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고려 군사 조직, 항몽 세력, 반란군, 무신 정권 사병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18
고려 무신정권 시기 최우가 도둑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시작된 군사 조직입니다.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재편되며 '삼별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몽골 침략에 대항하여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진도, 제주도를 거점으로 약 4년간 항전했습니다. 고려 말 혼란기에 강력한 항전 의지를 보인 무장 세력으로 기록됩니다.
1174
[별초의 첫 등장]
고려 무신정권 초반 조위총의 난 당시 '별초'가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는 기존 정규군 외에 새로 편성된 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 별초 조직의 시초가 됩니다.
고려 무신정권 초기에 조위총이 일으킨 반란 때 '별초'라는 군대가 처음으로 기록됩니다. 별초는 기존의 정규 군사조직과는 별개로 새로이 편성된 군대를 의미하며, 이후 지역별, 신분별 별초 등으로 변화하며 고려 전기의 군사 조직을 대체하는 새로운 군사 조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들은 몽골 침입 이전부터 존재하며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219
[야별초 설치]
최우가 도둑을 막고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병 조직인 야별초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직은 후에 몽골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재편됩니다.
고려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우가 도둑을 막는다는 명목과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야별초를 조직했습니다. 초기에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에 가까웠으나, 이후 몽골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정규군으로 재편되는 기반이 됩니다. 이 야별초가 삼별초의 시초가 됩니다.
1231
[몽골 침략 시작 및 강화도 천도]
몽골 제국의 침략이 시작되자, 최씨 일가를 비롯한 고려 지배층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 장기간 항전을 준비했습니다. 이는 삼별초 항쟁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1231년부터 몽골 제국의 침략이 고려 전역으로 확대되자, 당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씨 무신정권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전략적 요충지인 강화도로 천도했습니다. 이는 몽골군에 대한 장기 항전을 위한 조치였으며, 이후 삼별초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232
[삼별초 공식 편성]
야별초가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고,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이들로 구성된 신의군이 추가되어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삼별초는 대몽항쟁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최우가 설치한 야별초는 몽골 침략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재편되었고, 여기에 몽골에 붙잡혔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구성된 신의군이 합류하며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최씨 무신정권의 직할 부대이자 대몽 항쟁의 주요 군사력으로 성장했습니다.
1258
[최씨 무신정권 종식]
김준이 최충헌의 증손인 최의를 살해하면서 약 60년간 이어져 온 최씨 무신정권이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 내부 권력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258년, 당시 실력자였던 김준이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인물인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1196년 최충헌이 집권한 이래 약 60년간 지속되었던 최씨 일가의 독재 시대가 종식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는 새로운 무신 지배 체제로 전환되었으나, 몽골에 대한 항쟁 의지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습니다.
1267
[고려, 일본에 몽골 통호 권유]
원종 8년 쿠빌라이 칸의 요구로 고려는 일본에 몽골에 사신을 파견할 것을 권유하는 국서를 보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고려 사신을 돌려보냈습니다.
1267년(원종 8년),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일본을 복속시키기 위해 고려 원종에게 일본에 사신을 보내 통호를 권고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에 고려는 일본에 몽골 사신 파견을 권유하는 국서를 보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고려 사신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이 국서의 내용은 몽골 황제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나라가 없음을 천하에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1270
[원종의 개경 환도 단행]
몽골에 굴복한 고려 원종이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개경 환도를 단행했습니다. 이는 원 간섭기의 시작을 의미하며, 삼별초가 항전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270년 음력 5월, 고려 원종은 몽골에 굴복하고 개경으로의 환도를 강행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100년간 이어지던 무신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무인정권의 잔재인 임유무는 저항했으나 삼별초의 도움으로 원종은 임유무를 암살하고 무신 정권을 완전히 종식시켰습니다. 개경 환도는 몽골에 대한 고려의 굴복을 상징하여 삼별초의 강력한 반발을 샀습니다.
[삼별초의 항전 결정 및 진도 이동]
개경 환도에 반발한 삼별초 지휘자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왕족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의 거의 모든 재산과 병력을 이끌고 진도로 이동하며 본격적인 대몽 항전을 시작했습니다.
1270년 음력 6월 초, 몽골에 굴복한 원종이 개경 환도를 명령하고 삼별초 해산령을 내리자, 삼별초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항전을 결심했습니다. 지휘자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의 대선단에 백성과 재물을 싣고 전라남도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하며 몽골과 고려 정부에 대항하는 항전을 전개했습니다.
[삼별초의 제주도 점령]
진도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삼별초군이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고 제주도까지 점령하며 해상력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진도에 거점을 마련한 삼별초는 남해안 일대를 빠르게 석권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270년 음력 11월에는 전략적 요충지인 제주도까지 점령하여, 해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항전 정부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일본과의 외교 활동도 시도했습니다.
1271
[진도 삼별초 진압 및 배중손 사망]
몽골과 고려 연합군의 대대적인 진도 공격으로 삼별초는 큰 타격을 입고, 지휘자 배중손과 왕온이 전사 또는 살해당하며 진도는 함락되었습니다.
1271년 음력 5월, 몽골과 고려 연합군이 좌군, 중군, 우군의 세 방향으로 진도를 공격했습니다. 삼별초는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으나, 연합군의 기습 공격으로 성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지휘자 배중손과 추대되었던 왕족 왕온이 살해당하며 진도 항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김통정의 제주도 후퇴]
진도 함락 이후 살아남은 삼별초 병사들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혼란을 수습하고, 마지막 항전 거점인 제주도로 이동했습니다.
진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살아남은 삼별초 병사들은 새로운 지휘관 김통정의 통솔 아래 전열을 가다듬고 제주도로 후퇴했습니다. 제주도는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 기지가 되어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삼별초, 일본에 병력 지원 요청]
삼별초 세력이 진도 함락 전후에 일본에 몽골을 비난하고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습니다. 이는 일본측 기록인 《고려첩장 불심조조》를 통해 확인됩니다.
1271년 9월 5일, 진도를 거점으로 항전하던 삼별초 세력은 일본에 몽골을 '짐승 가죽 걸친 놈' 등으로 비난하고, 일본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습니다. 이 국서는 일본의 《길속기》와 《고려첩장 불심조조》에 기록되어 있으며, 삼별초가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자처하며 일본과의 공동 대몽 항전을 기대했음을 보여줍니다.
1273
[제주도 삼별초 최종 진압 및 김통정 사망]
제주도로 상륙한 몽골-고려 연합군 1만여 명의 공격으로 삼별초는 최종적으로 궤멸하고, 지휘자 김통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4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이 막을 내렸습니다.
1273년 음력 4월, 몽골-고려 연합군 1만여 명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삼별초의 마지막 거점을 공격했습니다. 삼별초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수적 열세와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휘자 김통정은 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로써 1270년부터 시작된 4년에 걸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