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노르드인, 해상 무역인, 전사, 탐험가, 식민 개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2:40
스칸디나비아에서 기원한 북게르만 민족인 바이킹은 8세기 말부터 11세기 말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교역, 탐험, 약탈, 정복을 오가며 지중해, 북아프리카, 심지어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하는 대담한 여정을 감행했습니다. 이들의 영향력은 브리튼 제도, 아일랜드, 프랑스, 동유럽 등 광범위한 지역에 깊이 새겨졌으며, 바이킹 시대는 중세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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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
['바이킹' 단어의 최초 등장]
고대 영어 시 '위드시스'에서 '바이킹'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합니다. 이는 바이킹이라는 정체성이 유럽 문화에 초기부터 인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이킹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어원은 확실치 않지만, 스칸디나비아의 룬 문자가 새겨진 금석문에서도 발견되며, 6세기 또는 7세기의 고대 영어 시 '위드시스(Widsith)'에 처음으로 언급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바이킹이 활동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720
[리베 지역의 대규모 가축 교역 흔적]
덴마크 리베 지역에서 유틀란드의 가축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중세 교역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이는 바이킹 시대 이전부터 활발했던 스칸디나비아의 교역 활동을 보여줍니다.
덴마크 리베와 그 주변 지역에서는 8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틀란드의 가축들에 대한 대규모 중세 교역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이는 바이킹들이 가죽과 육류에 대한 높은 수요를 충족시키고, 유럽 본토의 양피지 생산에 필요한 피혁을 공급하는 등 일찍이 활발한 교역 활동을 펼쳤음을 보여줍니다.
789
[포틀랜드 습격]
잉글랜드 포틀랜드 지역이 바이킹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바이킹 약탈 사건 중 하나로, 이후 바이킹의 대대적인 유럽 침략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 됩니다.
앵글로색슨 전기에는 789년 포틀랜드가 바이킹의 습격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비록 일반적으로 793년 린디스판 수도원 약탈을 최초의 바이킹 약탈로 거론하지만, 이 포틀랜드 습격은 바이킹의 해상 약탈 활동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793
[린디스판 수도원 약탈]
잉글랜드 동쪽 해안의 린디스판 수도원이 바이킹의 약탈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럽 전역에 공포를 안겨주며 '바이킹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793년, 잉글랜드 동쪽 해안의 신성한 수도원인 린디스판이 바이킹의 무자비한 약탈을 당했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단순히 한 수도원의 비극을 넘어, 바이킹이 스칸디나비아 본토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약 200년 동안 유럽사는 바이킹의 약탈과 정복 기록으로 가득 채워지며, '바이킹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습니다.
808
[레리크 파괴 및 발트해 우위 확립]
구드프레드 왕이 이끄는 바이킹들이 발트해 남쪽 해안의 오보트리티 도시 레리크를 파괴하고 상인들을 헤더퓌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로써 바이킹은 발트해 지역에서의 우위를 확고히 다지게 됩니다.
서기 808년, 구드프레드 왕의 지휘 아래 바이킹들은 발트해 남쪽 해안에 위치한 오보트리티족의 교역 도시 레리크를 파괴하고, 그곳을 왕래하던 상인들과 교역상들을 자신들의 주요 교역항인 헤더퓌로 옮겼습니다. 이 공격은 발트해 지역에서 바이킹의 상업적, 군사적 우위를 확고히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바이킹 시대 내내 이 지위는 유지되었습니다.
839
[스웨덴 사절단의 비잔티움 첫 방문]
스웨덴 사절단이 비잔티움 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습니다. 이는 바이킹이 서유럽뿐만 아니라 동유럽과 비잔티움 제국까지 교류를 확장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839년에 스웨덴 사절단이 비잔티움 제국을 처음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바이킹들이 단순히 약탈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교역과 외교적 관계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 같은 강력한 문명과도 접촉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용병으로 복무하며 '바랑기아 호위대'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882
[키예프 루스 건국 및 수도 키예프 합병]
바이킹 후예인 류리크 왕조가 키예프를 합병하고 이를 키예프 루스(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원)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바이킹은 동유럽 슬라브족과 핀우랄족 영토에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며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바이킹의 후예인 류리크 왕조는 동유럽의 슬라브족과 핀우랄족이 지배하던 영토를 장악했습니다. 882년, 이들은 키예프를 합병하여 키예프 루스의 수도로 삼았고, 이는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유럽 국가들의 기원이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바이킹은 단순히 약탈을 넘어 정착하고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900
[노르웨이 바이킹의 아이슬란드 개척 시작]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서쪽으로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바이킹들의 탐험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9세기,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본토의 인구 증가와 자원 부족은 바이킹들로 하여금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게 만들었고, 아이슬란드는 그들의 주요 정착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후 아이슬란드는 바이킹 문화와 사가 문학의 보고가 됩니다.
911
[노르망디 공작령 설립]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지도자 롤로와 덴마크 출신 베르나르 르 다누아가 이끄는 노르만족이 프랑크 왕으로부터 센강 하류 지역에 영토를 수여받아 노르망디 공작령을 세웠습니다. 이는 프랑스 역사와 이후 잉글랜드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911년,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지도자 롤로와 덴마크 출신 베르나르 르 다누아 등이 이끄는 노르만족은 프랑크 왕 샤를 3세로부터 센강 하류의 양안에 영토를 수여받고 정착했습니다. 이 지역은 훗날 '노르망디'로 불리게 되었으며, 노르망디 공작령의 설립은 바이킹이 단순히 약탈자를 넘어 유럽 봉건 질서에 편입되어 강력한 정치적 실체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후예는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게 됩니다.
972
[옐링 스톤 건립]
덴마크의 고름 가믈리 왕과 그의 아들 하랄드 블라톤 왕이 옐링 스톤을 건립했습니다. 이 룬돌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통일, 그리고 데인족의 기독교 개종을 기념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960년과 985년 사이에 덴마크의 옐링 스톤이 건립되었습니다. 가장 오래되고 작은 룬돌은 마지막으로 전통 신앙을 유지했던 덴마크 왕 고름 가믈리가 왕비 튀레를 추모하며 세운 것이며, 커다란 룬돌은 그의 아들 하랄드 블라톤이 덴마크와 노르웨이 전역을 정복하고 데인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것을 기념하며 세운 것입니다. 이 룬돌은 바이킹 시대 후반 스칸디나비아의 정치적 통합과 종교적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980
[붉은 에리크의 그린란드 정착지 설립]
붉은 에리크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바이킹 정착지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바이킹의 끊임없는 탐험 정신과 새로운 땅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붉은 에리크(Eric the Red)는 980년 무렵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그곳에 바이킹 정착지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중세 온난기'의 따뜻한 기후 덕분에 정착은 가능했지만, 이후 기후 변화로 인해 15세기 중엽에 쇠퇴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바이킹의 극한 환경 적응력과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려는 도전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1000
[바이킹의 북아메리카 대륙 발견 및 정착 시도]
비아르니 헤리올프손이 북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며, 붉은 에리크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이 오늘날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랑스 오 메도즈에 단기간 유지된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이는 콜럼버스보다 수백 년 앞선 인류 최초의 북아메리카 대륙 발견 기록입니다!
1000년경, 비아르니 헤리올프손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했고,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과 토르핀 칼세프니가 그린란드로부터 건너와 오늘날 캐나다 뉴펀들랜드주의 랑스 오 메도즈에 '빈란드(포도주의 땅)'라는 단기간의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이는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앞선 인류 최초의 북아메리카 대륙 발견 및 정착 시도로, 바이킹의 경이로운 탐험 능력을 보여주는 세계사적 사건입니다. 하지만 원주민과의 마찰과 기후 변화로 몇 세대 이상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랑스 오 메도즈의 유적지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013
[스웨인 포크비어드의 잉글랜드 정복 및 즉위]
덴마크 왕 스웨인 포크비어드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바이킹 세력이 잉글랜드 왕국에 직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013년부터 1014년까지, 덴마크의 스웨인 포크비어드 왕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바이킹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앵글로색슨 왕국을 무너뜨리고 직접 통치하게 됩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에 바이킹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016
[크누트 대왕의 잉글랜드 왕위 즉위 및 북해 제국 건설]
스웨인 포크비어드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 덴마크, 노르웨이와 함께 북해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는 바이킹 세력이 유럽 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016년부터 1035년까지, 크누트 대왕(Canute the Great)은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 덴마크, 노르웨이를 포함하는 강력한 '북해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바이킹의 후예로서 잉글랜드를 직접 통치하며 북유럽과 서유럽에 걸쳐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여 바이킹 세력의 정치적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바이킹이 단순한 약탈자를 넘어 유럽의 주요 왕실을 차지하고 통치하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1018
[스칸디나비아 용병의 활약]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런던과 키예프 등 유럽의 여러 왕실에서 용병으로 고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의 '바랑기아 호위대'는 그들의 용맹함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1018년부터 1066년까지,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런던, 키예프 등 유럽의 여러 왕실에서 용병으로 고용되어 활약했습니다. 특히 10세기 말에 창설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 호위 부대인 '바랑기아 호위대'에는 다수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그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스웨덴의 중세 법률인 '베스티에탈라겐'에서 그리스(동로마 제국)에 머무는 동안 상속권을 박탈하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많은 스웨덴 남성들이 용병으로 떠났습니다.
1066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및 바이킹 시대 종결]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습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자, 일반적으로 '바이킹 시대'의 종결을 알리는 시기로 여겨집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바이킹 후손)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사건은 잉글랜드의 정치,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건은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에서 '바이킹 시대'의 끝을 알리는 중요한 시점으로 간주됩니다. 바이킹 후손들이 유럽의 주요 왕국을 형성하고 기독교 문명에 동화되면서, 기존의 약탈과 탐험 위주의 바이킹 활동은 점차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는 바이킹이 단순히 '야만적인 약탈자'가 아니라 유럽 사회에 통합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주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1130
[아이슬란드 및 그린란드 역사 기록 시작]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가 기독교화된 후, 이 지역들의 역사가 현지인의 시선으로 사가와 연대기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바이킹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귀중한 문헌 자료가 됩니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가 기독교화된 1130년이 되어서야, 이 지역들의 역사 기록들이 사가와 연대기에서 현지인의 시선으로 작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바이킹의 구전 문화에서 벗어나 문헌을 통해 그들의 삶과 모험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바이킹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들을 제공합니다.
1200
[아이슬란드 사가 문학의 융성]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바이킹 후손들 사이에서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독특한 토착 문학인 '아이슬란드 사가'가 융성했습니다. 이는 바이킹 시대의 전승과 문화를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아이슬란드에 있는 바이킹 식민지에서는 예외적으로 토착 문학이 융성했습니다. 바로 '아이슬란드 사가'로, 바이킹 시대와 연관되는 많은 전승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이때 처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가들은 바이킹의 가치관, 사회상, 일상생활 등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오늘날 바이킹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1차 자료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450
[그린란드 바이킹 정착지의 몰락]
중세 온난기가 끝나고 소빙하기가 시작되면서 그린란드에 세워졌던 바이킹 정착지가 쇠퇴하고 결국 몰락했습니다. 이는 기후 변화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입니다.
그린란드 정착지는 980년 무렵 설립되었지만, 15세기 중엽에 쇠퇴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소빙하기'라는 기후 변화에서 기인했을 수 있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자원 부족은 바이킹 정착민들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고, 결국 그린란드 정착지는 몇 백 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바이킹의 서부 진출이 멈추고 그들의 고향마저 타격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09
['바이킹' 이미지의 근대적 재창조]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핀란드를 잃자,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바이킹'을 용감하고 호전적인 해양 전사로 재해석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작가 에리크 구스타프 예이예르의 시 '바이킹'과 예타회 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09년, 스웨덴이 핀란드 전쟁에서 600년간 영토였던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잃자, 상실감에 빠진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용감하고 영화로운 과거 역사를 창조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에리크 구스타프 예이예르가 '바이킹'이라는 시를 쓰면서 바이킹은 긍정적인 의미로 부각되었고, 예이예르가 회원으로 있던 '예타회'와 작가 에사이아스 텡네르의 '프리티오프 사가' 개작 등이 바이킹에 대한 현대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바이킹에 대한 영웅적인 이미지는 이러한 19세기 정치적, 문화적 배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1920
[엘브달렌인들의 룬 문자 사용 중단]
스웨덴 달라르나 지방의 고립된 인구 집단인 엘브달렌인들이 룬 문자 사용을 중단했습니다. 이는 세계에서 룬 문자가 마지막까지 사용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룬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집단은 스웨덴 달라르나 지방의 엘브달렌(Älvdalen)이라는 곳에 거주했던 엘브달렌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늦으면 1920년대에 들어서야 룬 문자 사용을 중단했으며, 이는 세계 다른 어떤 곳보다 엘브달렌에서 룬 문자 사용이 오래 지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엘브달렌어 룬 문자 기록의 마지막 알려진 것은 1929년 이후의 것으로, 룬 문자의 오랜 역사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습니다.
2019
[감라 웁살라에서 바이킹 배 무덤 발굴]
스웨덴 감라 웁살라에서 고고학자들이 두 척의 희귀한 배 무덤을 발굴했습니다. 이 무덤에서는 사람, 개, 말의 유해와 다양한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어 바이킹 시대 장례 의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2019년, 스웨덴 감라 웁살라에서 고고학자들이 두 척의 배 무덤을 발굴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중 한 선박에서는 다른 부장품들과 함께 사람, 개, 말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해당 지역 바이킹 공동체의 독특한 장례 의식을 규명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며, 바이킹 문화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