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

고려 무신, 정치인, 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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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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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 정치인, 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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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무신정권의 핵심 인물. 이의민을 제거하고 23년간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며 최씨 무신정권을 확립했다. 명종과 희종을 폐위하고 신종, 강종, 고종을 차례로 옹립하는 등 강력한 왕권 제약 능력을 보여주었다.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감독했으며, 문신을 중용하여 문치정권을 가장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반역자로 기록되었으나, 고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인 정치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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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9

[최충헌 출생]

고려 무신이자 최씨 정권의 첫 지도자인 최충헌이 개성 우봉에서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최난이었으나 후에 충헌으로 고쳤다.

1149년 개성 우봉에서 상장군 최원호와 진강국대부인 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최난이었고, 시호는 경성이다. 조부 최정현, 증조부 최주행의 이름이 묘지명을 통해 알려졌다. 아래로 동생 최충수와 누이들이 있었다.

1174

[조위총의 난 진압 기여]

무인 집권에 반발한 조위총의 난이 발생하자, 진압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해 전봉별초가 설치될 때 별초도령에 올랐으며, 후에 섭장군이 되었다.

1174년(명종 4년) 무인 집권에 반발하여 일어난 조위총의 난 진압에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같은 해 전봉별초가 설치되자 별초도령에 임명되었고, 이후 섭장군이 되었다. 관직은 흥위위 보승산원, 위위시주부 등을 거쳤다.

1196

[이의민 제거 및 집권]

동생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과 그의 아들들을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1196년 음력 4월 8일, 미타산 별장에서 이의민을 습격하여 죽이고 그의 머리를 저자에 효수했다. 이어서 이의민의 심복들을 모두 처치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명종에게 그릇된 정치 시정과 임금의 반성을 촉구하는 10조목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1196년(명종 26년) 동생 최충수와 함께 정권을 잡고 있던 이의민 일가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음력 4월 8일, 미타산 별장에서 이의민을 습격해 죽이고 그의 머리를 저자에 효수했으며, 남은 이의민의 심복과 아들들을 모두 처치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명종에게 10조목의 봉사(封事)를 올려 그릇된 정치의 시정과 임금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 봉사는 당시의 폐단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정치적 식견을 보여주었다.

1197

[명종 폐위와 신종 옹립, 동생 최충수 살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자신을 위협하는 명종을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명종의 동생 평량공 민을 옹립하여 신종으로 즉위시켰다. 이로써 최씨 일가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자신의 딸을 태자의 비로 삼으려 했던 동생 최충수와 무력 충돌 끝에 최충수를 살해하며 군국 대권을 독점했다.

1197년, 명종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최충헌의 신변을 위협하자, 명종을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명종의 친동생인 평량공 민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고려 신종이다. 이로써 최충헌은 명종 때의 근신들을 모두 내쫓고 최씨 일가에서 정권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정국공신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주국에 책봉되었다. 신종 옹립 다음 달, 자신의 딸을 태자(뒷날의 희종)의 비로 삼으려던 동생 최충수와 무력 충돌이 발생, 결국 최충수를 살해하고 군국(軍國) 대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정적 두경승 숙청]

이의민 숙청 후 무인 실력자였던 두경승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사위 류삼백을 매수하여 유인한 뒤 체포했다. 1197년 9월, 두경승을 자연도로 유배 보냈으며, 류삼백 또한 반역 혐의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

1197년 9월, 이의민 숙청 후 남은 무인 실력자였던 두경승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을 실행했다. 두경승의 사위인 장군 류삼백을 매수하여 그를 유인, 체포한 뒤 자연도에 유배 보냈다. 이후 류삼백마저 반역을 한다고 의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류삼백의 부친은 남쪽 변방에 유배했다.

1198

[만적의 난 진압]

자신의 가노인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는 주장을 하며 반란을 모의했으나, 거사일 전 밀고로 발각되어 만적 등 100여 명을 강에 수장시키며 난을 진압했다. 밀고한 한충유와 순정에게는 벼슬과 상을 내렸다.

1198년(신종 1년) 5월, 자신의 가노인 만적이 연복, 성복 등과 함께 개경 북산에서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며 노비 반란을 모의했다. 그러나 거사일에 모인 노비는 수백 명에 불과했고, 거사일을 연기하던 중 율학박사 한충유의 종 순정이 주인에게, 다시 한충유가 최충헌에게 거사 계획을 밀고했다. 이에 최충헌은 만적 등 100여 명을 붙잡아 강에 수장시키며 난을 진압했다. 한충유에게는 합문지후 벼슬을, 순정에게는 백금 80냥과 면천을 주었다.

1199

[군권 및 인사권 장악과 도방 재설치]

병부상서와 이부지사를 겸하며 군권과 조정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자신을 처치하려는 음모가 자주 발생하자 경대승이 설치했던 도방을 다시 설치하여 신변을 보호했다.

1199년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이부지사(吏部知事)를 겸하여 군권과 조정 인사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김준거의 난을 토벌했다. 1200년(신종 3년) 그를 처치하려는 음모가 자주 발생하자 경대승이 두었던 도방을 다시 설치하여 신변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1202년 삼중대광 수대위상주국이 되었고, 추밀원사·이병부상서·어사대부로서 경주 별초군의 반란을 진압했다.

1204

[신종 폐위와 희종 옹립]

신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강요하여 태자에게 왕위를 넘기게 했고, 태자가 희종으로 즉위했다. 희종은 최충헌을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이라 칭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최충헌은 문하시중 진강후에 봉해졌으며, 진강군을 식읍으로 받았다.

1204년 최충헌은 신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강요하여 태자(고려 희종)에게 왕위를 양위케 했다. 희종은 최충헌을 신하의 예로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하였다. 얼마 뒤 최충헌은 문하시중 진강후(晋康候)가 되었으며, 진강군(지금의 진주 일대)을 식읍으로 받았다.

1209

[교정도감 설치 및 문운 재흥 노력]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화를 중흥시키려 노력했다. 같은 해 4월, 청교역 관리들의 최씨 부자 살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영은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감독하게 했으며, 이는 최씨 일문의 무단 통치에 중요한 중앙기관이 되었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운(文運)을 재흥시키려고 힘썼다. 그해 4월 청교역(靑郊驛)의 관리들이 최씨 부자 살해 미수 사건을 일으키자, 영은관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했다. 이 교정도감은 혐의자 색출에서 시작하여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하게 되었고, 이후 최씨 일문이 무단정치를 함에 있어 일본의 막부와 같은 중요한 구실을 했다.

1211

[희종 폐위와 강종 옹립]

1211년 12월, 자신의 권세에 눌려 불안해하던 희종이 내시 왕준명 등과 함께 자신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최충헌은 희종과 태자를 폐하고, 명종의 아들 한남공 정(貞)을 옹립하여 강종으로 즉위시켰다.

1211년 12월, 최충헌의 권세에 눌려 항상 불안해하던 희종이 내시 왕준명을 중심으로 참지정사 우승경, 장군 왕익 등과 함께 최충헌을 제거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했다. 그 결과, 최충헌은 희종과 태자를 폐위시키고, 명종의 아들인 한남공 정(貞)을 옹립하여 왕위에 즉위시켰는데, 이가 바로 고려 강종이다.

1213

[강종 사망 후 고종 옹립]

1213년, 강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 만에 사망하자, 그의 태자인 진(瞋)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곧 고려 고종이다. 이로써 최충헌은 신종, 희종, 강종, 고종 등 네 임금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며 최씨 무신정권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1213년, 강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었다. 이에 최충헌은 강종의 태자 진(瞋)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으니, 이가 곧 고려 고종이다. 최충헌은 이와 같이 일생동안 신종·희종·강종·고종의 네 임금을 자기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1217

[흥왕사 승려 반란 진압]

1217년,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 승려들의 음모를 다시 적발하고 관련자들을 처형하며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1217년,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興王寺) 승려들의 음모를 또다시 적발하여 관련자들을 처형했다. 이 시기부터 반대파를 대량 숙청하고 백성들에 대한 횡포가 심해졌다는 평가가 있다.

1219

[최충헌 사망]

23년간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며 최씨 정권의 기틀을 마련했던 최충헌이 1219년 10월 29일(음력 9월 20일) 개성 안흥리 자택에서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직전, 후계 다툼을 염려하여 아들 최우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1219년 10월 29일 (음력 9월 20일), 23년간 고려의 실권을 장악했던 최충헌이 개성 안흥리 자택에서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죽기 전 연회를 열다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년에 두 아들 최우와 최향 간의 권력 다툼을 염려하여 병상에서도 아들 최우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충헌 매장]

사망 후 1219년 12월 24일, 개성부 봉황산 서남쪽 기슭에 매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고려 임금의 장례식과 다름없이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전해진다.

1219년 12월 24일, 최충헌의 시신은 개성부 봉황산(鳳凰山) 서남쪽 기슭에 매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고려의 임금의 장례식과 다를 바 없이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사후 4대에 걸쳐 최씨 무신정권의 세습 권력을 닦았으나, 고려 멸망 후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반역 열전에 길게 실리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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