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
전투, 전쟁, 군사, 고려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0:28
1380년, 이성계 장군이 전북 남원 황산에서 고려를 침범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퇴의 결정적 전환점이자, 이성계의 군사적 명성을 드높여 훗날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주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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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8
[왜구의 대규모 재침과 이성계의 등장]
최영에게 대패한 왜구가 잠잠하다가 1378년 5월 대마도에서 대규모로 다시 침입하여 지리산 일대를 약탈했다.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나선 이성계는 가는 곳마다 적을 격퇴하며 용맹을 떨쳐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376년 홍산 전투에서 최영의 군사에 크게 패한 왜구는 한동안 활동이 뜸했다. 그러나 1378년 5월 대마도로부터 대규모로 다시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 방면으로 들어왔다. 이 시점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는 지리산, 해주 등 전투마다 적을 격퇴하며 그 용맹함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1380
[화포로 왜선을 불태운 진포 해전]
1380년 8월, 왜구 500여 척이 진포(금강 하구)에 침입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를 약탈했다. 고려 정부는 나세와 최무선에게 신무기인 화포를 사용해 왜선을 모두 불태우게 했다. 배를 잃은 왜구들은 육지로 올라와 다른 왜구들과 합류하여 더욱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1380년 8월경, 왜구가 진포(현재의 금강 하구)에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나타나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에 고려 정부는 원수 나세와 최무선에게 명하여 당시 최무선이 개발한 화통과 화포를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하고 모두 불태우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배가 모두 불타 돌아갈 길이 없어진 왜구들은 육지에서 활동하던 다른 왜구들과 합류하여 배극렴 부대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는 등 남원에 주둔하며 개경까지 진격할 것을 위협하며 전라·경상 양도에서 더욱 심한 횡포를 부렸다.
[이성계, 황산대첩의 지휘관으로 나서다]
고려 정부는 내륙에서 횡포를 부리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로 임명하고, 변안열을 도체찰사로 삼아 왜구 대토벌 작전을 명했다. 왜구는 경상도 일대를 약탈한 후 험지를 거쳐 황산으로 집결했다.
남원 운봉현을 방화하고 인월역에 주둔하며 북상을 호언하던 왜구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조정은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했다. 변안열을 체찰사로, 우인열, 이원계, 박임종, 도길부, 홍인계, 임성미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 대토벌 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왜구는 경상도 일대를 노략질한 후 사근내역 등 험지를 거쳐 황산으로 모였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여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에 이르러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황산대첩 후 전공에 대한 포상 사퇴]
우왕은 황산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변안열과 이성계에게 각각 금 50량씩을 하사했으나, 이들은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당연한 직책이라며 이를 모두 사퇴하여 그들의 뛰어난 리더십과 청렴함을 보여주었다.
고려 우왕은 황산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변안열과 이성계에게 각각 금 50량씩을 하사했다. 왕복명 이하 여러 장수들에게는 은 50량씩을 주었으나, 이들 모두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그 직책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라며 겸손하게 포상을 사퇴하여 그들의 뛰어난 리더십과 청렴함, 그리고 국가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었다.
[이성계의 황산대첩, 왜구를 대파하다]
황산 서북쪽 정산봉에서 고려군과 왜구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험지에 진을 친 왜구에 맞서 이성계는 죽음을 각오하고 직접 산 위로 올라가 싸웠고, 이에 고무된 모든 군사들이 총공격하여 아지발도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는 고려의 왜구 토벌사에서 최대의 전과로 꼽힌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적들이 험지에 자리 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직접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이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퍼부어 일대 격전 끝에 아지발도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물이 6~7일간 붉게 물들어 마실 수 없을 정도였으며, 1,600여 필의 말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기가 포획되었다. 처음에는 아군보다 10배나 많았던 왜구 중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고려의 왜구 토벌사에서 최대의 전과로 꼽히는 전투이다.
1577
[황산대첩비 건립과 수난, 그리고 복원]
황산대첩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77년(조선 선조 10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의 건의로 남원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가 세워졌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가 1977년에 복원되어 현재 그 파편들은 파비각에 보관되어 있다.
1577년(조선 선조 10년), 전라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산대첩에서 이룬 이성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가 건립되었다. 이 기념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1977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새로 복원되었다. 현재 일제강점기에 깨어진 비석 조각들은 파비각(破碑閣)이라는 별도의 건물에 보관되어 역사적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