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고려 장군, 정치인, 무신, 문신,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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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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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장군, 정치인, 무신, 문신,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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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의 명장이자 충신으로,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훈을 좌우명 삼아 청렴한 삶을 살았습니다.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 혁혁한 공을 세워 민심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권문세족 숙청을 통해 국정 안정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 그의 죽음은 고려의 몰락과 조선 건국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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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6

[최영 탄생]

고려 말기의 장군 최영이 태어나다.

최영은 고려 후기 학자 최유청의 5대손이자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세 때 부친에게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훈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출중하여 무장의 길을 걸었습니다.

1348

[고려군 복무 시작]

최영이 고려군에 복무를 시작하다.

무인으로서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우달치에 임명되며 고려군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1352

[조일신 역모 진압과 출세]

공민왕 원년, 최영이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고 호군으로 출세하다.

1352년(공민왕 원년) 음력 9월, 최영은 안우, 최원 등과 함께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여 호군(護軍)으로서 출세하게 되었습니다.

1354

[원나라 홍건적 토벌 출정]

원나라의 요청으로 대호군 대장군 최영이 홍건적 토벌을 위한 조정군으로 출정하다.

1354년(공민왕 3년) 중국 산동 지역에서 장사성 등의 홍건적이 원 조정에 반기를 들자, 원은 고려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조정군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최영은 대호군(大護軍) 대장군으로서 류탁, 염제신 등과 함께 병력 2천 명과 함께 출정했으며, 원에 대기 중이던 고려인 2만 명을 지휘했습니다.

1355

[쌍성총관부 수복]

원정에서 돌아온 최영이 이성계와 이자춘의 도움으로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다.

1355년(공민왕 4년) 원정에서 돌아온 최영은 왕명으로 예전 원에게 침식된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서쪽으로 압록강을 넘어 요양에 이르는 실지 회복에 나섰습니다. 쌍성총관부 전투에서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되찾았으며, 두 사람은 이후 고려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1358

[오예포 왜구 격파]

공민왕 7년, 최영이 양광·전라도 왜적 체복사가 되어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 4백여 척을 격파하다.

공민왕 7년(1358년), 최영은 양광·전라도 왜적 체복사(倭賊體覆使)가 되어 오예포(吾乂浦 : 장연)에 침입한 왜구 4백여 척을 격파하여 전과를 올렸습니다.

1364

[최유 침략군 격퇴]

최영이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던 기황후의 지원을 받은 최유의 침략군 1만을 격퇴하다.

원나라는 홍건적과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우외환을 겪는 와중에도 공민왕을 밀어내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기황후의 지원을 받은 최유가 군사 1만을 이끌고 1364년에 고려로 쳐들어왔으나, 최영이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1365

[창릉 어진 도난과 좌천]

왜구가 창릉에 침입하여 세조의 어진을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최영은 계림부윤으로 좌천되다.

1365년(공민왕 14년) 왜구가 교동·강화를 노략질하자 동서강도지휘사(都指揮使)로서 왜구를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 14년(1365년) 3월 11일 창릉에 침입한 왜구가 세조의 어진을 훔쳐가는 사건이 벌어지자, 직후 동서강도지휘사는 김속명으로 교체되고 최영은 신돈에 의해 계림부윤(鷄林府尹)에 좌천되었습니다.

1371

[신돈 몰락 후 복권]

신돈이 처형되고 그 일파가 몰락하자, 최영이 소환되어 문하찬성사가 되다.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이 처형되고 그 일파가 몰락하자, 최영은 곧 소환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며 복권되었습니다.

1374

[제주 목호의 난 진압]

최영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하고, 양광전라경상도통사로 임명되다.

1374년(공민왕 23년), 최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탐라 토벌군의 양광전라경상도통사로 임명되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습니다. 이때부터 왜구들은 최영을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1376

[홍산대첩과 철원 부원군 봉작]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철원 부원군에 봉작되어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다.

1376년(우왕 2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 박원계가 참패하자, 최영은 육군을 이끌고 논산시 연산면의 개태사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피봉되었습니다. 이 전투 이후 왜구들은 최영을 '백수 최만호'라 부르며 몹시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1377

[서강 왜군 격퇴]

최영이 서강에 쳐들어온 왜군을 격퇴하다.

1377년, 최영은 서강(西江)에 쳐들어온 왜군을 격퇴하며 계속해서 왜구 침략에 맞서 싸웠습니다.

1378

[승천부 왜구 섬멸과 안사공신]

이성계 등과 힘을 합하여 승천부 왜구를 섬멸하고 안사공신의 호를 받다.

1378년(우왕 4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 풍덕)에 쳐들어와 개경까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최영은 이성계, 양백연 등과 힘을 합하여 적을 쳐서 섬멸시키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받았습니다.

1380

[수도 천도 반대]

왜구 침략으로 인한 수도 천도 계획에 반대하여 철회시키다.

1380년, 왜구의 침략으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려 하자 최영은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로서 왜구 때문에 수도를 천도할 수 없다며 계획을 반대하여 철회시켰습니다.

1381

[서녀 입궁에 따른 벼슬 사퇴]

우왕이 서녀 영비 최씨를 후궁으로 삼겠다고 강요하자, 최영이 벼슬을 사퇴하다.

우왕이 그의 서녀 영비 최씨를 자신의 비로 삼겠다고 강요하자, 최영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고 거절하였으나 우왕이 끝내 요구하므로 마지못해 승낙하였습니다. 이후 1381년 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을 지내고 벼슬을 사퇴했습니다.

1388

[조반의 난과 권문세족 숙청]

염흥방의 횡포로 조반의 난이 발생하자, 우왕의 명으로 최영과 이성계가 권문세족 염흥방, 임견미 등을 숙청하다.

우왕 13년(1387) 염흥방의 종 이광이 조반의 땅을 빼앗자 조반이 이광을 죽였습니다. 염흥방은 오히려 조반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허위보고를 했습니다. 1388년(무진년) 정월 초하루, 염흥방이 우왕에게 강권하여 조반을 수배했고 고문까지 시도했습니다. 이에 우왕은 전횡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최영과 이성계에 명하여 병력을 동원, 왕궁을 숙위하게 하고 삼사좌사 염흥방을 비롯한 영삼사사 임견미, 찬성사 도길부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철령위 문제와 요동 정벌 주장]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통고에 반발하여 최영이 요동 정벌을 주장하다.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 쌍성총관부 지역이었다며 철령위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겠다는 통고를 고려에 보내왔습니다. 이에 반발한 최영은 우왕과 함께 요동을 공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요동 정벌군 총사령관 임명 및 출진]

요동 정벌군 총사령관 겸 팔도 도통사에 임명되어 이성계, 조민수를 부장으로 삼아 평양까지 출진하다.

1388년 4월, 최영은 요동 정벌 계획이 서자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요동정벌군을 이끌었습니다. 이성계, 조민수를 부장으로 삼고 우왕과 함께 평양에까지 출진하게 되었습니다.

[위화도 회군과 최영 체포]

요동 정벌 중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체포되어 유배되다.

5월, 요동정벌 선봉대가 압록강 어귀의 위화도에 도착했으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라는 최영의 명령에 불복, 군대를 돌려 수도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최영이 크게 노하여 맞섰으나 이성계 일파에 붙잡혀 투옥되고, 경기도 고봉에 유배되었습니다.

[최영 피살]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피살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다.

위화도 회군 이후 유배되었던 최영은 두 달 후 개경으로 소환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향년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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