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태저넷가
왕가, 귀족 가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1:26
잉글랜드 왕국을 통치한 왕가로, 앙주 지방에서 시작해 피레네에서 스코틀랜드 국경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1154년부터 1485년까지 본가 및 랭커스터, 요크 방계 포함 총 15명의 군주를 배출했다. 이 시기 영국 고유 문화와 예술이 발전했으며, 백년 전쟁, 장미 전쟁 등 주요 분쟁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헨리 2세의 행정 개혁, 존 왕의 마그나 카르타 인정, 리처드 1세와 헨리 5세의 군사적 업적 등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봉건 사회의 변동과 시민·상인층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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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플랜태저넷가 건립]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에 의해 가문이 건립되었다. '플랜태저넷' 이름은 셰익스피어가 붙였으며, 조프루아가 투구에 금작화 가지를 꽂고 다녔던 것에서 유래한다.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플랜태저넷가를 건립했다. 가문 이름은 조프루아가 항상 투구에 금작화 가지(Planta Genista)를 꽂고 다녔던 것에서 유래하며,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 이름을 붙였다. 플랜태저넷이라는 표현 자체는 조프루아 이후 쓰이지 않다가 1460년경 요크 공작 리처드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별칭으로 사용했다.
1154
[헨리 2세 즉위 및 플랜태저넷 왕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 시작]
플랜태저넷가의 첫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즉위하여 앙주, 아키텐 등을 포함한 대영토를 지배하며 국내 행정 개혁을 실시, 봉건 왕정을 확립하며 300년 가까운 왕조 시대의 막을 올렸다.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2세는 1154년 12월 19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어머니 마틸다가 헨리 1세의 딸로서 추정 상속인이었으나 사촌 블루아의 스티븐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던 상황에서 왕위를 되찾았다. 헨리 2세는 앙주, 아키텐 등을 포함한 대영토를 지배하며 국내에서는 일련의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봉건 왕정을 확립하였으나, 그 후 왕의 전제 정치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플랜태저넷가는 1154년부터 1485년까지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를 포함해 전체 15명의 군주를 배출하며 왕위를 이어갔다.
1170
[젊은 헨리, 헨리 2세와 공동 통치 시작]
헨리 2세의 아들인 젊은 헨리가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헨리 2세의 아들인 젊은 헨리는 1170년 6월 14일부터 아버지 헨리 2세와 함께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1183년 6월 11일까지 공동 통치자로 재위했다.
1189
[리처드 1세 즉위 및 '사자심왕' 별명 획득]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 1세가 즉위했다. 그는 제3차 십자군에서 맹활약하며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영국 전래 문학에서 기사도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헨리 2세의 아들인 리처드 1세는 1189년 9월 3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제3차 십자군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영국 전래 문학에서 기사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199년 4월 6일까지 재위했다.
1199
[존 왕 즉위 및 실정, 마그나 카르타 인정]
리처드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헨리 2세의 아들 존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실정을 거듭하여 대륙 영토를 잃었으며, 귀족의 반항에 부딪혀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함으로써 왕권을 제한당했다.
헨리 2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은 1199년 5월 27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실정을 거듭하여 대륙의 영토를 잃었으며, 귀족들의 강력한 반항에 직면하여 1215년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고 타협함으로써 왕권이 제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1216년 10월 19일까지 재위했다.
1216
[헨리 3세 즉위와 왕권 제한 시도]
존 왕의 아들 헨리 3세가 즉위했다. 그의 재위 중 왕의 전제에 반항하는 귀족 연합은 신흥 상인·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존 왕의 아들 헨리 3세는 1216년 10월 28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왕의 전제에 반항하는 귀족 연합은 신흥 상인과 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1272년 11월 16일까지 재위했다.
1272
[에드워드 1세 즉위 및 봉건 사회 정비]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 1세('장경왕' 별명)가 즉위했다. 그는 귀족과 협조하여 일련의 제정법을 통해 봉건사회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 1세는 1272년 11월 20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키가 188cm에 달해 '장경왕'(Longshank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귀족과 협조하여 일련의 제정법에 의해 봉건사회를 정비했다. 그는 1307년 7월 7일까지 재위했다.
1307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1307년 7월 7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여 1327년 1월 25일까지 재위했다.
1327
[에드워드 3세 즉위와 백년 전쟁 발발]
에드워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즉위했다. 그의 재위 중 프랑스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발루아 왕가와 다툰 백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플랜태저넷가의 다사다난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시민·상인층이 성장하며 봉건사회가 변동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 3세는 1327년 1월 25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발루아 왕가와 다툰 백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이후 왕권이 실추된 반면 시민·상인층이 점차 성장하여 봉건사회를 변동시키게 된다. 그는 1377년 6월 21일까지 재위했다.
1377
[리처드 2세 즉위]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리처드 2세가 즉위했다. 그는 플랜태저넷 본가의 마지막 잉글랜드 국왕이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리처드 2세는 1377년 6월 21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1399년 9월 29일에 폐위될 때까지 재위하며 플랜태저넷 본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1381
에드워드 3세의 재위 기간 중인 1381년, 시민·상인층이 점차 성장하여 봉건사회를 변동시키게 되는 상징적 사건인 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1399
[플랜태저넷 본가 리처드 2세 폐위]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리처드 2세가 폐위되면서 플랜태저넷 본가의 왕위 계승이 단절되고, 랭커스터 왕가로 왕위가 넘어갔다.
리처드 2세는 1399년 9월 29일 폐위되었다. 이로써 플랜태저넷 본가의 왕위 계승이 단절되고,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곤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랭커스터 왕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헨리 4세 즉위 (랭커스터 왕가)]
리처드 2세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3세의 손자 헨리 4세가 즉위하며 랭커스터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 4세는 1399년 9월 30일, 사촌인 리처드 2세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랭커스터 왕가의 잉글랜드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1413년 3월 20일까지 재위했다.
1413
[헨리 5세 즉위 및 아쟁쿠르 전투 승리]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5세가 즉위했다. 그는 백년 전쟁 중 아쟁쿠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전사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5세는 1413년 3월 20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백년 전쟁 중 아쟁쿠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유명한 전사 군주로 이름을 남겼다. 그는 1422년 8월 31일까지 재위했다.
1422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는 1422년 8월 31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1461년 3월 4일까지 1차 재위 기간을 가졌다.
1460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 별칭 재사용]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사용했던 '플랜태저넷' 별칭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플랜태저넷이라는 표현 자체는 시조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이후 쓰지 않다가 1460년경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자신의 별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1461
[에드워드 4세 즉위 (요크 왕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의 아들 에드워드 4세가 헨리 6세를 폐위하고 즉위하며 요크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는 장미 전쟁의 주요 전환점 중 하나이다.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의 아들인 에드워드 4세는 1461년 3월 4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헨리 6세의 삼종제이며,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인 초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과 초대 요크 공작 에드먼드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그의 즉위로 요크 왕가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1470년 10월 30일까지 1차 재위 기간을 가졌다.
1470
헨리 5세의 아들인 헨리 6세는 1470년 10월 30일부터 1471년 4월 11일까지 잠시 복위하여 2차 재위 기간을 가졌다.
1471
에드워드 4세는 1471년 4월 11일부터 1483년 4월 9일까지 다시 잉글랜드 국왕으로 재위했다.
1483
에드워드 4세의 아들 에드워드 5세는 1483년 4월 9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1483년 6월 25일까지 짧은 기간 재위했다.
[리처드 3세 즉위 (요크 왕가 최후의 왕)]
에드워드 4세의 형제이자 에드워드 5세의 삼촌인 리처드 3세가 즉위했다. 그는 요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이자 플랜태저넷 왕가의 최후의 군주가 되었다.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4세의 형제, 에드워드 5세의 삼촌인 리처드 3세는 1483년 6월 26일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요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그는 1485년 8월 22일까지 재위했다.
1485
[리처드 3세 보즈워스 전투 사망, 플랜태저넷 왕위 단절]
장미 전쟁 중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사망하면서 플랜태저넷가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이 단절되었다. 이로써 300년에 가까운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장미 전쟁 중인 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왕위가 끊겼으며,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를 포함한 플랜태저넷 왕가의 300년 가까운 통치가 막을 내렸다.
1499
1499년, 리처드 3세의 조카인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처형되면서 플랜태저넷가의 적통마저 완전히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