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축하성
국가 위기, 항복 사건, 조선 시대, 외교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0:29
병자호란의 마지막을 장식한 정축하성은 인조가 59일간의 남한산성 농성 끝에 청에 항복한 비극적 사건입니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불리며, 조선이 명에서 청의 속국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인조의 항복과 왕자들의 볼모행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깊은 정신적 충격을 안겼고, 이후 대청 관계를 규정하는 굴욕적인 역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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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
[강화조약 체결 및 왕자들 선양 압송]
정축하성 이후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와 신하들이 청나라 선양으로 인질로 압송되었다.
정축하성과 항복 이후,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소현세자와 부인 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 그리고 김상헌 등의 신하들이 청나라의 수도 선양(심양)으로 인질로 압송되었다. 이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상징하는 조치였다.
[청군 한성 진출 소식 인지]
홍타이지가 이끄는 약 10만 명의 청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했음을 한성이 인지했으며, 이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출해 있었다.
홍타이지가 이끄는 10만 명의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면서 병자호란이 시작되었다. 이 소식은 한성에 늦게 전해졌고, 청군은 이미 개성 부근까지 빠르게 진격한 상태였다.
청군의 급속한 남하로 인해 당초 계획했던 강화도 몽진이 불가능해지자, 밤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소집하려 했다.
[강원 근왕군 조직 및 실패]
강원감사 조정호가 7,000명의 근왕군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선봉대는 청군에 격파당하고 본대는 와해되었다.
강원감사 조정호가 약 7,000명의 근왕군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 명은 검단산까지 진출했으나, 이튿날 청군 별동대에 의해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와해되었다. 조정호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했다.
[충청·평안 근왕군 움직임 시작]
충청감사 정세규가 근왕 명령을 받고 군사 규합을 시작했으며, 평안감사 홍명구는 유림 휘하 병력과 합세하여 평양을 출발했으나 청군 별동대에 가로막혔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인조의 납서를 받고 즉시 근왕군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평안감사 홍명구는 평안병사 유림의 병력을 합쳐 평양을 출발,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주둔한 청군 별동대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었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근왕 명령을 받았다. 이후 6,000여 명의 병력을 소집하여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 북상했으며, 화엄사의 승병 2,000여 명도 합류했다.
[강원 근왕군 선봉대 검단산 격파]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강원 근왕군 선봉대가 남한산성 근처 검단산까지 진출했으나 이튿날 청군에 격파당했다.
강원감사 조정호가 조직한 근왕군의 선봉대 1,000여 명이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격파당하며 근왕군 와해의 시발점이 되었다.
충청감사 정세규가 조직한 근왕군이 공주를 출발하여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했으며, 불화살로 남한산성에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청군 별동대의 요격으로 인해 지휘관 다수가 전사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함경 근왕군 출정 및 김자점 불참]
함경감사 민성휘가 7,000명의 근왕군을 규합했으나, 지휘권 분쟁과 도원수 김자점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전세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7,000명의 근왕군을 규합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민성휘 사이에 지휘권 분쟁이 발생했다. 결국 민성휘의 주장대로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를 꾀했으나, 김자점은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23,000명에 달했던 양평의 군세는 전쟁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경상도 근왕군 쌍령 전투 참패]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군 8,000여 명이 광주의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으나, 청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했다.
경상감사 심연의 지휘 아래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군 8,000여 명이 광주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불당리에 매복해 있던 소규모 청군과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훈련도 부족과 화약 소모로 인해 전력이 붕괴, 허완과 민영 모두 전사하며 참패했다. 이 패배로 심연은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전라 근왕군 광교산 전투 및 퇴각]
전라감사 이시방 휘하 전라병사 김준용이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하여 청군과 조우했으나, 물자 부족으로 퇴각했다.
전라감사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의 선봉장 김준용이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하여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조우했다. 다음 날 김준용은 청군 장수 양고리를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물자 부족으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수원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방이 이끄는 본대는 광교산 전투를 패전으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했다.
[남한산성, 청군과 협상 시작]
남한산성 내 식량 고갈과 추위로 인한 피해가 극심해지자 인조는 청군과의 협상을 시작했으나, 김상헌의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는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했다.
남한산성 내에서는 비축물자 부족으로 인한 기근과 혹심한 추위로 동사자 및 아사자가 속출했다. 인조는 굶주림에도 항복을 거부했으나, 결국 전쟁을 끝내기 위해 청군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성 내부에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며 항복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강화도 함락]
봉림대군과 비빈들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조선군의 항전 의지가 결정적으로 꺾이는 계기가 되었다.
봉림대군과 비빈들이 피난해 있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 소식은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완전히 꺾이게 되었다. 강화도 함락은 남한산성 농성 중 인조의 항복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강화도 함락 소식이 남한산성에 전해지자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결국 인조는 청군에게 항복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고, 이틀 뒤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정축하성 및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59일간의 농성 끝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한 사건이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으로 불린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는 59일간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포위되고 근왕병의 실패, 식량 부족 등으로 인해 항복을 결정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이 사건은 조선이 명의 속국에서 청의 속국으로 전환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인조는 이 사건을 '하성'이라고 표현하며 항복이 아님을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굴욕적인 항복이었다.
1639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과 병자호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에 '삼전도비'를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 비석에는 청의 우월성과 조선의 항복 내용이 새겨져 있어 조선인들에게는 굴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640
[조선, 명군 공격 실패 및 임경업 투항]
청나라의 요청으로 가도에 주둔한 명군을 공격하기 위해 임경업을 파견했으나 실패했고, 임경업은 1643년 명에 투항했다.
청나라의 요구로 조선은 임경업을 수장으로 6,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가도에 주둔하던 모문룡의 명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임경업은 1643년 명나라에 투항하여 부총병 직위를 받았으나, 이미 명나라는 쇠퇴하고 있었고 북경 함락 후 그는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1645
[소현세자 귀국 및 의문사, 봉림대군 책봉]
청나라에 볼모로 억류되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으나 두 달 만에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했고, 세자빈 강씨도 사사된 후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효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억류되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으나, 귀국 2개월 만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서 세자빈 강씨도 사사되었으며, 그 직후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훗날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정국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