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
승려, 문신, 혁명가, 서경파 지도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15
고려 중기 서경 출신의 승려이자 문신.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며 인종의 왕사가 되었다. 대화궁 건설을 주도했으나, 개경파의 반대로 천도론이 무산되자 대위국을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운동은 1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후대 단재 신채호에 의해 민족 자주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재평가되었다.
1126
[풍수지리설 활동 시작]
서경에서 승려 백수한과 함께 음양비술을 활용한 풍수설로 백성들을 현혹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 사회에 널리 퍼진 풍수지리설에 힘입어 큰 호소력을 얻었다. 유교 관료들의 사대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칭제건원과 서경 천도론의 기반을 다졌다.
묘청은 현재의 평양인 서경 출신으로, 출생과 출가 사찰은 전해지지 않는다. 불교 교리 외에도 도교의 비의에 능통했다. 1126년 백수한이 검교소감으로 서경에 파견되자 묘청을 스승이라 칭하며 음양비술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현혹했다. 당시 고려는 신라 말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 묘청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졌다. 그는 유교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
1127
[인종의 왕사 책봉]
서경파의 정지상 추천으로 궁궐에 출입하게 되었고, 달변으로 인종의 감탄을 사 왕사로 임명되며 인종의 고문이 되었다. 도참설을 근거로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며 정치 개혁의 중심에 섰다.
1127년 서경 출신 정지상의 추천으로 묘청은 궁궐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인종은 묘청의 달변에 감탄하여 그를 왕사로 임명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당시 고려 정계는 이자겸의 난 이후 진보적인 서경파와 보수적인 개경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묘청은 정지상과 함께 신진 관료들이 주축이 된 서경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는 도참설을 근거로 서경 천도와 금국정벌론을 펼쳤다.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했다.
1128
[서경 대화궁 건설 착수]
묘청의 진언에 따라 인종은 서경 임원역에 새로운 궁궐인 대화궁 건설을 시작했다. 이는 서경 천도의 현실화를 위한 첫걸음이자, 묘청이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을 겪으며 인종은 개경 귀족 세력이 왕권을 수호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왕실의 위상을 되찾고자 국도를 옮길 생각을 했다. 묘청은 서경 임원역의 땅이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이며, 이곳에 궁궐을 짓고 왕이 옮겨 앉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고 금나라가 항복하며 주변국들이 조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묘청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인종은 서경을 방문하여 임원역의 지세를 보게 했고, 1128년 11월 김안으로 하여금 궁궐 신축 공사를 감독토록 했다. 이로써 서경에 대화궁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129
[칭제건원 및 금국정벌론 제기]
대화궁 완공 후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인종에게 황제 칭호 사용과 독자 연호 제정(칭제건원)을 권하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고려에게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던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이었다.
1129년 2월 대화궁이 완성된 후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여 낙성식을 가졌다. 이때 묘청을 비롯한 서경세력은 표문을 올려 왕을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칭제건원)를 사용할 것을 권고했으며, 주변국과 협공하여 금나라를 치자고 주장했다. 묘청은 북방에서 힘을 키워 고려에게 형제 관계를 맺자며 스스로 형이라고 자처하던 금나라의 오만한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고려 관료들이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개경파 중신들의 반대로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32
[서경 천도 좌절]
묘청은 개경 궁궐터가 서경보다 못하다고 역설하며 서경 천도를 적극 추진했으나, 김부식을 필두로 한 사대주의적 개경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천도 계획이 중지되었다. 이로 인해 묘청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131년 묘청은 인종을 설득해 새 궁궐에 팔성당을 신축했다. 이듬해인 1132년, 이자겸의 난으로 불탔던 개경 궁궐의 영수 작업을 논의할 때 묘청은 개경의 궁터가 서경보다 못하다고 주장하며 서경 천도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아 서경으로 내려가 천도를 결정하려 했으나, 김부식, 이지저 등 사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개경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천도 공사는 중지되었다. 서경으로 향하던 인종의 행차 중 폭우와 돌풍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하여 개경파의 비난이 더욱 거세졌다.
1135
[묘청 피살과 반란 진압]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묘청 일파는 김부식이 원수로 임명된 토벌군에 의해 압박받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반란군 내부의 조광이 묘청을 참수하며 항복을 시도했으나, 대위국은 1년여를 더 버티다 결국 진압되었다. 묘청의 시신은 부관참시되었다.
인종은 서경의 반란 소식을 확인한 후 백관 회의를 통해 반란군 토벌을 결정하고 김부식을 원수로 임명했다. 김부식의 대군이 출병하고 안북대도호부에 도착하자, 반란군 지역의 많은 성들이 개경군에 호응하며 전세는 대위국에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김부식은 반란군 장군들에게 항복을 종용했고, 결국 반란군 내부의 조광이 묘청을 참수했다. 묘청이 제거된 후에도 대위국은 약 1년여간 더 저항했으나 결국 고려군에 의해 진압되어 그 자취가 사라졌다. 사망 당시 묘청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서경성을 난입한 고려 병사들에 의해 다시 부관참시되었다.
[묘청의 난 발발, 대위국 수립]
1134년 말 인종이 서경 행차를 거부하자, 묘청은 조광 등 서경파 인사들과 함께 서경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주도했다.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며 개경 세력을 제거하고 서경 천도를 실현하려 했다.
1133년 묘청을 멀리하라는 상소가 있었으나 인종은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1134년 묘청에게 자색 관복을 하사하며 신임을 보였다. 그러나 묘청의 '칭제건원' 주장이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의 반대로 다시 무산되면서 조정은 서경파와 개경파로 분리되어 치열한 대립을 벌였다. 대화궁 건설 후 잇따른 재화로 묘청의 입지가 약화된 상황에서, 인종이 서경 행차를 거부하자 1135년 1월 4일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참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시작했다. 이들은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군호는 천견충의군으로 칭했다. 묘청은 왕을 교체하려는 역모가 아닌, 개경 세력을 제거하고 서경 천도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으로 판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