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전투
전투, 전쟁, 군사 분쟁, 고구려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0:22
645년, 고구려와 당나라의 제1차 고당 전쟁 중 벌어진 안시성 전투는 당 태종 이세민의 대군을 고구려가 기적처럼 막아낸 역사적 승리입니다. 약 두 달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당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고 결국 퇴각했으며, 고구려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방어전 중 하나로 기록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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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4년 6월, 당 태종은 마침내 고구려의 침략을 명령한 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 기구를 총동원했다.
644년 11월, 당 태종은 약 5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 공격을 시작했다. 이세적이 이끄는 선발대는 개모성을 함락시켰고, 장량이 지휘하는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645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안시성 성주의 이름]
안시성을 지켜낸 성주의 이름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아 후대에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등장했지만, 그 진위에 대해서는 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다.
안시성 전투는 1차 고구려-당 전쟁 중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지만, 안시성 성주에 대해서는 역사서에 "안시성의 성주"로만 기록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성주를 크게 칭송하며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송준길과 박지원의 기록에는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그 진위에 대한 사학자들의 의문이 남아있다.
당 태종은 645년 2월에 낙양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돌궐과 거란으로 구성된 이민족의 군대도 다수 동원되었으며, 대부분의 군대가 정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백암성 함락과 안시성 공격 결정]
백암성이 함락된 후 당 태종은 안시성의 강력한 저항에 대한 정보를 듣고도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 공격을 결정했다.
백암성이 6월에 함락되자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했다고 들었다며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급로 차단을 염려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군의 안시성 동편 이동 및 주변 성 함락]
당나라군이 안시성 동쪽 고개로 이동하여 부근의 작은 성 후황성과 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8월 2일, 당나라군은 안시성 동쪽 고개로 이동하였고 부근의 작은 성 후황성과 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군의 토산 축조와 안시성의 필사적 방어]
당나라군은 안시성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 성을 압박하려 했으나, 안시성 또한 성벽을 높여 방어하고 격렬히 맞섰다.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당군은 이도종의 건의로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벽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양군은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나라는 60일 동안 총인원 3만 명을 동원하여 토산(土山)을 쌓았다.
[당 태종, 안시성 본격 공격 개시]
당나라 대군이 마침내 안시성 공격을 시작했다. 안시성 사람들은 굳건히 저항하며 당군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9월 6일, 당 태종의 당나라 대군이 안시성 공격을 시작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당군의 깃발과 일산을 보고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자 당 태종이 크게 분노했다. 이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요청했고, 이 말을 들은 안시성 사람들은 더욱 굳게 수비했다.
[안시성 토산 붕괴와 당 태종의 퇴각]
폭우로 당나라의 토산이 무너지고 안시성 군사가 이를 탈취했다. 결국 당 태종은 막대한 피해 속에 안시성 공략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당나라가 60일 동안 쌓은 토산이 완성되어 성 안을 내려볼 수 있게 되었으나, 폭우로 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안시성 군사 수백 명이 이를 틈타 토산을 탈취하고 수비했다. 이에 진노한 당 태종은 부복애의 목을 베고 장수들에게 공격을 명령했지만, 결국 이길 수 없자 이도종의 죄를 용서하며 퇴각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당군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고구려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안시성을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