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타 제국
고대 제국, 인도 왕조, 황금기
최근 수정 시각 : 2025-10-30- 13:43:39
• 4세기 초부터 6세기 중반까지 고대 인도를 지배한 제국. •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며 '인도의 황금기'로 불리는 전성기를 맞이함. • 찬드라굽타 1세, 사무드라굽타, 찬드라굽타 2세 등의 걸출한 군주들이 제국을 번영시킴. •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며 예술, 문학, 과학 분야에서 위대한 문화적 발전을 이룸. • 특히 수학, 천문학, 의학, 야금술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둠. • 5세기 후반부터 중앙아시아 훈족의 침략과 내부 봉건 세력의 부상으로 점차 쇠퇴하여 6세기 중반에 멸망함. • 고전 인도 문명의 정점을 찍으며 후대 인도 및 동남아시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제국.
본 문서는 위키백과 굽타 제국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240
서기 240년부터 280년까지 굽타 왕조의 초대 군주였던 스리굽타는 대왕(마하라자) 칭호를 사용하며 왕조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할 굽타 왕조의 기반을 다진 사건입니다.
280
스리굽타의 뒤를 이어 가토트카차굽타는 280년부터 319년까지 왕조를 통치했습니다. 그 역시 '마하라자(대왕)' 칭호를 사용했지만, 그의 아들 찬드라굽타 1세보다는 낮은 지위로 여겨집니다.
319
[굽타 제국 위상 확립]
찬드라굽타 1세가 왕위에 올라 '대왕중왕(마하라자디라자)' 칭호를 사용하며 굽타 왕조를 제국으로 격상했습니다. 리차비 공주와의 결혼은 그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가토트카차의 아들인 찬드라굽타 1세는 319년부터 335년까지 통치하며 '대왕중왕(마하라자디라자)'이라는 황실 칭호를 채택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대왕이 아닌 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한 것으로, 리차비 공주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을 통해 정치적 권력과 지배권을 크게 확장하여 굽타 제국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습니다.
335
[사무드라굽타의 대정복]
사무드라굽타가 왕위를 계승하여 북인도 대부분과 남인도 해안까지 광범위한 정복 활동을 벌이며 굽타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했습니다.
찬드라굽타 1세의 뒤를 이어 사무드라굽타는 335년 또는 350년경부터 375년까지 통치하며 제국을 전성기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나가족과 아리아바르타의 8왕을 물리치고, 인도 중부의 삼림 지역 왕들을 정복했으며, 닥쉬나파타의 12명 통치자를 패배시켰습니다. 심지어 남쪽 팔라바 왕국까지 진출하며 굽타 제국의 영향력을 인도 아대륙 전체로 넓혔습니다. 또한 주권을 증명하는 아슈바메다 의식을 거행하고 '시인왕'으로 불릴 만큼 문화적인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350
[세계 최초 설탕 결정화]
굽타 제국에서 세계 최초로 설탕을 결정화하는 방법을 확립하여 다양한 무역로를 통해 타 지역으로 전파했습니다. 이는 중요한 경제적, 기술적 혁신이었습니다.
굽타 제국은 서기 350년경 세계 최초로 설탕을 결정화하는 방법을 확립했습니다. 이 기술은 다양한 무역로를 통해 인도양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아랍, 동로마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중국 등지로 전파되었으며, 굽타 제국의 경제적 번영에 기여했습니다.
[카차왕 동전 발견]
굽타 통치자 카차가 발행한 동전이 발견되어 그의 존재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사무드라굽타의 별명이라는 설과 왕좌 경쟁자라는 설이 있습니다.
4세기 중반, 굽타 통치자 카차의 동전이 발견되면서 그의 존재에 대한 학자들 간의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카차가 사무드라굽타의 별명이라는 이론과 왕좌에 대한 경쟁 주장자였다는 이론이 공존하며, 그의 정확한 통치 시기와 역할은 불확실합니다.
375
[라마굽타의 비극적 통치]
문학 작품에 따르면 라마굽타가 사무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 2세 사이를 통치했으나, 사카족과의 전쟁에서 아내를 넘기려다 찬드라굽타 2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비문과 동전으로 확인됩니다.
6세기 산스크리트 연극 '데비-찬드라굽탐'에 따르면 라마굽타는 사무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 2세 사이인 375년부터 380년까지 굽타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사카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위기에 처하자 아내 드루바데비를 넘기는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고, 이에 분노한 찬드라굽타 2세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의 존재 자체는 비문과 구리 동전으로 확인됩니다.
[인도의 황금기 도래]
찬드라굽타 2세가 즉위하여 제국의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하고, 그의 통치 시기는 '인도의 황금기'라 불릴 만큼 힌두교 예술, 문학, 문화, 과학 전반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375년부터 415년까지 통치한 찬드라굽타 2세는 서사트라프를 물리치고 서쪽 영토를 확장하며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치세는 힌두교 예술, 문학, 문화 및 과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기로 기억됩니다. 칼리다사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궁정에서 활동했으며, 중국 승려 법현의 기록을 통해 당시 굽타 제국의 번영과 온화한 통치, 풍요로운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395
[찬드라굽타 2세, 영토 확장 완성]
찬드라굽타 2세가 그의 주요 적대자인 루드라심하 3세에게 승리하고 벵골 토후를 물리쳤습니다. 이로써 그의 통제권이 해안에서 해안으로 확장되었습니다.
395년에 찬드라굽타 2세는 그의 주요 적대자였던 루드라심하 3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벵골 토후를 물리쳤습니다. 이 승리를 통해 굽타 제국의 통제권은 인도의 서쪽 해안에서 동쪽 해안까지 확장되었으며, 우자인에 두 번째 수도를 세우며 제국의 전성기를 공고히 했습니다.
399
[법현의 인도 순례 시작]
중국 동진의 불교 승려 법현이 굽타 제국을 방문하기 위해 인도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당시 굽타 사회의 번영과 온화한 통치를 상세히 보여줍니다.
동진의 학자이자 여행가인 법현은 399년에 중국을 출발하여 405년에 인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411년까지 인도에 머물면서 마투라, 카나우지, 카필라바스투 등 여러 성지를 순례하며 굽타 제국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그의 일기 '불국기'는 굽타 시대의 평화롭고 번성했던 사회상을 기록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415
[날란다 대학 설립]
쿠마라굽타 1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날란다 대학을 설립하여 굽타 시대의 학문적 발전과 교육 후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찬드라굽타 2세의 뒤를 이은 쿠마라굽타 1세는 415년부터 455년까지 통치하며 날란다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날란다 대학은 굽타 시대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상징하는 중요한 교육기관으로, 굽타 제국의 문화적 황금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그의 통치 말기에는 푸시야미트라족과 키다라족의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455
[훈족 침략과 쇠퇴의 서막]
스칸다굽타가 훈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제국의 자원이 고갈되고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쿠마라굽타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스칸다굽타는 455년부터 467년까지 통치하며 푸시야미트라족의 위협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서기 455년경 침입한 훈족의 공격을 격퇴하며 '마지막 굽타 명군'으로 불렸으나,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자원 소모는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했습니다. 훈족은 굽타 제국의 서쪽 부분을 차지하며 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467
스칸다굽타가 467년에 사망한 후, 그의 형제인 푸루굽타가 제위를 계승하여 473년까지 통치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제국의 쇠퇴가 가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473
쿠마라굽타 2세는 473년부터 476년까지 굽타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이 시기는 제국의 권위가 점차 약화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476
부다굽타는 476년부터 495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는 카나우지 통치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북부 인도의 비옥한 평야에서 알촌 훈족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는 굽타 제국이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여 방어에 힘쓰던 때였습니다.
480
[알춘 훈족의 침략 본격화]
토라마나와 미히라쿨라 휘하의 알춘 훈족이 북서쪽 굽타 방어선을 돌파하고, 500년까지 제국 대부분의 북서부 지역을 점령하여 굽타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480년대에 토라마나와 미히라쿨라가 이끄는 알춘 훈족이 굽타 제국의 북서쪽 방어선을 돌파하며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500년까지 제국의 북서부 대부분이 훈족에게 점령당했고, 이는 굽타 제국의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495
[나라심하굽타의 통치와 불교 후원]
나라심하굽타가 왕위에 올라 훈족에 대항하는 한편, 대승불교를 장려하고 날란다에 승원을 건설하는 등 불교 문화에 기여했습니다.
나라심하굽타는 495년부터 530년까지 통치하며 약화된 제국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비록 힘이 약해졌지만 훈족에 저항했으며, 대승불교 철학자 바수반두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장려했습니다. 날란다에 상가라마를 짓고 불상을 안치한 비하라를 건설하는 등 불교 문화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510
[훈족 토라마나 패배]
훈족 침략자 토라마나가 바누굽타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는 굽타 제국이 약화되었음에도 훈족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음을 보여줍니다.
훈족 침략자 토라마나는 510년에 굽타 황제 바누굽타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는 굽타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훈족의 침략에 맞서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528
훈족은 528년에 말와의 야소다르만 왕과 굽타 황제 나라심하굽타에 의해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인도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승리는 훈족의 직접적인 위협을 제거했지만, 제국의 재정적, 사회적 기반은 이미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530
쿠마라굽타 3세는 530년부터 540년까지 통치했습니다. 이 시기는 제국이 훈족의 침략과 내부 혼란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던 말기였습니다.
540
비슈누굽타는 540년부터 550년까지 굽타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어 힘을 잃었으며, 결국 제국의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542
[굽타 제국의 마지막 비문]
비슈누굽타의 치세에 코티바르샤 지역에 토지를 하사하는 다모다푸르 동판 비문이 제작되었습니다. 이는 굽타 제국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비문입니다.
542/543년에 비슈누굽타 황제의 치세에 코티바르샤(서벵골의 반가르) 지역에 토지를 하사하는 내용의 다모다푸르 동판 비문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비문은 굽타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기 직전의 마지막 기록 중 하나로, 제국의 쇠퇴를 보여줍니다.
550
[굽타 제국의 종말]
훈족의 거듭된 침략과 내부 봉건 세력의 부상으로 약화된 굽타 제국은 결국 550년에 완전히 멸망하며 고대 인도의 황금기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스칸다굽타 사후 굽타 제국은 푸루굽타, 쿠마라굽타 2세, 부다굽타, 나라심하굽타, 쿠마라굽타 3세, 비슈누굽타로 이어지며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480년대 알춘 훈족이 북서쪽 방어선을 돌파하고 500년까지 제국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비록 훈족이 528년에 인도에서 쫓겨났지만, 이미 약화된 제국은 회복할 수 없었으며, 훈족의 침략은 인도-로마 무역 관계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도시 문화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굽타 제국은 550년에 완전히 멸망하며 고전 인도 문명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대홍수, 굽타 제국의 몰락 가속]
최근 연구에 따르면 6세기 중반 우타르프라데시와 비하르에서 발생한 파괴적인 홍수가 굽타 제국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2019년 샨케르 샤르마의 연구에 따르면, 6세기 중반 우타르프라데시와 비하르 지역을 강타한 파괴적인 홍수가 굽타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는 훈족의 침략 외에 또 다른 제국 쇠퇴의 원인을 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