리지아에서 모집되었습니다. 레오폴트와 장 드 브리엔이 다미에타를 공격해 함락시켰으나,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간 병력은 격퇴당하여 항복했습니다. 다미에타는 무슬림들에게 반환되었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습니다.

1226

[독일기사단, 헤움노 헌납받음]

콘라트 1세가 독일기사단에 헤움노를 헌납하여 폴란드계 공후들을 대상으로 한 십자군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는 북방 십자군의 확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됩니다.

1226년에는 콘라트 1세가 독일기사단에 헤움노를 헌납하여 그 일대의 폴란드계 공후들을 대상으로 한 십자군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는 검우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인들에게 패배하자 그레고리오 9세가 검우기사단의 잔여 병력을 독일기사단에 합류시켜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만들면서 북방 십자군 활동의 중심 세력이 된 독일기사단의 확장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228

[프리드리히 2세의 제6차 십자군 (외교적 성과)]

파문당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아크레에 도착하여 제6차 십자군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무슬림 문화에 대한 뛰어난 이해를 바탕으로 무력 대신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예루살렘의 상당 부분을 기독교도들에게 넘기는 협약을 맺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조약을 파기하여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원래 십자군을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와 결혼했기에 예루살렘 왕위를 요구할 수 있었고, 1228년 아크레에 도착했습니다. 무슬림들에게서 탈환된지 얼마 안 된 시칠리아에서 성장한 그는 기독교 군주들 중 무슬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난 인물로, 무슬림 근위병과 하렘까지 가졌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적 수완에 힘입어, 제6차 십자군은 사실상 무력을 동원한 협상의 형태로 진행되어 예루살렘의 거의 대부분과 아크로로 이어지는 좁은 영토를 기독교도들에게 넘겼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들은 무슬림들이 계속 통제하는 협약이 이루어졌습니다.

1244

[화레즘 용병대의 예루살렘 함락]

화레즘 용병대가 이집트와 계약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이들은 라포르비 전투에서 기독교-시리아 무슬림 연합군마저 격파하여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를 끝냈습니다.

1244년, 한 무리의 화레즘 용병대가 이집트로 와서 다마스쿠스 토후 아스살리흐 이스마일과 계약했습니다. 그리고 화레즘 용병대는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예루살렘을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이 공격은 용병대가 제멋대로 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화레즘 용병들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뒤이어 라포르비 전투에서 기독교도들과 시리아 무슬림의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이로써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는 끝이 났습니다.

1249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 이집트 공격 실패]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한 제7차 십자군을 이끌었으나 실패했습니다. 만소우라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히는 굴욕을 겪은 뒤, 휴전 조약 체결 후 풀려났습니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에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7차 십자군입니다. 제7차 십자군은 1249년 이집트에 도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루이는 만소우라에서 패배하고 다미에타 방면으로 후퇴하던 도중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10년 기한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고 루이는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났습니다. 루이는 1254년까지 시리아에 머물면서 십자군 국가들의 공고화를 도모했습니다.

1265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의 십자군 국가 점령]

맘루크조 술탄 바이바르스가 1265년부터 1271년에 걸쳐 프랑크인들을 해안의 소규모 전초기지로 내몰고 나머지 땅을 모두 빼앗아갔습니다. 이는 십자군 국가들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1265년에서 1271년에 걸쳐, 맘루크조 술탄 바이바르스가 프랑크인들을 해안의 소규모 전초기지 몇 곳으로 내몰고 나머지 땅을 모두 빼앗아갔습니다. 바이바르스는 기독교도들과 몽골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막고,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등 복잡한 외교 정책을 펼치며 프랑크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켰습니다.

1270

[루이 9세, 제8차 십자군 중 사망]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켜 튀니스의 아랍 반군 세력을 공격했으나, 풍토병으로 루이 본인이 사망하며 십자군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사실상 동지중해 지역에서의 유의미한 십자군은 막을 내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시칠리아와 비잔티움의 영토 탈취를 꾀하던 샤를 당주의 설득에 따라, 그의 형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튀니스의 아랍 반군 세력을 공격했지만, 루이의 십자군은 풍토병으로 초토화되었고 루이 본인도 튀니스에서 사망했습니다. 루이의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를 비롯한 소규모 수행단만 남아 싸웠는데, 이것을 제9차 십자군이라고 합니다. 에드워드 왕자는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할 뻔한 뒤 10년짜리 휴전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동지중해 지역에서의 유의미한 십자군은 막을 내렸습니다.

1282

[시칠리아 만종 사건 발생]

미하일 8세의 배후 조종에 의해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샤를 당주가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는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지원을 받던 샤를의 동로마 제국 공격 계획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1281년 프랑스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선출되며 교황청의 모든 권력이 샤를 당주를 뒷받침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샤를은 과거 제4차 십자군이 그랬던 것처럼 동로마 황제위를 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십자군을 일으키려고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배후 조종에 의해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는 대대적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반란으로 샤를 당주는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고, 아라곤왕 페로 3세가 시칠리아왕을 칭했습니다.

1291

[십자군 국가의 마지막 거점 아크레 함락]

트리폴리에 이어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 국가인 '우트르메르'는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이는 2세기 동안 지속된 성지 경략의 최종적인 실패를 의미합니다.

1289년 트리폴리가, 1291년 아크레 공방전에서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은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멸망한 십자군 국가의 기독교도들은 키프로스 같은 섬으로 도망가서 망명정부를 세웠으며, 거기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는 보급과 통신이 어려웠던 지리적 한계, 그리고 단일한 지도자 아래 결집한 이슬람 세력의 반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1365

[피에르 1세의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키프로스왕 피에르 1세가 종교적, 경제적 동기로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습니다. 이는 후기 소규모 십자군의 한 예입니다.

14세기에는 소규모 십자군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1365년, 키프로스왕 피에르 1세가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는데, 이를 알렉산드리아 십자군이라고 합니다. 피에르 1세의 동기는 종교적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인 만큼 경제적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390년에는 루이 2세 드 부르봉 공작이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을 적으로 삼은 바르바리 십자군을 지휘했으나 휴전을 맺고 철수했습니다.

1396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 대패]

지기스문트가 지휘하는 십자군이 다뉴브 강에서 니코폴리스를 공격했으나, 오스만군에게 대패하고 3,000명의 포로를 내주었습니다. 이 패배로 가톨릭 유럽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오스만 튀르크는 발칸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1393년에는 이반 시슈만이 니코폴리스를 공격했습니다. 이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튀르크족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십자군 소집을 선언했고,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이 십자군을 지휘했습니다. 지기스문트의 조심스러운 전략 주문에도 불구하고, 다뉴브강에 도달한 십자군은 바로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가 9월 25일 오스만군에게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대패하고 3,000명을 포로로 잡혔습니다.

1415

[얀 후스 화형으로 후스 전쟁 시작]

보헤미아 종교개혁 지도자 얀 후스가 화형에 처해지면서,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토벌하려는 후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스 전쟁이라고도 하는 후스 십자군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진행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지도자 얀 후스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토벌하려 한 십자군입니다. 후스는 1415년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15세기 초에 총 다섯 차례(1420년, 1421년, 1422년, 1427년, 1431년)의 대 후스파 십자군이 소집되었지만, 이는 서로 교리 차이로 반목하던 후스파의 내부 종파들이 단결하여 침략자 십자군을 격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431

[제5차 후스파 십자군 박살]

제5차 후스파 십자군이 도마츨리체 전투에서 후스파 군세에게 박살나며, 후스 전쟁이 천주교회의 승리라고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5세기 초에 총 다섯 차례의 대 후스파 십자군이 소집되었습니다. 특히 1431년 제5차 후스파 십자군은 도마츨리체 전투에서 후스파 군세에게 박살났습니다. 후스 전쟁은 1436년 끝났지만 천주교회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천주교회는 급진 후스파를 제거하기 위해 온건 후스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교리를 용인해주는 바젤 협정을 맺어야 했습니다.

1444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 궤멸]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가 흑해 해변 바르나에서 바르나 십자군을 궤멸시켰습니다. 이 십자군은 교황청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마지막 십자군이었습니다.

오스만은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했고, 술탄 무라드 2세가 흑해 해변 바르나에서 바르나 십자군을 궤멸시켰습니다. 이 십자군은 교황청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마지막 십자군이었고, 4년 뒤에는 마지막 헝가리인 원정대도 격파되었습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 지배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며 천년 제국 동로마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는 유럽과 중동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며, 더 이상 성지 탈환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동로마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동로마를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여세를 몰아 1456년 헝가리로 쳐들어왔고, 후녀디 야노시가 베오그라드에서 농성했습니다. 이는 이슬람 세력의 강력한 부상과 기독교 세계의 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1492

[그라나다 토후국 멸망, 레콩키스타 완료]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토후국이 멸망하며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로써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등이 이합집산하여 기사단들을 형성하고 교황이 승인한 십자군 원정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1212년에서 1265년 사이에 무어인 등 무슬림 세력을 크게 몰아냈습니다. 그라나다 토후국은 1492년까지 존속했지만, 그라나다마저 멸망한 이후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면서 기독교의 이베리아반도 재정복, 즉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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