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유대-로마 전쟁

전쟁, 반란, 종교 갈등, 로마 제국,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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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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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반란, 종교 갈등, 로마 제국,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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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6년부터 73년까지 로마 제국에 맞선 유대인들의 첫 번째 대규모 반란입니다.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분쟁, 로마 총독의 압정, 유대인들의 독립 열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발했습니다.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비극적인 전쟁입니다. 로마의 완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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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칼리굴라 황제의 우상화 정책에 유대인 반발]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제국 전역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게 한 사건이 유대 속주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며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칼리굴라 황제가 스스로 신을 자처하며 제국 전역에 자신의 조각상을 성전에 세우게 한 사건은 야훼 외에는 신이 없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큰 반감을 샀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황제를 우상화하는 종교정책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1

[헤롯 아그리파 1세 유대 왕 즉위]

헤롯 왕의 손자인 아그리파 1세가 친로마 노선으로 유대 왕에 임명되어 유대의 통치를 맡게 되었습니다.

헤롯 왕의 손자 아그리파 1세는 로마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 서기 41년에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의 통치를 담당했습니다. 이는 잠시나마 유대 속주가 로마 총독의 직할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시기였습니다.

44

[아그리파 1세 사망 후 유대 속주 로마 직할 지배 재개]

헤롯 아그리파 1세가 병사하면서 유대 속주는 다시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로마와 유대인 사이의 긴장을 다시 고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아그리파 1세가 44년에 병사하자, 유대 속주는 다시 로마 총독의 직할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과 유대인 간의 문화적, 종교적 마찰이 계속되는 가운데,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는 유대인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습니다.

66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발발]

카이사레아에서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 종교적 분쟁이 시작되었고, 로마 행정관 플로루스의 강경 진압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로마 세력을 유대에서 몰아내고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을 학살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한 순간이었습니다.

66년, 카이사레아에서 지역 시나고그 앞 제사를 둘러싼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다툼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속주 장관 플로루스가 예루살렘 신전에서 금화를 몰수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강경 진압하자 폭동이 마침내 6월에 로마 세력을 유대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수준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로마 수비대는 폭도들을 피해 왕궁으로 달아났고, 투항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말에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으며, 유대 내부의 온건파 중심이었던 대제사장도 동생과 함께 살해되었습니다. 이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 그리고 시리아와 이집트의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도 퍼져나갔습니다.

[케스티우스 갈루스, 예루살렘 진압 실패 후 사망]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유대 반란 진압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으나 신전 언덕 공략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병으로 인해 안티오키아로 후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습니다. 로마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유대 반란군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자 군단장이었던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안티오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12군단과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 도시들을 공략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신전 언덕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고, 11월에 총독 관저로 돌아왔다가 직후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보병 5,300명과 기병 480기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67

[베스파시아누스, 대규모 유대 진압 작전 개시]

네로 황제는 갈루스 후임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유대 속주 반란 진압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3개 군단 6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대 전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하여 북쪽 해안가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케스티우스 갈루스의 후임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유대 속주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제5군단, 제10군단, 제15군단 등 3개 군단에 약 6만여 명의 병력과 동맹군을 이끌고 67년 5월에 군사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는 유대 전역을 융단폭격하듯이 공략하며 북쪽 해안가에서부터 남쪽으로 예루살렘에 접근하여 반란을 진압해 들어갔습니다.

[갈릴리 요타파타 요새 함락]

47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 끝에 갈릴리의 요타파타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요새에 있던 유대 장로와 병사들 대부분은 로마군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자결을 택했습니다. 훗날 '유대 전쟁사'를 집필하는 요세푸스 등 소수만이 항복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47일에 걸친 공방 끝에 7월 20일, 갈릴리의 요타파타 요새를 함락시켰습니다. 이때 사망자는 4만 명, 포로는 1,2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투항 권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 장로와 병사들은 로마군에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자결하는 쪽을 택했고, 훗날 《유대 전쟁사》를 집필하게 되는 요세푸스를 포함한 두 명만이 자발적으로 로마군에게 나와서 항복했습니다.

68

[로마군 예루살렘 포위, 네로 황제 사망으로 전쟁 중단]

로마군은 북부 유대지방의 반란을 거의 진압하고 여름에는 예루살렘을 동서북쪽에서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네로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 정치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유대 전쟁은 1년 반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 반군 내부에서는 극단적인 결사항전 목소리가 커져갔습니다.

갈릴리 지역을 진압한 로마군은 유대 중앙부로 전선을 옮겨 68년까지는 거의 모든 북부 유대지방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여름에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로마 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유대 전쟁은 1년 반 동안 중단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동안 방어 대책에 전념하고, 유월절 방문객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오라고 장려하며 '유일신' 여호와가 지켜주는 예루살렘이 '이교도' 로마의 손에 떨어질 리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69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즉위 및 예루살렘 공략 재개]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단에 의해 로마 황제로 추대되면서 유대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의 지휘를 맡았고, 로마군은 추가 병력을 투입하여 도시를 압박했습니다. 예루살렘 내부에서는 열심당의 영향력이 강해져 결사항전을 외치며 잔인한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69년 7월 이후, 예루살렘 공략은 재개되었습니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서방으로 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했으며, 재개될 유대 전쟁의 모든 지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맡고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유대계)가 그 옆에서 도왔습니다. 또한 기존의 3개 군단에 앞서 유대에 패하기도 했던 제12군단이 더 추가되고, 아그리파 2세도 직접 참전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 안에서는 열심당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결사항전'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잔인한 내전이 반란군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열심당과 시카리오이들은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암살하였고 거의 모든 반란군 지도자들이 로마인의 손이 아니라 유대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70

[예루살렘 성전 파괴 및 소실]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하고 불태웠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신성한 장소였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의미했으며, 고대 전쟁의 불문율을 깨는 행위였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사망하거나 노예로 전락했으며, 이는 유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군의 항복 권고를 유대인들이 듣지 않자,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을 지휘하며 도시 주위에 영구 진지를 구축하고 성벽 높이의 벽을 쌓고 참호를 팠습니다. 도시 안에서는 공성전에서 평화협상을 막고 결사항전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식량을 모두 불태워 많은 주민과 군인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탈출하려는 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70년 8월 10일,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으며, 9월 8일에 시내 저항도 수그러들고 20일에 저항은 모두 끝났습니다.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는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사망자는 무려 110만 명이었고 9만 7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함락 및 도시 파괴]

예루살렘 성전 소실 이후, 로마군은 예루살렘 시내의 저항군을 완전히 진압하고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유대인들의 주요 저항 거점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후, 9월 8일에는 시내에서의 저항도 수그러들고 20일에는 모든 저항이 끝났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약탈당했습니다. 이는 로마가 앞으로는 유대교도에게 그들의 '총본산'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표명이기도 했습니다.

73

[마사다 요새 함락,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종결]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세 곳의 요새에서 저항을 이어가던 유대인들은 마사다 요새를 마지막으로 항전했습니다. 결국 로마군에 의해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었고,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기 전 집단 자결을 택했습니다. 이로써 7년에 걸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로마의 완승으로 최종 막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예루살렘 서남쪽 30km 지점의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의 마카이로스, 그리고 서쪽에 위치한 마사다의 세 요새에서 급진파들은 항전하고 있었습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했던 군단 가운데 3개 군단을 시리아와 도나우 강 연안의 원래 주둔지로 돌려보냈는데, 71년 티투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루실리우스 바수스가 사후수습을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남은 유대인 저항군의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고 사해까지 진출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병사하고 그의 후임으로 플라비우스 실바가 부임했습니다. 기원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농성하던 이들이 거의 다 자살함으로써 요새가 함락되고 7년간의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얌니아 랍비 학원 설립 허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유대 전쟁이 종결된 해에 얌니아(오늘날의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사이)에 유대 문화 연구소인 랍비 학원 설립을 허가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신앙과 문화를 보존하고 재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마사다 요새가 함락된 기원후 73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얌니아(예루살렘과 오늘날의 텔아비브 사이에 위치)라는 도시에 유대문화 연구소(랍비 학원)의 설립을 허가했습니다. 이 조치는 로마가 반항하지 않은 해외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지 않겠다는 관용적 태도를 보여준 것이며, 유대인들에게 신앙과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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