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

조선시대 정변, 왕위 쟁탈, 정치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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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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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변, 왕위 쟁탈, 정치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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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은 1453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 세력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피의 정변입니다. 왕실 내 권력 다툼과 신권 견제를 명분 삼아 벌어졌으며,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의 기반을 굳히고 훗날 세조로 등극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훈구 세력의 등장을 촉발하며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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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

[문종, 어린 단종 보필을 고명대신에게 부탁]

문종이 자신의 단명을 예감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어린 세자(단종)의 즉위 후 잘 보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는 훗날 고명대신들의 권력 집중과 수양대군의 반발을 낳는 배경이 된다.

문종은 병약하여 자신의 명이 길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당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왕세자를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이 유명으로 인해 단종 즉위 후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고명대신들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왕실 내 다른 세력들과의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양대군, 책사 한명회·권람 영입 및 무인 포섭 시작]

조정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손을 잡는 등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위협을 느낀 수양대군은 권람과 한명회를 책사로 영입하고, 한명회를 통해 홍달손, 양정 등 유능한 무인 30여 명을 포섭하며 정변 계획의 기반을 다졌다.

안평대군과 조정 대신들의 연합으로 정치적 위기를 느낀 수양대군은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하 책사로 권람을 통해 한명회를 영입했다. 한명회는 다시 홍달손, 양정 등 무인 30여 명을 포섭하여 수양대군의 세력 확장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후 신숙주, 홍윤성, 황수신 등 소장파 관료와 무관, 그리고 양녕대군, 임영대군 등 주요 종친들도 수양대군의 세력으로 합류하게 된다.

[12세 단종 즉위, 고명대신 김종서의 섭정 시작]

문종이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 김종서가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인 섭정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왕실 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의 세력과 김종서 세력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왕실의 중심점 역할을 할 대비나 대왕대비가 부재한 상황에서,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 김종서가 조정의 인사권, 정권, 병권을 모두 쥐고 섭정을 펼쳤다. 이때 세종의 아들들 중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각자 강성한 세력을 이루며 김종서와 대립, 조정과 왕실이 이들의 세력으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1453

[수양대군, 명나라 사신 자청해 대신들 경계심 무마 및 세력 강화]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의 경계심을 피하기 위해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것을 자청, 이를 저지하려던 안평대군을 막고 직접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사행길에서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며 쿠데타 계획을 은밀히 진행했다.

수양대군은 정변 계획을 숨기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정치적 계략을 세웠다. 이는 원래 안평대군이 자청했던 것이었으나, 수양대군은 세력을 동원해 안평대군을 저지하고 자신이 사신으로 떠났다. 이 사행길을 통해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으며, 김종서 등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 또한 무마시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수양대군, 반대파 안평대군 유배 및 사사]

쿠데타가 성공하자 수양대군은 형식적인 반대 제스처를 취한 뒤,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보낸 뒤 의금부를 통해 사약을 내려 살해했다. 이로써 왕실 내 주요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거했다.

계유정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수양대군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가장 큰 왕실 세력이었던 안평대군의 처벌에 대해 형식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곧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금부를 통해 사약을 내려 그를 살해했다. 또한, 살해된 조정 중신들의 처첩과 자녀들을 노비로 전락시키는 등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철저히 진행했다.

[수양대군, 정난공신 책록 및 주요 관직 독점]

쿠데타 성공 후 수양대군은 자신과 정인지, 한확 등을 정난공신 1등으로 책록하고, 나머지 신하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독점했다. 이로써 영의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며 재위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계유정난이 성공을 거두자 수양대군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 구도를 확립했다. 그는 자신과 정인지, 그리고 사돈지간이었던 한확 등을 정난공신 1등으로 책록하고, 다른 협력자들을 2등, 3등 공신으로 분류했다. 이 과정을 통해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공신들이 독점하게 되었으며, 수양대군 자신은 영의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여 사실상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을 마련했다.

[수양대군, 귀국 후 살생부 작성 및 거사 계획 착수]

명나라에서 귀국한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함께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조정 중신들을 제거할 살생부를 작성하고, 음력 10월 10일(양력 11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하며 쿠데타 계획을 서둘렀다.

명나라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 핵심 책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정변 준비에 착수했다. 이들은 수양대군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조정 중신들의 명단을 담은 살생부를 작성하고, 음력 10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첫 목표는 좌의정 김종서였으며,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자신은 직접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계유정난 발발: 수양대군, 고명대신 김종서·황보인 숙청]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며 정권을 장악한 피의 정변이다. 어린 단종의 즉위로 고명대신들이 권력을 쥐고 있던 상황에서, 수양대군이 왕실 내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일으킨 쿠데타였다.

1453년 11월 10일(음력 10월 10일),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한명회, 권람 등 책사들을 통해 무인들을 포섭하고 살생부를 작성하여 기습적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첫 목표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좌의정 김종서였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종 임운을 시켜 철퇴로 김종서를 습격하며 정변이 시작되었다. 이후 수양대군은 경복궁을 장악하고 단종에게 김종서의 역모를 보고한 뒤, 입궐한 대신들 중 반대파를 철퇴로 살해하며 황보인, 이양, 조극관 등을 제거했다. 가까스로 도주했던 김종서도 다음날 양정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1455

[수양대군, 단종 폐위 후 왕위 찬탈(세조 즉위)]

계유정난으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압박하여 마침내 1455년 왕위를 차지하고 세조로 즉위했다. 이는 계유정난의 궁극적인 목표가 달성된 결과였다.

계유정난을 통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수양대군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는 등 집권 태세를 굳혔다. 이러한 압박 끝에 1455년 마침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위 받아 조선의 제7대 왕, 세조로 즉위하게 된다. 이로써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며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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