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 제국
제국, 왕조,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9- 00:20:59
고르 제국은 8세기부터 1215년까지 구르 지역을 중심으로 호라산과 북인도 일대를 통치한 페르시아계 왕조이다. 본래 가즈나, 셀주크 제국의 봉신으로 출발했으나 12세기 중반 '세계를 불태운 자' 알라 앗 딘 후세인의 활약으로 독립했다. 기야스 앗 딘 무함마드와 무함마드 고리의 공동 통치 아래 호라산에서 인도 벵골까지 이르는 최대 영토를 달성했다. 무함마드 고리 암살 후 급격히 쇠퇴하여 호라즘 제국에 멸망했으나, 인도 정복은 델리 술탄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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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구르 지역 제후 등장]
8세기경, 아미르 반지라는 구르족 제후가 구르 지역을 통치했으며, 아바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로부터 통치를 인정받았다. 이 인물은 중세 구르 왕조의 조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 아바스 칼리파국이 전성기를 누릴 무렵, '아미르 반지(Amir Banji)'라는 이름의 한 구르족 제후가 구르 지역을 통치했으며, 아바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가 그의 통치를 인정했다. 이는 중세 구르 왕조의 조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11
[가즈나 제국의 속령이 되다]
가즈나 제국의 술탄 마흐무드가 구르 지역을 공격하여 속령으로 삼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구르인들은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구르 지역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1세기 초로, 당시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던 가즈나 제국의 술탄 마흐무드가 1011년 이 지역을 공격하여 속령으로 삼은 뒤의 일이었다. 알 주즈자니의 기록에 따르면, 고르 지역의 통치자 아미르 수리는 가즈나 제국의 마흐무드에게 붙잡혀 그의 아들과 함께 수도 가즈니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곳을 수 차례 공격한 마흐무드는 제국의 직할 영토로 편입하는 대신 구르인들에게 조공을 받고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선에서 끝냈다. 한편 이때 구르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1040
[셀주크 제국의 봉신이 되다]
가즈나 제국이 1040년 단다나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 패배한 후 쇠퇴하자, 구르 왕조는 가즈나 왕조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셀주크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
마흐무드 사후, 가즈나 제국은 1040년 단다나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게 패배한 뒤 호라산~이란 동부를 상실하고 아프가니스탄 일대로 밀려났다. 그러자 구르 왕조는 가즈나 왕조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셀주크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
1148
[가즈나 제국과의 갈등 발생]
가즈나 제국의 술탄 바흐람 샤가 구르 왕조 통치자 셰이프 앗 딘 수리의 동생을 독살하며 양측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셰이프 앗 딘 수리는 가즈니를 공격하여 바흐람 샤를 물리쳤으나, 1년 뒤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1148년, 가즈나 제국의 술탄 바흐람 샤는 당시 구르 왕조 통치자 셰이프 앗 딘 수리와 다투었는데, 그 원인은 바흐람 샤가 수리의 동생 쿠트브 앗 딘 무함마드를 독살했기 때문이었다. 셰이프는 곧 군대를 이끌고 가즈니로 진군하여 바흐람 샤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1년 후, 바흐람 샤는 다시 돌아와 셰이프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셰이프는 곧 십자가에 못 박혔다. 셰이프의 또 다른 동생 바하 앗 딘 삼 1세가 두 형제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나섰지만, 가즈니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1149
['세계를 불태운 자'의 등장과 가즈니 파괴]
형제들의 복수를 위해 알라 앗 딘 후세인이 가즈나 제국의 수도 가즈니를 함락시킨 후 7일 밤낮으로 불태워 6만 명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세계를 불태운 자(Jahānsūz)'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는 구르 왕조의 독립적인 성장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셰이프의 형제들 중 막내이자, 새로이 구르 왕조의 왕으로 즉위한 알라 앗 딘 후세인(1149-1161) 역시 그의 두 형제들을 죽게 만든 바흐람 샤에게 복수하기를 원했다. 그는 바흐람 샤를 물리친 뒤, 가즈나 제국의 수도 가즈니를 함락시켰다. 이때 구르 군대에 의해 가즈니에 거주하던 주민 6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도시는 7일 밤낮동안 불태워졌다. 이후 후세인은 보스트로 진군하여 그곳의 가즈나 요새와 궁전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이것은 그에게 '세계를 불태운 자(Jahānsūz)'라는 칭호를 가져다 주었다.
1152
[셀주크 제국과의 충돌과 패배]
알라 앗 딘 후세인이 셀주크 제국에 대한 경의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하며 진격했으나,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사로잡혔다. 그는 2년 뒤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152년, 알라 앗 딘 후세인은 셀주크 제국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부하고, 수도 피루즈쿠에서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그러나 그는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에게 하르루드(Harīrūd) 계곡의 나브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사로잡혔다. 일설에 따르면, 전투의 향방이 결정되는 시점에 후세인의 군대에 있던 6,000명의 유목민들이 그를 배신하고 셀주크 측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2년 뒤, 후세인은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겨우 고르로 돌아왔다.
1161
[알라 앗 딘 후세인의 사망]
'세계를 불태운 자' 알라 앗 딘 후세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셰이프 앗 딘 무함마드가 뒤를 이었으나, 2년 후 오구즈 튀르크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후세인이 1161년에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셰이프 앗 딘 무함마드가 뒤를 이었지만, 그는 2년 뒤 발흐에서 오구즈 튀르크족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1173
[무함마드 고리의 가즈니 재탈환]
기야스 앗 딘 무함마드의 동생 무함마드 고리가 여러 시도 끝에 가즈니를 재탈환하고 가즈나 왕조를 축출했다. 가즈니는 이후 구르 왕조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셰이프 앗 딘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그의 조카(바하 앗 딘 삼 1세의 아들)들인 기야스 앗 딘 무함마드와 무이즈 웃 딘 무함마드(본 문에서는 별명인 무함마드 고리로 기술함)였다. 기야스는 즉위한 직후, 그의 동생의 도움을 받아 아부 아바스라는 이름의 경쟁자를 제거했으며, 헤라트·발흐의 셀주크 총독을 끌어들인 삼촌 파흐르 앗 딘 마수드 역시 물리쳤다. 1173년, 무함마드 고리는 수 차례의 시도 끝에 가즈니를 재탈환했고, 그곳에서 가즈나 왕조를 축출했다.
1175
[헤라트 점령]
구르 왕조가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헤라트를 빼앗았다. 헤라트는 이후 피루즈쿠, 가즈니와 함께 구르 왕조의 주요 대도시이자 문화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2년 뒤인 1175년, 구르 왕조는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헤라트를 빼앗았는데, 곧 그곳은 피루즈쿠, 그리고 가즈니와 함께 그들의 주요 대도시이자 문화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그들은 님루즈와 시스탄을 넘어 케르만까지 그들의 종주권을 확장했다.
[무함마드 고리의 인도 정복 시작]
무함마드 고리가 가즈니를 수도로 삼고 제국 동부를 통치하며 인도 아대륙 침공을 시작했다. 이 정복은 1205년까지 이어져 북인도와 벵골까지 구르 왕조의 영토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형 기야스 앗 딘 무함마드는 피루즈쿠를 수도로 두고 제국의 서부를 통치했으며, 동생 무이즈 웃딘 무함마드(무함마드 고리)는 가즈니를 수도로 두고 제국의 동부를 통치했는데, 그는 1175년부터 인도 아대륙 침공을 시작하여 1205년까지 북부 인도와 벵골을 정복했다. 1175년, 무함마드 고리는 인더스 강을 건넌 뒤 고말 고개를 통해 펀자브로 침입했다. 그곳의 가즈나 왕조를 밀어냈다. 이후 고리는 카르마트인들로부터 물탄을 정복했으며, 1176년에는 펀자브 남부의 우흐를 함락시켰다.
1178
[카사흐라다 전투에서의 패배]
무함마드 고리가 구자라트로 침공했으나, 카사흐라다 전투에서 라지푸트 왕들이 이끄는 인도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로 인해 그는 인도 침략 경로를 변경해야 했다.
1178년에 무함마드 고리는 다시 고말 고개를 건넜고, 물탄-우흐-타르 사막을 지나 구자라트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구르 군대는 가즈니로부터의 긴 행군으로 인해 지쳐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라지푸트 왕들이 이끄는 인도 연합군과 맞서야 했다. 결국 카사흐라다 전투에서 무함마드 고리는 패배했고, 이로 인해 추후 인도 침략을 위한 진군 경로를 바꾸었다.
1186
[가즈나 왕조의 완전한 멸망]
무함마드 고리가 신드, 페샤와르, 시알코트 등을 정복한 후, 3번의 침입 끝에 마침내 라호르에 남아있던 가즈나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구르 제국에 합병했다.
그 뒤 그는 인도 북부로 향하는 길목인 펀자브와 파키스탄의 일부 지역을 통제하는 가즈나 왕조를 압박했다. 그리하여 그 다음 10년 동안, 고리는 신드, 페샤와르, 시알코트를 정복했으며, 3번의 침입 끝에 마침내 1186년, 라호르에서 연명하던 '가즈나' 왕조를 멸망시키고 제국의 영토로 합병하였다.
1191
[제1차 타라인 전투의 패배]
구르 왕조가 바틴다를 점령하고 델리를 향해 진군했으나, 제1차 타라인 전투에서 차우한 왕 프리트비라자 3세가 이끄는 라지푸트 연합군에게 크게 패배했다.
1191년, 구르 왕조는 바틴다를 점령하고 델리를 향해 진군했지만, 제 1차 타라인 전투에서 차우한 왕 프리트비라자 3세가 이끄는 라지푸트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1192
[제2차 타라인 전투의 승리]
무함마드 고리가 튀르크 궁기병들을 이끌고 다시 인도로 돌아와 제2차 타라인 전투에서 라지푸트 연합군을 격파하고 차우한 왕 프리트비라자 3세를 처형했다. 이 승리로 북인도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는 1년 뒤 튀르크 궁기병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왔고, 제 2차 타라인 전투에서 라지푸트 연합군을 쳐부수고 프리트비라자를 처형했다. 프리트비라자의 아들 고빈다라자 4세는 구르 왕조에게 복속하며 봉신이 되었다.
[호라산 정벌의 시작]
무함마드 고리가 형 기야스 앗 딘을 도와 호라즘 제국을 상대로 호라산 영유권을 다투었다. 메르브 인근에서 호라즘 왕자 술탄 샤를 물리쳤으며, 1200년까지 호라산 전역을 장악하고 니샤푸르와 이란 북동부 베스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 뒤, 무함마드 고리는 그의 형 기야스를 도와 당시 카라 키타이의 속국이었던 호라즘 제국을 상대로 호라산의 영유권을 놓고 경쟁했다. 본래 호라산 지역은 셀주크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으나, 1153년에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패배한 이후 셀주크 패권이 붕괴되면서 오구즈 튀르크족들의 손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1192년, 호라즘 왕자인 술탄 샤는 구르 군대에게 메르브 인근에서 패배했다. 이후 1200년에 호라즘 샤 테키쉬가 죽을 때까지 구르 왕조는 호라산 전역을 장악했으며, 니샤푸르를 점령했고, 더 나아가 이란 북동부의 베스탐(Besṭām)까지 도달했다.
1193
[델리 정복과 총독 임명]
제2차 타라인 전투 승리 후, 무함마드 고리의 장군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가 델리를 정복하고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인도 내 구르 왕조의 통치 기반을 확립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1193년, 델리는 무이즈 웃 딘의 휘하 장군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에 의해 정복되었고, 곧 그는 델리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곳을 통치했다.
1194
[찬다와르 전투 승리]
무함마드 고리가 인도로 돌아와 찬다와르 전투에서 가하다발라 왕 자야찬드라를 전사시켰다. 이 전투 이후 바라나시 등 광범위한 지역이 정복되고 힌두교 사원이 파괴되었다.
1194년 무함마드 고리는 인도로 돌아와 5만 명의 기병대와 함께 야무나 강을 건넜고, 찬다와르 전투에서 가하다발라 왕 자야찬드라와 맞붙어 그를 전사시켰다. 전투 이후, 무이즈는 자신의 장군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를 선봉으로 하여 동쪽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는 바라나시를 점령하고 황폐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천 개의 사원 속 우상'들이 파괴되었다.
1196
[인도 영토 확장]
무함마드 고리의 장군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가 괄리오르의 카차파가타 왕 술락샤나팔라를 물리치고 괄리오르 요새를 함락시켰다. 또한 라지푸트-차울루키아 연합군을 완파하고 아나힐라바드를 점령하며 인도 내 구르 왕조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196년, 아이바크는 괄리오르의 카차파가타 왕 술락샤나팔라를 물리치고 괄리오르 요새를 함락시켰다. 또한 그는 1196년 비마 2세가 이끄는 라지푸트-차울루키아 연합군을 완파하고 아나힐라바드를 점령했다.
1202
[찬델라 왕조 침공]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가 갠지스강 일대의 찬델라 왕조를 침공하여 그 지역의 토착 왕조들을 멸망시키고 힌두교 사원을 파괴한 뒤 모스크를 건설했다. 약탈한 부는 제국 서부로 보내졌다.
1202-1203년 사이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는 갠지스강 일대의 찬델라 왕조를 침공했다. 구르 군대는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진격하는 동안, 그 지역의 토착 왕조들을 멸망시키고 힌두교 사원을 모조리 파괴한 뒤 모스크를 건설했다. 약탈로부터 얻은 부는 제국 서부의 기야스 앗 딘에게 보내졌다.
1203
[벵골 정복과 나란다 대학 파괴]
장군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가 갠지스강 하류 평원과 벵골을 침공했다. 그는 비하르의 나란다 대학과 같은 불교 교육 중심지를 파괴하며 인도 학문의 쇠퇴에 기여했으며, 1205년 라크나우티에 이슬람 통치를 확립했다.
1203년경, 구르 왕조의 또 다른 장군인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가 갠지스강 하류 평원을 휩쓸고 벵골로 쳐들어갔다. 그는 비하르에서 나란다 대학과 같은 불교 교육의 중심지를 파괴하여 이슬람 도래 이전에 번성했던 인도 학문의 쇠퇴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할지는 중부 벵골의 고대 도시 누디야를 약탈하고 1205년 옛 세나 왕조의 수도 라크나우티에 이슬람 통치를 확립했다.
[기야스 앗 딘 무함마드 사망]
공동 통치자였던 기야스 앗 딘 무함마드가 통풍으로 사망하고, 그의 동생 무함마드 고리가 구르 왕조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기야스 앗 딘 무함마드는 1203년 3월 13일 통풍으로 사망했고, 무함마드 고리가 구르 왕조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1204
[안드후드 전투에서의 결정적 패배]
호라즘 제국과 카라 키타이 연합군과의 안드후드 전투에서 구르 군대가 완패하며 호라산 대부분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이 패배는 구르 왕조의 급격한 쇠퇴를 초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라즘 제국의 무함마드 2세가 쳐들어와 메르브 인근을 위협했지만, 무함마드는 그를 몰아내고 오히려 호라즘 제국의 수도 구르간즈를 포위했다. 그러자 무함마드 2세는 그들의 종주국이었던 카라 키타이에게 도움을 호소했고, 이에 카라 키타이 황제 야율직로고가 친히 이끄는 대규모 군대가 도착했다. 옥수스 강 인근에서 벌어진 안드후드 전투에서, 구르 군대는 카라 키타이와 호라즘 제국의 연합군에게 완패했다. 이번 안드후드에서의 패배로 인해 구르 왕조는 호라산 대부분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해버렸다.
1206
[무함마드 고리의 암살]
반란 진압 후 돌아오던 길에 무함마드 고리가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구르 왕조의 패권을 급격히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이후 무함마드 고리는 1년여만에 대군을 일으켜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했지만, 펀자브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 1206년 3월 15일, 반란 진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무함마드 고리는 오늘날 파키스탄 소하와에서 암살당했다.
1215
[구르 제국의 최종 멸망]
무함마드 고리 사후 구심점을 잃은 구르 왕조는 잔존 세력이 호라즘 제국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 호라즘인들이 1206년 헤라트와 구르를 점령한 데 이어, 마침내 1215년 가즈니마저 함락시키며 구르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1206년 무함마드 고리가 사망하자, 1200년 즈음에 정점을 찍었던 구르 왕조의 패권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무너져내렸으며, 구심점을 잃어버린 구르 씨족들은 영토를 분배받은 그대로 분열되었다. 잔존한 구르 왕조의 토후들은 호라즘 제국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알라 웃딘 무함마드 휘하의 호라즘인들은 1206년 헤라트와 구르를 점령했고, 마침내 1215년 가즈니마저 함락시킴으로써 구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