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해전

해전, 전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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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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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 전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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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은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입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명 연합수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 해전으로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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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

[정유재란 발발]

일본은 명나라와의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재차 침공, 정유재란이 발발했습니다.

행주산성 패배와 수군의 잇따른 패배,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철군했으나,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다시 침공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습니다.

[명량 대첩 승리]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다시 남부 해상권을 조명 연합군이 장악하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전세를 가다듬었고, 명나라 수군까지 참전하면서 남부 해상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이 고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일본군 철수 결정]

일본 최고 통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 주둔 일본군은 전쟁을 끝내고 서둘러 본국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해상 보급로 차단과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일본군은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관에 빠졌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구출을 위한 일본 구원군 노량으로 이동]

순천왜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구출하고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일본 함선이 노량해협으로 향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순천왜성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고니시 부대가 궁지에 몰리자, 사천 선진리성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 남해 주둔 일본군이 연합하여 그해 12월 15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해협으로 향했습니다.

[이순신, 일본군의 퇴로를 예측하고 관음포에 매복]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에게 퇴로 차단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12월 15일 밤 남해도 서북단 관음포에 매복했습니다.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에게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매복했습니다.

[조명 연합수군의 대승으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막을 내리다]

조명 연합수군은 일본 함대 350여 척을 침몰시키고 100여 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며, 일본군의 철수를 완료시키고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대장정을 마쳤습니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일본 수군은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습니다.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여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고, 350여 척 이상을 침몰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혼란을 틈타 왜교에 봉쇄되어 있던 고니시 군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한 뒤 철수했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과 7년간의 임진왜란이 막을 내렸습니다.

[노량 해전 발발 및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최후]

1598년 12월 16일 새벽, 노량해협에 진입한 일본 함대를 조명 연합수군이 매복 공격하며 노량 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 중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사했습니다.

1598년 12월 16일 새벽 4시경,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며 노량 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는 등 대활약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중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다. 단 한 명의 조선 수군도 동요되어서는 아니 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 여러 조선 장수와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전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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