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민족, 퉁구스족, 고대 민족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2:13
여진족은 동북아시아 넓은 지역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민족입니다.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오랜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1115년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하여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하며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17세기 초 누르하치에 의해 통합되어 만주족으로 개칭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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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k
[여진족 조상, 숙신 등장]
중국 문헌에 여진족의 조상으로 알려진 숙신이 처음 등장하며, 이들은 오늘날 중국 흑룡강성과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사이의 숲과 강 협곡에 살았던 것으로 기록됩니다.
중국 문헌에 기원전 1100년경, 여진족의 초기 조상으로 알려진 숙신이 등장했다. 이들은 현재의 흑룡강성과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지역에 해당하는 숲과 강 협곡에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200
[여진족 초기 명칭, 읍루 등장]
숙신에 이어 여진족의 초기 명칭으로 읍루가 등장하며, 이들의 문화와 생활 양식에 대한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원후 200년경, 여진족의 초기 명칭 중 하나인 읍루가 문헌에 등장했다. 이 시기 읍루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500
[물길 등장 및 고구려 속민 통합]
읍루에 이어 물길이 여진족의 조상으로 언급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고구려의 속민으로 통합되는 역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기원후 500년경, 여진족의 또 다른 조상으로 물길이 등장했다. 물길은 이후 고구려의 속민으로 통합되어, 당시 동북아시아 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700
기원후 700년경, 물길과 어원이 같은 말갈이 등장하여 발해의 중요한 구성 민족 중 하나가 되었다. 말갈족은 발해 내에서 농업과 수렵 활동을 병행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748
[중국 문헌에 '여진' 명칭 최초 등장]
중국 문헌에 '여진'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들이 오늘날 중국 흑룡강성과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사이에 거주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748년, 중국 문헌에서 '여진'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이는 현재의 흑룡강성과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지역에서 여진족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이후 여진족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115
[완안아골타, 금나라 건국]
완안아골타가 요나라를 정복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이는 여진족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115년, 여진족의 지도자 완안아골타가 거란족의 요나라를 정복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금나라'를 건국했다. 이 사건은 여진족이 독립적인 정치 체제를 갖추고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120
[여진 문자 발명]
완안아골타의 명에 따라 완안희윤이 거란 문자에 기반한 여진 문자를 발명했으나, 금나라 멸망 후 급속히 사라졌습니다.
1120년,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지시로 완안희윤이 거란 문자를 본떠 여진 문자를 창제했다. 이는 여진족의 독자적인 문자 생활의 시작을 알렸지만, 언어적 차이와 금나라 멸망으로 인해 빠르게 소멸하고 여진어만 잔존하게 되었다.
1126
[금나라, 북송 수도 카이펑 점령]
금나라 군대가 북송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고 화북 지역의 패권을 쥐게 되는 '정강의 변'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금나라가 중원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126년, 금나라는 요나라 잔당과 함께 북송을 공격하여 수도 카이펑을 함락시켰다. 이 사건은 '정강의 변'으로 불리며, 금나라가 화북 지역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원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215
[금나라 수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이전]
몽골 군대의 압력에 밀려 금나라는 수도를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기며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1215년, 몽골 군대의 강력한 압박과 침공으로 인해 금나라는 수도를 베이징에서 남쪽의 카이펑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는 금나라가 점차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몽골과의 전면전으로 접어드는 중요한 시기였다.
1234
[몽골 제국에 의한 금나라 멸망]
몽골 제국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하며, 여진족은 야인, 해서, 건주 여진으로 분열되어 독립적인 행태를 보였습니다. 이는 여진족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1234년, 금나라는 몽골 제국의 강력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금나라 멸망 이후 여진족은 야인 여진, 해서 여진, 건주 여진의 세 분파로 나뉘어 각기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며 명나라 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1586
[누르하치, 여진 삼부족 통합]
건주 여진의 우두머리 누르하치가 여진의 표면상 세 부족(해서, 건주, 야인)을 통합하고 강력한 제도를 구축하여 훗날 청나라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586년, 건주 여진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해서 여진, 건주 여진, 야인 여진의 주요 부족들을 통합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는 통합된 부족들을 '만주족'으로 개명하고 강력한 법령과 제도를 마련하여 훗날 후금(청나라)을 건국하는 초석을 다졌다.
1635
[여진족, '만주족'으로 족명 개칭]
후금의 누르하치가 여진이라는 족명을 금지하고 야인 여진 일부를 제외한 모든 여진족을 '만주족'으로 개칭하도록 명령하여, 여진족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1635년, 후금의 통치자 누르하치는 '여진'이라는 족명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야인 여진 일부를 제외한 모든 여진족에게 '만주족'으로 족명을 개칭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여진족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통일된 민족으로서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중대한 조치였다.
1640
[몽골 민족 일부, 만주인으로 편입]
1640년대에는 몽골의 하라친 등 여러 몽골 민족들도 '만주인'으로 불리게 되면서, 만주족의 정체성이 점차 확장되고 통합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1640년대에 들어서면서, 몽골의 하라친 등 일부 몽골 민족들까지도 '만주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고 주변 민족들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단순히 여진족을 넘어선 복합적인 집단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