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대첩
해전, 임진왜란, 역사적 사건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56
1592년,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학익진 전술을 해전에서 처음으로 성공시키며, 조선의 남해상 제해권을 확보한 결정적인 전투입니다. 육지에서의 연이은 패배 속에서 조선군에 승리의 용기를 불어넣고,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역사적인 대첩으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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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주요 지휘관 승진]
한산도 대첩의 큰 공로를 인정받아 이순신은 정헌대부(정2품),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종2품)의 관계(官階)를 받았습니다.
한산도 대첩의 승리 이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순신은 정헌대부(정2품)로,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종2품)로 각각 관계(官階)를 받았습니다. 이순신은 전투 중 왼쪽 어깨 상단에 조총을 맞기도 했으나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2차 출동 개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함대가 2차 출동을 개시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등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전에서는 조선군이 계속 패배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수군은 해전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했습니다.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가 2차 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조선군이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 수군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 40여 척, 가토 요시아키의 제3진 등 병력을 증강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서진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 집결 및 합동 훈련]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인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다음 날 출진하여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류하며 조선 수군의 전력은 총 55척으로 강화되었습니다.
1592년 8월 11일(음력 7월 5일),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다음 날인 8월 12일(음력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총 55척(거북선 3척, 판옥선 52척 포함)이 되었습니다.
[일본 함대 정보 입수 및 군율 확립]
당포에 정박 중이던 조선 함대는 목동 김천손으로부터 일본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같은 날, 군무이탈을 시도한 수졸 황옥현이 참수되어 군의 기강을 확립했습니다.
1592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당포에 이르러 정박했을 때 목동 김천손에게서 일본의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수했습니다. 같은 날, 이순신 휘하의 수졸 황옥현이 도주하여 군무이탈 혐의로 참수형에 처해지고 그 수급이 효시되어 군율을 엄정하게 세웠습니다.
[한산도 대첩 발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본 함대를 학익진 전술로 크게 격파했습니다. 판옥선의 강력한 화포로 일본 전선 47척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조선 수군은 전선 손실 없이 단 3명의 전사자만 발생했습니다. 이 대승은 임진왜란의 해상 전력 균형을 완전히 뒤바꾸었습니다.
견내량의 좁고 암초 많은 지형을 피하기 위해 조선 수군은 판옥선 5~6척으로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습니다. 유인 작전에 넘어온 일본 수군을 향해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 전술을 펼쳤고, 지·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쏘며 돌진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전선 47척이 불살라 격침되고 12척이 나포되었으며,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습니다. 조선 수군은 전선 손실 없이 3명 전사, 10명 부상이라는 경미한 피해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일본군 400여 명은 한산도로 도주했다가 13일간 미역을 먹으며 연명하다 뗏목으로 겨우 탈출했으며, 마나베 사마노조는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했습니다.
[안골포 해전 승리]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 다음 날, 이순신은 안골포(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남해상 제해권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 다음 날인 1592년 8월 15일, 안골포(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서 이순신 장군은 또 한 번의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더욱 확실하게 확보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