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가

귀족 가문, 왕조, 공국, 잉글랜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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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가문, 왕조, 공국, 잉글랜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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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가는 중세 시대의 주요 귀족 가문으로, 노르망디 공작 및 잉글랜드 국왕 작위를 계승했습니다. 1066년 노르만 정복을 통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며 노르만 왕조를 세웠습니다. 정복왕 윌리엄은 봉건제를 확립하고 잉글랜드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가문은 1154년 플랜태저넷 가문에게 권력이 넘어가기 전까지 잉글랜드의 주요 통치 가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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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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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노르망디 가문 시초, 롤로의 노르망디 백작 등극]

바이킹 지도자 롤로가 노르망디 백작이 되며 노르망디 가문의 시초를 열었습니다. 이로써 노르망디 공국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롤로(공구 흐롤프)는 911년부터 927년까지 노르망디 백작을 지냈습니다. 그는 노르망디 가문의 첫 번째 가주이자 노르망디 공국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그의 등극은 노르망디 가문의 오랜 역사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927

[윌리엄 1세 노르망디 백작 계승]

롤로의 뒤를 이어 빌햘므 랑가스표트(기욤 1세)가 노르망디 백작으로 즉위하며 가문의 통치를 이어받았습니다.

927년, 롤로의 뒤를 이어 빌햘므 랑가스표트(기욤 1세)가 노르망디 백작이 되었으며, 942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는 노르망디 가문의 영속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942

[리처드 1세 노르망디 백작 계승]

리샤르 상푀르(리처드 1세)가 노르망디 백작이 되어 996년까지 통치하며 노르망디 가문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942년 리샤르 상푀르(리처드 1세)가 노르망디 백작으로 즉위하여 996년까지 통치하며 노르망디 가문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노르망디 공국은 점차 안정적인 영지로 발전했습니다.

996

[리처드 2세 노르망디 공작 계승]

리샤르 르 봉(리처드 2세)이 노르망디 공작이 되어 1027년까지 통치하며 노르망디의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996년 리샤르 르 봉(리처드 2세)이 노르망디 공작으로 즉위했으며, 그의 통치는 1027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노르망디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1027

[리처드 3세 노르망디 공작 계승]

리샤르 3세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으나 짧은 기간 통치한 후 로베르 1세에게 계승되었습니다.

1027년 리샤르 3세가 노르망디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같은 해 로베르 1세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로베르 1세 노르망디 공작 계승]

로베르 르 마니피크(로베르 1세)가 노르망디 공작으로 즉위하여 1035년까지 재위했습니다.

1027년 리샤르 3세의 뒤를 이어 로베르 르 마니피크(로베르 1세)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으며, 1035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노르망디 공국은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1035

[정복왕 윌리엄, 노르망디 공작 되다]

미래의 잉글랜드 정복왕 윌리엄(기욤 2세)이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계승하며 그의 위대한 여정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1035년 로베르 1세의 뒤를 이어 정복왕 윌리엄(기욤 2세)이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훗날 잉글랜드를 정복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됩니다.

1066

[에드워드왕 사망과 잉글랜드 왕위 논쟁]

참회왕 에드워드 사망 후 해럴드 2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선출되자,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왕위 약속을 주장하며 잉글랜드 왕위 계승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한 후 위탄회의는 해럴드 2세를 잉글랜드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생전에 자신에게 왕위를 약속했고, 해럴드 또한 자신의 가신이 되기를 서약했다고 주장하며 왕위 계승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는 노르만 정복의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교황 지지 확보와 노르망디 원정군 결성]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지지를 확보하고, 플랑드르, 브르타뉴 등지에서 8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모집하여 잉글랜드 침략을 준비했습니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왕위 계승 부적절함을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탄원했고, 교황은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윌리엄을 지지했습니다. 이에 고무된 윌리엄은 봉신들을 소집하고 플랑드르, 브르타뉴 등지에서 8천 명에 달하는 자원 병사를 모아 잉글랜드 원정군을 편성했습니다.

[윌리엄, 잉글랜드 해안에 성공적으로 상륙]

해럴드 왕이 북부 침략을 막으러 간 사이,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 아무런 저항 없이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정복의 결정적인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해럴드 왕이 동생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 하랄드의 침입에 맞서 북부로 이동한 틈을 타, 정복왕 윌리엄은 1066년 9월 28일 오전 9시경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헤이스팅즈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헤이스팅스 전투, 잉글랜드 왕위의 향방을 가르다]

윌리엄의 군대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해럴드 왕을 전사시킴으로써 잉글랜드 왕위를 최종적으로 차지했습니다.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부근에서 해럴드와 윌리엄의 군대가 대치했습니다. 윌리엄은 거짓 후퇴 작전과 중무장 기병 투입으로 해럴드 군을 괴멸시켰고, 해럴드 왕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 승리로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의 잉글랜드 왕 대관식]

정복왕 윌리엄이 웨스터민스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으나, 예상치 못한 혼란이 발생하며 그의 위치가 아직 불안정함을 드러냈습니다.

1066년 크리스마스에 정복왕 윌리엄은 웨스터민스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관식 중 노르만 병사들의 오해로 화재가 발생하고 대혼란에 빠지는 해프닝이 벌어져, 윌리엄의 왕위가 아직 확고하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정복을 완성하기 위해 앞으로 5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습니다.

1070

[윌리엄 1세, 잉글랜드 지배체제 재편 시작]

윌리엄 1세는 노르만 봉건관행을 도입하고 교회 및 수도원장을 노르만인으로 교체하기 시작하며 잉글랜드 지배체제를 재편했습니다.

윌리엄 1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축성으로 권위를 얻은 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인접 지역을 자신에게 충실했던 대제후의 봉토로 하사하여 국경 지역을 완충지대로 삼았습니다. 또한 노르망디의 봉건관행을 잉글랜드에 도입하고 1070년경부터 교회의 주교와 수도원장을 노르만인으로 교체하기 시작하여 잉글랜드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1086

[윌리엄 1세, 둠즈데이 북 작성과 충성서약 강요]

윌리엄 1세는 둠즈데이 북을 작성하여 토지 소유 현황을 파악하고, 모든 봉신에게 왕에 대한 직접적인 충성서약을 강요하며 왕권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윌리엄 1세는 1086년 둠즈데이 북을 작성하여 잉글랜드의 토지 소유 현황과 인구 등을 기록했습니다. 이 당시 앵글로-색슨 귀족 중 영향력 있는 자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토지는 노르만 대제후들이 소유했습니다. 그는 또한 대 제후들에게 분봉받은 봉신들까지 소집하여 직속 주군보다 왕인 자신에게 우선적으로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함으로써 잉글랜드 왕권을 확고히 하고 질서 잡힌 왕국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1087

[정복왕 윌리엄 사망과 왕위 분할]

정복왕 윌리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로베르 2세는 노르망디 공작이 되어 영지가 분할되었습니다.

1087년 정복왕 윌리엄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고, 로베르 2세는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계승하며 노르망디 가문의 영지는 분할되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사이의 새로운 정치적 역학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1100

[헨리 1세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 사망 후 헨리 1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1100년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가 사망하자, 헨리 1세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1135년까지 잉글랜드 국왕으로 재위했으며, 형 로베르 2세로부터 노르망디 공작위도 되찾았습니다.

1106

[헨리 1세, 노르망디 공작위 획득]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가 노르망디 공작위를 획득하여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다시 한 사람의 통치 아래 통합했습니다.

1106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는 노르망디 공작위를 획득하여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통치권을 다시 한 사람에게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1135년까지 노르망디 공작으로 재위하며 양 지역의 안정을 추구했습니다.

1120

[기욤 아델랭 노르망디 공작 등극]

윌리엄 3세로 불리는 기욤 아델랭이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으나, 잉글랜드 국왕은 아니었습니다.

1120년 기욤 아델랭(윌리엄 3세)이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지만, 잉글랜드 왕위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가계도에서 짧게 언급됩니다.

1135

[헨리 1세 사망과 왕위 계승 위기 (무정부 시대)]

헨리 1세 사망 후, 그의 딸 마틸다와 조카 스티븐 사이에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며 왕국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마틸다와 조카 스티븐 사이에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계승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무정부 시대'로 알려진 내란 상태에 돌입하며 노르망디 가문의 통치에 큰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1154

[노르망디 가문 단절, 플랜태저넷 왕조 시작]

스티븐 1세 사망 후, 노르망디 가문은 단절되고 정복왕 윌리엄의 외손자 계열인 플랜태저넷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1154년 스티븐 1세가 사망하면서 정복왕 윌리엄의 친손자가 아닌 외손자 계승으로 인해 노르망디 가문은 사실상 단절되었습니다. 이후 권력은 앙주 백작 제프리의 아들 헨리 2세, 즉 플랜태저넷 가문으로 넘어가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중요한 왕조 교체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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