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사화

정치적 숙청, 왕실 외척 다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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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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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숙청, 왕실 외척 다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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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는 1545년 조선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대규모 정치적 숙청 사건입니다. 중종의 두 외척 가문, 인종의 외숙부인 대윤 윤임과 명종의 외숙부인 소윤 윤원형 간의 권력 다툼이 핵심 원인입니다. 인종 즉위 후 대윤이 득세했으나, 인종 승하와 명종 즉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소윤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윤원형은 대윤 세력과 사림 인사들을 반역 음모죄로 몰아 대거 숙청했으며, 그 여파는 6년간 이어져 약 100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외척의 전횡을 심화시키고 후기 당쟁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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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

[중종 승하와 대윤 윤임의 득세]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숙부인 대윤 윤임이 정권을 장악하고 사림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는 소윤 윤원형 일파의 반감을 샀습니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인종의 외숙부인 윤임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윤임은 평소 뜻을 같이했던 사림 세력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여 정부 요직에 앉히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이에 반해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세력은 기회를 엿보며 반격을 준비했습니다.

1545

[을사사화 발발, 소윤 윤원형의 대윤 윤임 제거]

소윤 윤원형은 문정왕후와 명종을 선동하여 형조판서 윤임과 그 일파(유인숙, 유관 등)를 반역 음모죄로 몰아 유배 보냈다가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습니다. 이로써 대윤 세력은 권력에서 완전히 축출되었습니다.

소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총애와 명종의 어린 나이를 이용해, 자신의 첩 정난정을 동원하여 문정왕후와 명종을 선동했습니다. 그는 대윤 윤임과 그 일파인 유인숙, 유관 등을 반역을 꾀했다는 음모죄로 몰아 귀양 보낸 후 죽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원형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대윤파에 사감(私感)이 있던 인사들을 규합하여 대윤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계림군, 봉성군 등 왕실 종친 및 사림 인사 숙청]

윤원형은 대윤 세력 제거에 이어 계림군을 반역 음모죄로, 명종의 이복형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다는 무고로 죽였습니다. 또한 이덕응을 협박하여 사림 인사 10여 명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정치 보복을 단행했습니다.

윤원형 일파는 대윤 윤임 세력 제거에 그치지 않고, 왕실 종친까지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계림군은 반역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죽임을 당했고, 명종의 이복형인 봉성군은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했다는 거짓 보고로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습니다. 또한 이덕응을 협박하여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 10여 명의 사림 인사들을 무고하게 죽이는 등 권력 장악을 위한 피의 숙청을 이어갔습니다. 이덕응 본인도 나중에 화를 입었습니다.

[인종의 갑작스러운 승하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대윤과 소윤 간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종은 즉위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승하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인종의 뒤를 이어 당시 12세에 불과했던 명종이 즉위했고,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왕대비로서 국정 전반을 대리하는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인종 즉위 후 권력을 장악했던 대윤 윤임 세력은 순식간에 몰락의 위기에 처했고, 문정왕후의 아우인 소윤 윤원형 세력이 권력을 잡을 결정적인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1551

[6년간 이어진 을사사화의 여파]

을사사화의 여파는 이후 6년간 계속되어 윤임 등을 찬양했다는 등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의 수가 거의 100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주요 사화 중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희생을 낳았습니다.

을사사화는 단기간에 끝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소윤 세력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1545년부터 6년 동안 지속적으로 대윤 및 사림 관련 인사들을 제거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윤임 등을 찬양했거나, 사소한 트집을 잡아 갖가지 죄명을 씌워 유배 보내거나 죽인 사람의 수가 거의 1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을사사화는 조선 후기 당쟁의 한 원인을 제공하고, 외척 세력이 국정을 전횡하는 계기가 된 대규모 정치 숙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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