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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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전투, 전쟁, 고려시대, 한국역사 + 카테고리
황산대첩은 1380년(고려 우왕 6년) 9월, 고려의 명장 이성계가 전라도 황산(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운봉읍 일대)에서 1만 명에 달하는 왜구의 주력 부대를 크게 섬멸한 역사적인 전투입니다. 당시 진포(금강 하구)로 침입한 500여 척의 대규모 왜구는 최무선의 화포 공격에 선박을 모두 잃은 뒤, 독안에 든 쥐가 되어 내륙 깊숙이 진출해 극심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습니다. 국가적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삼도도순찰사로 전격 임명된 이성계는 변안렬, 배극렴 등과 합류해 험지인 황산에서 죽음을 각오한 혈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용맹한 소년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고 극소수를 제외한 왜구를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왜구의 발호를 결정적으로 꺾어 고려의 안위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훗날 조선의 태조가 되는 이성계의 정치적, 군사적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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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368

[명나라 건국과 고려의 조공]

중국 대륙에서 새롭게 명나라가 건국되며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합니다. 고려는 이듬해부터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북원과의 관계를 일부 유지했습니다.
명나라의 등장은 고려의 외교와 국방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원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가 붕괴되는 와중에 고려는 새롭게 떠오른 명나라와 교류를 맺으며 국방을 다져야 하는 복잡한 외교적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1370

[명 주원장의 왜구 방어 요구]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이 고려 조정에 직접 친서를 보내어 왜구의 침략을 강력히 방어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합니다.
당시 왜구는 고려의 해안가뿐만 아니라 명나라 해안까지 심각하게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주원장의 친서는 왜구 문제가 단순한 국지적 해적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심각한 안보 문제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였습니다.

1376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승리]

우왕 2년, 최영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홍산(鴻山) 지역에서 침입해 온 왜구 무리를 상대로 크게 패배시키며 대승을 거둡니다.
홍산대첩에서의 참패로 인해 기세가 등등하던 왜구는 큰 타격을 입고 한동안 침략을 멈추었습니다. 황산대첩 이전 고려의 왜구 방어사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주요 승전으로, 일시적인 평화와 군사 재정비의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1378

[대마도발 왜구의 지리산 침입]

잠잠하던 왜구가 다시 대마도를 거쳐 대규모로 침입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의 주력 무리가 지리산 방면을 향해 진격해 들어옵니다.
이 시기부터 이성계 장군이 왜구 토벌 전면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리산과 해주 등 적이 출몰하는 곳마다 이성계가 격퇴를 거듭하면서 그의 용맹한 이름이 고려 전역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380

[경신년 왜구의 진포 대규모 침략]

이른바 '경신년 왜구'라 불리는 500여 척의 대규모 왜구 함선이 진포(현재의 금강 하구)에 정박하며 한반도 남부를 노립니다.
이들은 단순한 해적 수준을 넘어서는 지방의 유력 근거를 가진 거대 군사 세력이었습니다. 진포 상륙 직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 전역으로 흩어져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아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진포 해전과 화포의 최초 실전]

고려 정부는 원수 나세와 최무선을 급파하여 신무기인 화포와 화통을 사용해 진포에 묶여 있던 왜구의 배들을 모두 불태웁니다.
최무선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화약 무기가 최초로 실전에 성공적으로 도입된 역사적인 전투입니다. 500여 척의 적선이 잿더미로 변하면서, 왜구들의 퇴로가 원천적으로 완전히 차단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퇴로 잃은 왜구의 내륙 진출]

배를 잃고 겨우 목숨만 구한 360여 명의 적들이 옥주(현재의 충북 옥천) 방면으로 달아나 육지에서 활동하던 왜구 본대와 합류합니다.
퇴로가 끊겨 독안에 든 쥐가 된 왜구들은 오히려 더욱 거세게 저항하며 상주, 영동, 옥주 등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은 이들이 고려 백성들을 향해 더욱 가혹한 만행을 쏟아붓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배극렴 부대 기습 및 남원 점령]

합류하여 덩치가 커진 왜구 무리가 고려의 장수 배극렴이 이끄는 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남원 일대에 주둔합니다.
고려 관군을 격파하며 사기가 오른 왜구들은 남원을 점거한 뒤 장차 개경까지 진격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리지 않는 이들의 횡포에 고려 조정의 공포는 극에 달했습니다.

[사근내역 집결 및 9원수 부대 출전]

상주 방면으로 휩쓸고 지나간 왜구 주력 부대가 경산을 거쳐 험지인 사근내역(현재의 경남 함양)에 최종 집결하여 방어 태세를 갖춥니다.
배극렴, 김용휘, 지용기, 정지 등 아홉 명에 달하는 고려의 원수들이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추격에 나섰으나 치열한 반격에 부딪혔습니다.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원수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해 무려 5백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는 참사를 겪었습니다.

[운봉현 방화 및 개경 북상 호언]

사근내역에서 승리한 왜구가 다시 진격하여 남원의 운봉현 일대를 무참히 불태우고 인월역(인월리)에 진을 칩니다.
이들은 인월역에 머물며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곧장 북상하여 정권을 무너뜨리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왜구의 이 오만한 위협은 조정을 커다란 충격과 불안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성계 삼도도순찰사 임명]

국가 존망의 위기를 느낀 조정은 앞선 전투들에서 무공을 세운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로 전격 임명하여 파견합니다.
이성계에게 대왜구 방어 및 토벌의 최고 권한과 중대한 책임이 부여되었습니다. 아울러 체찰사 변안렬을 비롯해 이원계, 우인열, 도길부 등 고려 최고의 맹장들이 총동원되어 이성계의 대토벌 작전을 돕게 되었습니다.

[남원 합류 및 왜구의 식량 공급 위협]

명령을 받은 이성계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으로 내려가 패전 수습 중이던 배극렴 등의 부대와 극적으로 합류합니다.
이성계가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의 동태를 살피며 섣부른 공격을 지체하자, 기세등등한 왜구는 고려군에게 식량 공급을 원천 차단하겠다고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군은 신속히 결전을 치러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부서 재정비 및 운봉 진입]

적의 위협 속에서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지체하던 공격을 결심하고, 부서를 단단히 재정비한 후 운봉을 넘어 적진을 향해 전진합니다.
고려군은 병력을 체계적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황산 서북쪽 일대로 진입했습니다. 곧이어 벌어질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앞두고 전군이 목숨을 건 비장한 각오를 다졌습니다.

[정산봉 전투 개시 및 고전]

이성계의 군대가 운봉을 지나 황산 서북의 정산봉 일대에서 적들과 완전히 충돌하며 치열한 전투의 막이 오릅니다.
왜구는 험준한 산악 지형을 방패 삼아 견고하게 진을 치고 저항했습니다. 고려군은 약 1,500명의 병력으로 1만여 명의 적을 상대해야 했기에 숫적인 절대 열세 속에 여러 차례 큰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성계의 산악 돌격과 총공격]

전황이 불리해지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직접 앞장서서 적이 진을 치고 있는 산 위로 돌격해 들어가 싸움을 독려합니다.
총사령관이 직접 적진 한복판을 향해 칼을 뽑아 드는 투혼을 보이자, 이에 감격한 모든 고려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총공격에 나섰습니다. 이 돌격은 흔들리던 전세를 고려 측으로 단번에 역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왜구 두목 아지발도 사살]

치열한 난전 속에서 이성계와 의형제 이지란이 합심하여 왜구의 맹장이자 수장인 아지발도를 극적으로 사살하는 데 성공합니다.
나이가 어린 소년 장수였음에도 무척이나 용맹하고 온몸을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했던 아지발도였습니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투구의 끈을 맞혀 벗겨지게 만들자, 그 틈을 타 이지란이 즉시 이마를 명중시켜 적장을 쓰러뜨렸고 이에 왜구의 진영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강을 붉게 물들인 압도적 대승]

지휘관을 잃고 흩어지는 왜구를 향해 고려군이 맹추격을 가하여 적병 대부분을 도륙하는 역사적인 대승을 거둡니다.
당시 전사한 왜구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을 붉게 물들여, 인근 백성들이 6~7일간이나 물을 마시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또한 포획한 군마만 1,600여 필에 달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의 병기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습니다.

[잔당 70여 명의 지리산 도주]

1만여 명의 병력으로 고려를 벌벌 떨게 했던 거대 왜구 부대는 이 전투로 거의 멸절되고, 극소수의 잔당만이 산속으로 숨어듭니다.
시작할 때는 적군이 고려군보다 10배나 많은 압도적 규모였으나, 전투가 끝난 뒤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친 왜구는 겨우 7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승리로 내륙을 유린하던 왜구의 세력은 사실상 궤멸되었습니다.

[우왕의 포상과 장수들의 사양]

황산대첩 직후 우왕은 크나큰 전공을 세운 변안렬, 이성계 등 여러 장수들에게 금과 은을 하사하며 격려했으나 이들은 이를 극구 사양합니다.
변안렬과 이성계는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직책인데 우리가 어찌 포상을 받겠는가?"라고 말하며 왕이 내린 금 50량 등을 물리쳤습니다. 고려를 위기에서 구한 명장들의 겸손과 충의가 돋보이는 일화로 변안렬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577

[황산대첩비 건립]

조선 선조 10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의 건의를 바탕으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진 태조 이성계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집니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전라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 전투 현장에 거대한 '황산대첩비'가 공식 건립되었습니다. 이는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무공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기념 사업이었습니다.

1977

[파괴된 비석의 복원과 파비각 건립]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산산조각 폭파되었던 황산대첩비를 광복 후 다시 세우고, 남은 파편들을 보존하는 파비각을 건립합니다.
한민족의 승전 역사를 지우려 했던 일제의 만행으로 귀중한 대첩비가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1977년 새롭게 비석을 복원하고, 일제가 남긴 뼈아픈 파괴의 흔적을 잊지 않기 위해 깨진 조각들을 보아 파비각(破碑閣)에 소중히 보관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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