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곤 왕국

국가, 왕국, 역사, 이베리아 반도, 중세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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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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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 산맥의 작은 백작령에서 시작된 아라곤은 불굴의 투지와 전략적 결단으로 지중해를 호령하는 거대 제국으로 거듭났습니다. 라미로 1세의 독립 선언부터 '투사왕' 알폰소의 영토 확장, 그리고 카스티야와의 통합을 거쳐 스페인이라는 거대 국가의 뿌리가 되기까지, 아라곤의 역사는 끊임없는 도전과 화려한 번영의 대서사시입니다. 비록 1707년 누에바 플란타 칙령으로 그 정치적 실체는 사라졌으나, 그들이 남긴 자치 정신과 문화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베리아반도의 심장에 강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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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

[아라곤 백작령의 탄생]

프랑크 왕국의 영향권 아래에서 아스나르 갈린데스 1세가 통치자로 부상합니다. 이 시기 아라곤은 작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피레네 산맥의 소규모 영지에 불과했습니다. 이 보잘것없던 시작이 훗날 거대 왕국으로 성장하는 씨앗이 됩니다.

아스나르 갈린데스 1세는 카롤링거 왕조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아라곤'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을 흐르는 아라곤 강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초기 백작령은 자카(Jaca)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의 북상을 막는 완충 지대 역할을 했습니다.

820

[가르시아 갈린데스의 찬탈]

가르시아 갈린데스가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합니다. 그는 팜플로나 왕국의 지원을 받아 기존 백작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아라곤이 외부 세력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첫 번째 움직임이었습니다.

가르시아 갈린데스는 프랑크 왕국과의 봉신 관계를 끊고 팜플로나 왕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라곤 백작령은 카롤링거 제국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라곤은 피레네 산맥 북쪽보다는 이베리아 반도 내부의 정세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844

[갈린도 아스나레스의 복귀]

아스나르 1세의 아들인 갈린도가 다시 백작위를 되찾으며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합니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여 백작령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가문의 복귀는 아라곤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갈린도 1세 아스나레스는 영지를 확장하기 위해 주변 소영주들과 끊임없이 교전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세력의 결속을 위해 인근 사찰과 교회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부터 아라곤은 단순한 경계령을 넘어 하나의 확고한 정치 단위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922

[나바라 왕국과의 결합]

아라곤 백작령이 나바라 왕국의 지배권 아래로 들어가며 강력한 기독교 연합 세력을 형성합니다. 혼인을 통해 양국은 하나로 묶였으며 이는 이슬람 세력에 맞서는 중요한 동력이 됩니다. 아라곤은 나바라의 보호 아래서 행정적, 군사적 성장을 지속합니다.

아라곤의 안드레고토 갈린데스 여백작과 나바라의 가르시아 산체스 1세의 혼인으로 두 지역이 결합되었습니다.
비록 나바라 왕의 통치를 받았으나 아라곤은 고유의 관습과 법률을 유지하며 자치권을 행사했습니다.
이 결합은 훗날 산초 3세 대왕 시대에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주도권을 잡는 밑거름이 됩니다.

1000

[산초 3세의 제국 건설]

나바라의 산초 3세가 아라곤을 포함한 이베리아 북부 대부분을 장악하며 대왕의 칭호를 얻습니다. 그는 아라곤 백작령을 왕국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전 단계로서의 행정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 아라곤은 전쟁 준비를 마칩니다.

산초 3세는 유럽의 선진적인 봉건 제도를 도입하여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했습니다.
그는 아라곤 지역의 수도원들을 정비하고 로마 전례를 도입하여 종교적 통일성을 꾀했습니다.
사후 영토 분할 계획은 아라곤이 독립 왕국으로 탄생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1035

[아라곤 독립 왕국의 탄생]

산초 3세의 사후 영토 분할 과정에서 라미로 1세가 아라곤의 첫 번째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이로써 아라곤은 백작령에서 명실상부한 독립 왕국으로 지위가 격상됩니다. 라미로 1세는 국가의 기틀을 잡고 영토 확장의 야망을 드러냅니다.

라미로 1세는 산초 3세의 서자로, 부왕의 유언에 따라 아라곤 백작령을 물려받아 국왕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즉위 직후 주변의 소영주들을 복속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 사건은 스페인 역사에서 아라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1044

[타파야 전투의 승리]

신생 아라곤 왕국이 주변 왕국과의 분쟁에서 승리하며 군사적 역량을 입증합니다. 이 승리를 통해 라미로 1세는 왕국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대외적인 위상을 높입니다. 초기 왕국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중요한 군사적 성과였습니다.

라미로 1세는 나바라 왕국의 가르시아 산체스 3세와 대립하며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했습니다.
비록 전투의 규모는 작았으나 신생 왕국인 아라곤이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아라곤은 이웃 기독교 왕국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적 협상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63

[산초 라미레스의 즉위]

아라곤의 두 번째 국왕 산초 라미레스가 즉위하며 왕국은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합니다. 그는 교황청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왕권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합니다. 이를 통해 아라곤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확고히 자리 잡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교황의 봉신 국가로 헌납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라곤은 로마 전례를 수용하고 서유럽 문화와의 교류를 대폭 확대했습니다.
교황의 지지는 아라곤이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십자군적 성격을 띠게 만드는 명분이 되었습니다.

[라미로 1세의 전사]

그라우스 전투에서 국왕 라미로 1세가 전사하며 왕국은 큰 슬픔에 잠깁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아라곤인들에게 이슬람 세력에 맞서는 강력한 복수심과 결속력을 심어줍니다. 뒤를 이은 산초 라미레스는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영토 확장을 가속화합니다.

라미로 1세는 전략적 요충지인 그라우스를 정복하려다 카스티야-이슬람 연합군에 패배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전투에는 훗날의 영웅 '엘 시드'도 카스티야 측의 젊은 기사로 참여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국왕의 전사는 아라곤이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시련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068

[로마 순례와 외교 혁명]

산초 라미레스가 직접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2세를 알현합니다. 그는 아라곤 왕국을 베드로의 소유로 봉헌하며 교황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기로 계약했습니다. 이 대담한 외교적 선택은 아라곤의 국제적 지위를 수직 상승시켰습니다.

국왕은 매년 일정량의 황금을 교황청에 상납하기로 약속하고 왕권의 신성함을 보장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아라곤은 주변의 강력한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라곤의 정복 활동은 교황이 승인한 성스러운 전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1076

[나바라와의 연합 왕국]

나바라 국왕의 암살 사건 이후 산초 라미레스가 나바라의 왕위까지 계승합니다. 아라곤과 나바라는 약 50여 년간 한 명의 국왕 아래 연합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 연합은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아라곤이 주도권을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나바라의 산초 4세가 형제들에 의해 살해되자 나바라 귀족들은 아라곤의 산초 라미레스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로써 아라곤은 서쪽의 위협을 제거하고 남쪽 이슬람 영토 정복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두 왕국의 결합은 아라곤 왕국이 이베리아 북동부의 맹주로 떠오르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1083

[그라우스 탈환 성공]

산초 라미레스가 선왕의 원수였던 그라우스를 마침내 정복합니다. 그는 치밀한 공성전 끝에 이슬람 수비대를 몰아내고 아라곤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이는 아라곤의 군사적 성장과 복수를 동시에 상징하는 승리였습니다.

그라우스는 에브로 강 유역으로 내려가기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었습니다.
승리 후 국왕은 이곳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 군대를 상주시켰습니다.
이 지역의 확보는 훗날 사라고사 정복을 위한 전초 기지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1089

[몬손 함락과 영토 확장]

아라곤군이 전략적 거점인 몬손을 점령하며 남진 정책의 교두보를 마련합니다. 이슬람 세력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얻어낸 값진 승리였습니다. 정복한 영토에는 아라곤 정착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며 실질적인 지배력을 강화합니다.

몬손은 에브로 강 분지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이 정복 활동은 산초 라미레스의 아들인 페드로 1세가 주도하며 실전 경험을 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정복은 왕국의 세수 증대와 기사 계급의 성장을 불러왔습니다.

1094

[산초 라미레스의 서거]

우에스카 공성전 도중 산초 라미레스 국왕이 화살에 맞아 서거합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아라곤의 영토 확장을 염원하며 후계자에게 정복 완수를 당부합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아라곤은 작은 산악 국가를 벗어나 강대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그는 우에스카 성벽을 살피던 중 적이 쏜 화살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임종 시 아들들에게 반드시 우에스카를 함락시킬 것을 맹세하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라곤은 유럽 정세의 주요한 행위자로 대우받기 시작했습니다.

1096

[알코라스 전투의 승리]

페드로 1세가 이슬람 구원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우에스카를 정복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성 조지(San Jorge)가 나타나 기독교군의 승리를 도왔다고 전해집니다. 이 승리로 아라곤 왕국은 수도를 산악 지역인 자카에서 평원인 우에스카로 옮길 준비를 마칩니다.

사라고사 왕국의 이슬람 군대와 그들을 돕던 카스티야군을 상대로 거둔 극적인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 이후 성 조지는 아라곤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우에스카의 함락은 아라곤이 더 이상 산맥에 갇힌 국가가 아님을 선포한 사건이었습니다.

1100

[바르바스트로 정복]

페드로 1세가 남부의 주요 도시 바르바스트로를 점령하며 영토를 넓힙니다. 그는 이슬람 세력의 반격을 물리치고 이 지역에 대한 확실한 통제권을 확보했습니다. 이는 사라고사로 향하는 길목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의미했습니다.

바르바스트로는 일찍이 십자군 원정의 목표가 되었던 상징적인 도시였습니다.
페드로 1세는 이곳을 정복한 후 교회와 주교좌를 복구하여 기독교 세계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이 정복으로 아라곤은 풍요로운 에브로 강 중류 지역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1104

[투사왕 알폰소의 즉위]

아라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꼽히는 알폰소 1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며 '투사왕(El Batallador)'이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그의 즉위와 함께 아라곤은 유례없는 영토 확장의 시대로 진입합니다.

페드로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형제인 알폰소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알폰소 1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열정도 매우 강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영토를 넓히는 것을 넘어 에브로 강 전역을 기독교화하는 것이었습니다.

1118

[사라고사 대탈환]

오랜 공성전 끝에 아라곤군이 이슬람 세력의 핵심 거점인 사라고사를 함락시킵니다. 이 사건은 이베리아반도 동부 레콩키스타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승리로 기록됩니다. 사라고사는 이후 수백 년간 아라곤 왕국의 찬란한 수도 역할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십자군을 결성하여 이룬 성과였습니다.
알폰소 1세는 항복한 이슬람 주민들에게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여 도시의 혼란을 방지했습니다.
사라고사 점령으로 아라곤은 에브로 강 유역의 풍요로운 농경지와 경제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1119

[투델라와 타라소나 점령]

사라고사 정복에 이어 알폰소 1세가 주변의 주요 도시들을 연달아 함락시킵니다. 투델라와 타라소나의 정복은 에브로 강 유역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라곤의 영토는 짧은 시간 안에 수 배로 팽창했습니다.

이 지역들은 이슬람의 중요한 농업 및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정복 직후 알폰소 1세는 정착민들에게 다양한 특권을 부여하며 인구 유입을 장려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라곤은 산악 지대의 한계를 벗어나 진정한 평원 국가로 변모했습니다.

1120

[쿠탄다 전투의 압승]

알폰소 1세가 사라고사를 되찾으려는 알모라비드 왕조의 대군을 격파합니다. 이 승리로 아라곤의 사라고사 지배는 확고해졌으며 이슬람 세력은 북쪽으로의 반격 의지를 상실합니다. 아라곤의 군사적 명성이 유럽 전역에 떨쳐진 순간이었습니다.

이슬람 연합군은 사라고사를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으나 알폰소의 기습적인 전략에 무너졌습니다.
전투 결과 수많은 이슬람 장군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막대한 전리품이 아라곤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이후 아라곤은 테루엘 방면으로 세력을 더욱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125

[안달루시아 원정]

알폰소 1세가 이슬람 영토 깊숙이 안달루시아까지 대담한 원정을 감행합니다. 비록 영토 점령이 목적은 아니었으나, 수천 명의 기독교인(모사라베)을 아라곤으로 데려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이베리아 남부 이슬람 세력에게 커다란 심리적 타격을 주었습니다.

알폰소 1세는 말라가와 그라나다 인근까지 진격하며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했습니다.
이 원정으로 데려온 수만 명의 기독교인들은 새로 정복한 에브로 강 유역에 정착했습니다.
이들의 이주는 아라곤의 농업 생산력과 인구 구성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134

[프라가 전투의 참패]

무적을 자랑하던 알폰소 1세가 프라가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합니다. 이 전투에서 국왕은 큰 부상을 입었으며 많은 아라곤 기사들이 전사했습니다.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던 아라곤에 급제동이 걸린 사건이었습니다.

알폰소 1세는 소수의 병력으로 적진을 무리하게 돌파하다가 포위되었습니다.
비록 국왕은 탈출에 성공했으나 심리적인 충격과 부상으로 인해 급격히 쇠약해졌습니다.
이 패배는 아라곤 왕국이 내부 정비와 후계 문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복왕의 죽음과 위기]

알폰소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국은 유례없는 정치적 혼란에 빠집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기사 수도회들에 물려준다는 파격적인 유언을 남겨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삽니다. 왕위 계승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나바라와의 연합도 깨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프라가 전투의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한 알폰소 1세는 세속적인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성묘 기사단, 성전 기사단 등에 영토를 분할한다는 유언은 아라곤 귀족들에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 아라곤은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최악의 정통성 위기를 겪었습니다.

[수도사 왕 라미로 2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알폰소의 동생이자 수도사였던 라미로 2세가 강제로 환속하여 즉위합니다. 그는 왕가의 혈통을 잇기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교회의 반대와 귀족들의 내분 속에서 그는 오직 후계 생산이라는 임무에 집중합니다.

라미로 2세는 즉위 전까지 조용한 수도 생활을 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귀족 부인과 정략결혼을 하여 외동딸 페트로니야를 낳았습니다.
'수도사 왕'이라는 별명처럼 그는 세속의 권력보다는 왕실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1136

[페트로니야 여왕의 탄생]

아라곤 왕실의 유일한 희망인 페트로니야 공주가 태어납니다. 그녀의 탄생으로 바르셀로나 왕조의 혈통이 끊길 위기를 간신히 넘기게 되었습니다. 라미로 2세는 딸의 탄생 직후부터 왕국을 보호할 강력한 사윗감을 찾기 시작합니다.

페트로니야는 태어나자마자 아라곤 왕위의 법적 상속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녀의 탄생은 아라곤 귀족들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제 아라곤의 운명은 어린 공주가 누구와 혼인하느냐에 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1137

[아라곤 연합 왕국의 탄생]

어린 페트로니야 여왕과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의 약혼으로 거대한 연합 왕국이 형성됩니다. 이로써 아라곤의 왕권과 카탈루냐의 해양 상업 세력이 하나로 묶이게 됩니다. 아라곤은 이를 통해 지중해로 나아가는 넓은 통로를 확보합니다.

라미로 2세는 딸의 약혼과 동시에 통치권을 사위에게 넘기고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결합은 아라곤 왕국과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대등한 연합인 '아라곤 연합 왕관'의 시작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법과 관습을 유지하면서 국왕만을 공유하는 독특한 정치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1150

[역사적인 왕실 결혼식]

페트로니야와 라몬 베렝게르 4세의 정식 결혼식이 거행되며 양국의 통합이 완성됩니다. 두 세력의 결합은 이베리아반도 동부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아라곤은 내륙의 강자에서 해양 제국으로 변모할 준비를 마칩니다.

결혼식은 예이다(Lleida)에서 성대하게 열렸으며 두 지역 귀족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아라곤의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실질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 결혼은 훗날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는 아라곤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한 사건이었습니다.

1162

[알폰소 2세의 공동 통치]

아라곤 왕위와 바르셀로나 백작위를 동시에 물려받은 첫 번째 국왕 알폰소 2세가 즉위합니다. 그는 두 지역의 갈등을 조율하며 연합 왕국의 기틀을 공고히 다집니다. 그는 정복 활동뿐만 아니라 시와 예술을 사랑한 군주로도 기억됩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는 '알폰소 1세'로, 아라곤에서는 '알폰소 2세'로 불렸습니다.
프로방스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며 피레네 남북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세력권을 형성했습니다.
그의 치세 동안 아라곤 연합 왕국의 행정 체계가 체계화되고 공용 문서의 기록이 활발해졌습니다.

1164

[페트로니야의 공식 양위]

페트로니야 여왕이 자신의 아들인 알폰소 2세에게 아라곤 왕위를 공식적으로 넘겨줍니다. 이를 통해 아라곤과 카탈루냐는 법적으로 하나의 군주 아래 완전히 결속되었습니다. 바르셀로나 가문이 아라곤의 정통 왕조로 확립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양위 절차는 바르셀로나에서 정식 문서화되어 공표되었습니다.
이후 아라곤 왕실은 카스티야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페트로니야는 양위 후 조용한 말년을 보내며 왕실의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171

[테루엘의 정복과 건설]

알폰소 2세가 남부의 요충지 테루엘을 점령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합니다. 테루엘은 이슬람 영토를 압박하기 위한 최전방 요새이자 전략적 신도시로 기능합니다. 이곳은 훗날 독특한 무데하르 양식의 건축 문화가 꽃피는 중심지가 됩니다.

전설에 따르면 하늘의 황소와 별의 인도를 받아 도시의 터를 잡았다고 전해집니다.
국왕은 테루엘에 정착하는 이들에게 파격적인 특권과 자유를 부여하는 '푸에로'를 수여했습니다.
테루엘 건설은 아라곤이 발렌시아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1179

[카솔라 조약 체결]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미래의 정복지를 미리 나누는 카솔라 조약에 합의합니다. 양국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후 차지할 영토 경계선을 명확히 하여 내전을 예방했습니다. 아라곤은 이 조약을 통해 발렌시아에 대한 우선 점유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알폰소 2세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가 직접 만나 체결한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이 조약은 아라곤이 이베리아 반도 남동쪽으로 확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양국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레콩키스타라는 공동의 목표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1196

[카톨릭 왕 페드로 2세]

신앙심이 깊었던 페드로 2세가 즉위하며 교황권과의 유대를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그는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을 결집시켜 이슬람 세력에 맞서는 공동 전선을 구축합니다. 그의 용맹함은 장차 거대한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끄는 동력이 됩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직접 왕관을 수여받은 최초의 아라곤 국왕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톨릭 왕(El Católico)'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왕권의 종교적 권위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 말기에는 프랑스 남부의 알비 십자군 문제로 정치적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1204

[로마에서의 대관식]

페드로 2세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에 의해 공식적인 대관식을 치릅니다. 그는 아라곤 왕국이 교황의 영원한 봉신임을 다시 한번 맹세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라곤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국제적으로 공포한 의례였습니다.

대관식은 유례없이 화려하게 치러졌으며 유럽 각국의 사절단이 참석했습니다.
페드로 2세는 교황의 지지를 바탕으로 피레네 북쪽의 영토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이후 아라곤은 프랑스 남부의 영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212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아라곤의 페드로 2세가 카스티야, 나바라와 연합하여 무와히드 왕조의 대군을 격파합니다. 이 승리는 레콩키스타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받으며 이슬람 세력의 몰락을 가속화합니다. 아라곤 군대는 이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용맹을 떨칩니다.

이베리아 기독교 연합군이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총력전의 승리였습니다.
페드로 2세는 직접 최전방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이 전투 이후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은 더 이상 기독교 왕국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1213

[정복왕 하이메 1세의 즉위]

아라곤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통치하며 황금기를 이끈 하이메 1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합니다. 그는 내란을 수습하고 귀족들의 권력을 통제하며 강력한 전제 군주로 성장합니다. '정복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는 불가능해 보이던 영토 확장을 현실로 만듭니다.

부왕의 전사로 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성전 기사단의 보호 아래 성장했습니다.
성인이 된 후 그는 분열된 귀족들을 제압하고 왕국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의 치세는 아라곤이 지중해의 강자로 우뚝 서는 영광의 시대였습니다.

[뮈레 전투와 국왕의 최후]

프랑스 남부의 영토권을 지키려던 페드로 2세가 뮈레 전투에서 불의의 사고로 전사합니다. 이 패배로 아라곤은 피레네 산맥 북쪽의 방대한 영토와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됩니다. 이제 아라곤의 시선은 북쪽이 아닌 남쪽과 바다로 강제적으로 고정됩니다.

알비 십자군에 맞서 자신의 봉신들을 보호하려다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했습니다.
국왕의 전사는 아라곤 왕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어린 아들 하이메 1세가 왕위를 잇게 됩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라곤의 확장 방향은 지중해 해상 제국 건설로 급선회하게 됩니다.

1229

[마요르카 섬의 정복]

하이메 1세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마요르카 섬을 함락시킵니다. 이로써 아라곤은 지중해 해상 무역의 핵심 거점을 확보하고 해상 제국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섬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키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카탈루냐 상인들과 아라곤 귀족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해상 원정이었습니다.
마요르카 정복은 아라곤이 해군력을 대외적으로 과시한 첫 번째 대규모 성과였습니다.
이후 마요르카는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아라곤 상선들의 안전한 항구가 되었습니다.

1238

[발렌시아 왕국 탈환]

치밀한 포위 작전 끝에 하이메 1세가 풍요로운 도시 발렌시아를 손에 넣습니다. 그는 발렌시아를 단순히 아라곤의 일부가 아닌 독자적인 왕국으로 선포하여 다스립니다. 이로써 아라곤 연합 왕국은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라는 세 축을 완성합니다.

발렌시아 함락은 이슬람 세력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거대한 승리였습니다.
하이메 1세는 발렌시아 고유의 법전인 '포르스(Furs)'를 제정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비옥한 발렌시아 평야는 왕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1244

[알미스라 조약의 체결]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영토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정복 한계선을 설정하는 조약을 체결합니다. 하이메 1세와 그의 사위인 알폰소 10세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국경을 명확히 확정합니다. 이 조약으로 아라곤의 이베리아 내 영토 확장은 사실상 마무리됩니다.

두 왕국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남부 지역의 점령 예정지를 미리 나누었습니다.
아라곤은 무르시아 지역을 카스티야에 양보하는 대신 자국의 이권을 보호받았습니다.
이 조약 이후 아라곤은 시선을 완전히 지중해 너머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돌리게 됩니다.

1276

[대왕 페드로 3세의 즉위]

하이메 1세의 아들 페드로 3세가 즉위하며 아라곤의 지중해 팽창이 가속화됩니다. 그는 용맹하고 야심만만한 군주로서 유럽 정세의 중심부로 뛰어듭니다. 그의 치세에 아라곤은 이탈리아 정세에 깊숙이 개입하며 진정한 해양 제국으로 거듭납니다.

그는 시칠리아 국왕의 딸과 혼인하여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명분을 확보해 두었습니다.
페드로 3세는 뛰어난 외교술과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주변 강대국들을 압도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아라곤 연합 왕국이 지중해의 최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1282

[시칠리아 만종 사건]

시칠리아인들이 프랑스의 앙주 가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페드로 3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합니다. 아라곤군은 지중해의 심장인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프랑스 세력을 몰아냅니다. 이 사건은 아라곤이 지중해의 무역과 군사권을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부활절 월요일 저녁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된 반란은 시칠리아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팔레르모에 입성했습니다.
프랑스와 교황청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아라곤은 시칠리아를 지켜내며 제국의 위상을 굳혔습니다.

1283

[특권 헌장의 수여]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귀족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페드로 3세가 왕권을 제약하는 헌장을 승인합니다. 이른바 '유니온의 특권'으로 불리는 이 문서는 아라곤 특유의 의회 민주주의 기틀이 됩니다. 왕은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원칙이 명문화됩니다.

귀족들은 국왕의 독단을 막기 위해 매년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국왕은 법률을 개정하거나 세금을 부과할 때 반드시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이 제도는 '법에 의한 통치'라는 아라곤의 전통을 확립하며 훗날 근대 입헌주의의 선구적 모델이 되었습니다.

1285

[알폰소 3세의 즉위]

페드로 3세의 사후 알폰소 3세가 왕위를 이어받아 복잡한 국제 정세를 수습합니다. 그는 부왕이 벌여놓은 시칠리아 전쟁의 여파를 감당하며 내부적인 안정을 꾀합니다. 비록 짧은 통치 기간이었으나 아라곤의 영토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는 마요르카 왕국을 다시 아라곤 연합 왕국으로 편입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귀족 연합인 '유니온'과의 갈등 속에서도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형제인 하이메 2세가 즉위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287

[유니온의 특권 인가]

알폰소 3세가 귀족 연합의 압력에 굴복하여 국왕의 권력을 더욱 제약하는 문서에 서명합니다. 이는 아라곤 국왕이 귀족들의 동의 없이는 처벌이나 세금 징수를 할 수 없게 함을 의미했습니다. 아라곤의 귀족권이 왕권과 팽팽한 균형을 이루게 된 시기입니다.

귀족들은 국왕이 조약을 위반할 경우 저항할 권리까지 인정받았습니다.
이 문서는 아라곤 특유의 '계약주의적 군주제'를 상징하는 핵심 유산이 되었습니다.
왕은 절대적인 지배자가 아닌, 법과 계약을 준수하는 제1의 귀족으로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1291

[공정왕 하이메 2세]

하이메 2세가 즉위하며 아라곤은 외교적 안정과 내실을 다지는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는 교황청과의 타협을 통해 시칠리아 분쟁을 일단락 짓고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습니다. 그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통치는 왕국에 번영을 가져다줍니다.

아나니 조약을 통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실리를 챙겼습니다.
그는 행정과 법집행의 투명성을 높여 '공정왕(El Justo)'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이메 2세의 치세에 아라곤의 상업망은 지중해 전역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1319

[왕국의 불가분성 선언]

하이메 2세가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 왕국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법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연합 왕국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후대 국왕들이 영토를 분할 상속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라곤 연합 왕국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이 법적으로 완성됩니다.

이 선언은 왕국 간의 통합을 강화하고 대외적인 협상력을 높였습니다.
각 지역의 독자적인 법전과 의회는 존중하되 국왕 아래 하나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아라곤이 거대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정치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323

[사르데냐 원정 시작]

하이메 2세가 지중해의 또 다른 전략 요충지인 사르데냐를 정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합니다. 피사 공화국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아라곤은 섬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아라곤은 서지중해의 해상 무역로를 완벽하게 장악하게 됩니다.

아들인 알폰소가 이끄는 원정군은 사르데냐의 주요 항구들을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사르데냐의 정복은 아라곤 상인들에게 동방 무역으로 향하는 안전한 징검다리를 제공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사르데냐는 아라곤의 중요한 식량 및 자원 공급원이 되었습니다.

1327

[알폰소 4세의 시대]

자애로운 성품의 알폰소 4세가 즉위하여 하이메 2세의 유업을 잇습니다. 그는 사르데냐 정복 사업을 완수하고 지중해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주력합니다. 하지만 왕실 내부의 가족 갈등이 시작되면서 평온했던 왕국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르데냐를 완전히 평정하여 아라곤의 경제적 영토를 넓혔습니다.
두 번째 부인인 엘레오노르와 전처 자식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의 치세는 평화로웠으나 다가올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함이 공존했던 시기였습니다.

1336

[의례왕 페드로 4세]

아라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위와 치밀한 행정력을 보여준 페드로 4세가 즉위합니다. 그는 궁정의 의례를 정비하고 기록물을 보존하는 데 집착하여 '의례왕'이라 불립니다. 그는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 연합을 철저히 궤멸시키며 절대 왕정의 기틀을 닦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세를 기록한 연대기를 직접 작성할 정도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왕권을 제약하던 귀족들의 '유니온'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그들의 특권을 폐지했습니다.
페드로 4세는 아라곤의 관료제를 정비하여 현대적인 국가 시스템의 초기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1344

[마요르카의 완전 통합]

페드로 4세가 방계 가문이 다스리던 마요르카 왕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아라곤 왕관에 영구 귀속시킵니다. 이로써 분열되었던 아라곤의 영토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중해 전역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마요르카의 하이메 3세는 저항했으나 아라곤의 압도적인 해군력에 패배했습니다.
페드로 4세는 마요르카의 독자적인 왕위를 폐지하고 아라곤 국왕의 직접 통치 아래 두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라곤 연합 왕국의 내부 결속력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348

[흑사병의 창궐]

전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 아라곤 왕국에도 상륙하여 인구의 상당수를 앗아갑니다. 노동력 부족으로 농경지가 황폐해지고 경제 체계가 큰 타격을 입습니다. 이 거대한 비극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며 농민들의 지위 변화와 신분 질서의 균열을 초래합니다.

왕실 가족 중에서도 페드로 4세의 왕비가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 영주들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농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라곤은 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상업 전략과 행정 개편에 착수해야 했습니다.

[에필라 전투의 승리]

페드로 4세가 반란을 일으킨 귀족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그는 승리 후 귀족들의 특권 문서를 칼로 찢어버리며 왕의 우위를 선언합니다. 이 사건으로 아라곤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귀족들의 분란이 종식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집니다.

국왕은 귀족들의 '유니온'이 자신을 협박하던 문서를 파기하며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했습니다.
주동자들을 엄히 처벌하고 왕실 직속 관료들을 지방에 파견하여 통제력을 높였습니다.
에필라 전투는 아라곤이 중세적 봉건 국가에서 근대적 주권 국가로 넘어가는 변곡점이었습니다.

1356

[두 페드로의 전쟁]

아라곤의 페드로 4세와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 사이의 대규모 전쟁이 발발합니다. 두 국왕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여진 이 전쟁은 십 년 넘게 지속되며 두 나라를 지치게 만듭니다. 영토와 자존심을 건 이 싸움은 이베리아반도의 주도권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은 국경 분쟁과 사소한 외교적 마찰이 쌓여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아라곤은 카스티야의 강력한 육군에 맞서 해군력과 견고한 요새 방어로 대응했습니다.
결국 카스티야 내부의 내전으로 전쟁의 흐름이 바뀌며 아라곤은 자국의 영토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1387

[우아한 왕 후안 1세]

예술과 학문을 지극히 사랑했던 후안 1세가 즉위합니다. 그는 정사보다는 사냥과 축제, 음악에 몰두하여 왕국의 행정이 다소 소홀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치세에 아라곤은 문화적으로 세련된 궁정 문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그는 프랑스 궁정 문화를 동경하여 아라곤 궁정을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그의 별명인 '우아한 왕(El Amador de la Gentileza)'은 그의 사치스러운 취향을 반영합니다.
통치 말기에는 국가 재정 악화와 관리들의 부패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1396

[인도주의 왕 마르틴]

후안 1세의 동생 마르틴이 즉위하여 왕국의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는 독실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갈등을 중재하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후계자였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아라곤 왕실은 혈통 단절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는 시칠리아 국왕이었던 아들이 죽자 직접 시칠리아를 통치하며 통합을 유지했습니다.
마르틴은 왕실의 소장품을 정리하고 도서관을 세우는 등 문화적 유산 보존에 힘썼습니다.
그의 사후 아라곤은 2년간 왕이 없는 공백기인 '인터레그눔'을 겪게 됩니다.

1410

[바르셀로나 왕조의 종말]

마르틴 국왕이 후계자 없이 서거하면서 수백 년간 아라곤을 다스려온 바르셀로나 가문의 혈통이 끊깁니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여러 후보들이 등장하며 왕국은 분열의 조짐을 보입니다. 아라곤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대한 정치적 협상이 시작됩니다.

왕실 혈통의 단절은 연합 왕국 구성국들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을 불러왔습니다.
카탈루냐, 아라곤, 발렌시아의 대표들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이 시기는 아라곤 역사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았던 외교적 공백기였습니다.

1412

[카스페의 타협]

각계 대표 9명이 모여 투표를 통해 카스티야 왕실 출신의 페르난도 1세를 새 국왕으로 선출합니다. 이 역사적인 평화적 합의로 아라곤에는 카스티야 계열의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이 사건은 훗날 두 왕국이 하나로 통합되는 먼 서막이 됩니다.

무력 충돌 없이 토론과 투표로 국왕을 선출한 것은 당시 중세 유럽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페르난도 1세는 카스티야의 섭정으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이 타협은 아라곤 연합 왕국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함을 보여주었습니다.

1416

[관대왕 알폰소 5세]

위대한 정복자이자 르네상스 군주인 알폰소 5세가 즉위합니다. 그는 아라곤 본토보다 이탈리아 정세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지중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합니다. 그의 치세에 아라곤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럽의 중심 무대로 확고히 자리 잡습니다.

그는 나폴리 왕국 정복에 생애 대부분을 바쳤으며 나폴리에 상주하며 궁정을 운영했습니다.
고전 문헌 수집과 학자 후원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그의 별명인 '관대왕(El Magnánimo)'은 그의 통 큰 후원과 대범한 성격을 나타냅니다.

1442

[나폴리 왕국 정복 완수]

알폰소 5세가 오랜 전쟁 끝에 나폴리를 함락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로써 아라곤 연합 왕국은 서부 지중해 전체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 제국을 완성합니다. 나폴리는 아라곤 문화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나는 교차로가 됩니다.

나폴리 입성은 아라곤의 국력이 정점에 달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알폰소 5세는 나폴리를 지중해 제국의 수도처럼 꾸미고 화려한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이 정복으로 아라곤 상인들은 이탈리아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습니다.

1458

[후안 2세와 내전의 전조]

알폰소 5세의 동생 후안 2세가 즉위하지만 왕실 내 갈등으로 큰 시련을 겪습니다. 그는 아들인 카를로스와 왕위 계승 및 통치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합니다. 이 부자간의 싸움은 결국 카탈루냐 전역을 뒤흔드는 참혹한 내전으로 번지게 됩니다.

후안 2세는 이미 나바라의 국왕이었으며 아라곤의 왕위까지 차지하며 권력욕을 보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지지하는 카탈루냐 귀족들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이 갈등은 아라곤 연합 왕국 내부의 고질적인 지역적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462

[카탈루냐 내전의 발발]

후안 2세의 권위주의에 반대한 카탈루냐 세력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며 10년간의 내전이 시작됩니다. 왕국은 극심한 파괴와 경제적 쇠퇴를 겪으며 큰 위기에 빠집니다. 후안 2세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카스티야와의 동맹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됩니다.

내전 동안 카탈루냐 상공업은 붕괴 위기에 처했고 수많은 성들이 파괴되었습니다.
후안 2세는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와 카스티야 사이에서 위태로운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 내전의 고통은 훗날 스페인 통합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배경이 됩니다.

1469

[역사적인 세기의 결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 운명적인 만남은 이베리아반도의 두 강대국이 하나로 합쳐지는 거대한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스페인이라는 단일 강대국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기록됩니다.

두 사람은 카스티야 귀족들의 방해를 피해 평민으로 변장하고 만나 결혼을 성사시켰습니다.
이 결혼은 아라곤의 외교적 고립을 해소하고 카스티야의 혼란을 수습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가톨릭 양왕'으로 불리게 될 두 군주는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위대한 업적들을 남깁니다.

1479

[페르난도 2세의 즉위]

후안 2세의 서거로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의 국왕으로 즉위하며 카스티야와의 공동 통치가 본격화됩니다. 각 왕국은 고유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외교와 군사는 통합하여 강력한 국력을 발휘합니다. 이제 아라곤의 역사는 스페인 전체의 역사와 하나로 묶여 흐르기 시작합니다.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의 군주'이자 '카스티야의 왕'으로서 두 나라의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아라곤 특유의 자치권을 존중하면서도 효율적인 중앙 관료제를 이식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국으로 부상했습니다.

1492

[레콩키스타의 완수]

아라곤과 카스티야 연합군이 이슬람의 마지막 보루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킵니다. 800년에 걸친 국토 회복 운동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페르난도 2세의 군사적 지원과 전략은 이 최후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라나다 함락으로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정치 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습니다.
승리 후 양왕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을 승인하며 세계사의 시야를 넓혔습니다.
이 성과는 스페인이 세계적인 제국으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1516

[합스부르크 왕조의 등장]

페르난도 2세의 외손자인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며 아라곤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아라곤은 이제 신성 로마 제국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제국의 일부가 되어 거대한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왕국의 자치권과 거대 제국의 통치 사이에서 긴장이 시작됩니다.

카를로스 1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 독일 영토를 모두 상속받아 '카를 5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라곤의 전통적인 '푸에로'를 존중할 것을 서약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카스티야 중심의 통치를 지향했습니다.
이 시기 아라곤은 제국의 중심부에서 점차 변두리로 밀려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1591

[아라곤의 소요 사건]

국왕 펠리페 2세의 권위에 도전한 안토니오 페레스 사건을 계기로 아라곤에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납니다. 국왕은 군대를 파견하여 아라곤의 자치권을 상징하던 법무관을 처형하며 강력히 응징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라곤의 전통적인 자치권은 크게 위축되는 시련을 겪습니다.

안토니오 페레스는 국왕의 비서였으나 죄를 짓고 아라곤의 특권법 뒤로 숨으려 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종교 재판소를 동원하여 아라곤의 사법 체계를 무력화했습니다.
이후 아라곤 의회의 권한은 축소되었고 왕권의 직접적인 개입이 강화되었습니다.

170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카를로스 2세의 사후 스페인 왕위를 두고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충돌합니다. 아라곤은 자신들의 전통적 권리를 보장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오스트리아 측을 지지합니다. 이 선택은 아라곤 왕국의 운명을 가르는 최후의 도박이 됩니다.

아라곤 귀족들과 시민들은 프랑스식 중앙집권주의를 경계하여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을 옹립했습니다.
전쟁은 전 유럽이 가담한 거대한 국제전으로 번지며 이베리아반도를 황폐화시켰습니다.
아라곤은 자국의 생존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1707

[알만사 전투의 참패]

아라곤이 지지했던 합스부르크 연합군이 알만사에서 부르봉 왕가의 군대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이 패배로 아라곤의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국왕 펠리페 5세의 군대가 아라곤 전역으로 진격합니다. 왕국의 종말을 알리는 비극적인 서곡이었습니다.

전투의 결과로 아라곤과 발렌시아는 승리자의 자비에 맡겨진 처지가 되었습니다.
펠리페 5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아라곤 지역에 엄중한 보복을 다짐했습니다.
이 전투는 아라곤이 수백 년간 유지해온 독립적 지위를 상실하게 만든 결정적 패배였습니다.

[누에바 플란타 칙령]

승리한 펠리페 5세가 아라곤의 모든 자치권과 고유 법전을 폐지하고 카스티야의 법을 따르도록 명령합니다. 이로써 700년 가깝게 유지되어 온 독립된 정치 실체로서의 아라곤 왕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합니다. 아라곤은 이제 스페인이라는 단일 국가의 행정 구역이 됩니다.

국왕은 아라곤이 자신에게 대항한 죄를 물어 자치권을 박탈하고 중앙집권화를 단행했습니다.
아라곤 의회는 해산되었고 모든 행정 언어는 카스티야어로 통일되었습니다.
비록 정치적 국가는 사라졌으나 아라곤의 문화와 역사적 정체성은 오늘날까지 자치주의 형태로 살아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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