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
고려 문신, 군인, 여진족 토벌가, 파평 윤씨 중시조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13
고려 중기, 숙종과 예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한 명장이자 문신입니다. 그는 특수부대 별무반을 창설하여 고려의 북방 영토를 확장했으나, 9성 반환이라는 비운의 역사도 겪었습니다. 파평 윤씨의 기틀을 마련한 중시조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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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출생]
파평현(現 파주시)에서 검교소부소감 윤집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윤관은 삼한공신 윤신달의 4대손이며, 그의 가계는 훗날 고려와 조선의 왕실과 혼인하는 명문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고려 양광도 파평현(현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에서 검교소부소감 윤집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삼한공신 윤신달의 증손자로 벼슬은 검교소부소감을 지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가문은 이후 왕실과 혼인하는 등 당대의 명문으로 거듭났습니다.
1046
[문과 급제 및 관료 생활 시작]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습유, 보궐 등을 지내며 초기 관료로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군인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습니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 보궐 등을 지내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가 되어 광주, 충주, 청주를 시찰하기도 했습니다. 군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습니다.
1095
[요나라에 국신사로 파견]
좌사낭중에 임명되었고, 숙종이 즉위하자 형부시랑 임의와 함께 국신사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습니다. 이는 그의 국제적인 외교 활동의 시작이었습니다.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이 되었으며,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국신사(國信使)로 요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습니다. 1098년에는 동궁시학사로 재직 중 조규와 함께 송나라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다시 숙종의 즉위를 알리기도 했습니다.
1101
[남경 건설 사업 주도]
추밀원지주사가 된 후 남경개창도감 설치를 주도하며 남경(현 서울) 건설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평장사 최사추 등과 함께 궁궐터를 물색하여 1104년 5월 남경궁이 건설되었습니다.
1101년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9월에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자 평장사 최사추 등과 양주에 파견되어 궁궐터를 물색하는 등 남경 건설 사업을 활발히 추진했습니다. 그리하여 1104년 5월 지금의 서울지역에 남경궁(南京宮)이 건설되었습니다.
1104
[여진족 정벌 실패 및 특수 부대 창설 구상]
숙종 때 여진족 토벌에 원수로 출정했으나 실패하여 강화회담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여진족의 기병에 대항할 특수 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숙종 때 2차 여진족 토벌 당시는 원수로 출정하였으나 실패, 강화회담을 하고 되돌아왔습니다. 이후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하여 오연총과 함께 병력을 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여진족의 기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107
[별무반 창설 및 여진족 토벌, 동북 9성 축조]
예종의 명을 받아 여진 정벌군의 대원수가 되어 별무반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 토벌에 출정했습니다. 고려군은 여진족 촌락 135개를 격파하고 포로를 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며, 동북 9성을 쌓아 북방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1107년(예종 2년) 12월,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고 여진족 토벌을 주청했습니다. 이에 왕명으로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이끌고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 정벌에 출정했습니다. 고려군은 여진족 촌락 135개를 쳐서 포로 1030명, 사살 4940명 등 큰 공을 세웠고, 북방에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통태진, 진양진, 숭녕진의 9성을 쌓았습니다.
1108
[재침 여진족 토벌 및 개선]
9성 완공 후 재침하는 여진족을 평정하기 위해 오연총, 척준경 등과 함께 다시 출정했습니다. 가한촌 전투에서는 여진족에 포위당했으나 척준경의 활약으로 구출되었고, 여러 전투 끝에 적을 물리쳤습니다.
9성을 완공한 뒤 재침하는 여진족을 평정하기 위해 1108년(예종 3년) 1월 오연총, 척준경, 왕자지 등과 함께 별무반을 이끌고 다시 출정했습니다. 가한촌 전투 중 험곡에서 오연총과 함께 여진족에게 포위당했으나 척준경의 후발대 급습으로 구출되었습니다. 여러 전투 끝에 적을 패퇴시켰고, 3월 30일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개경으로 개선했습니다. 추충좌리평융 척지진국공신에 책록되고, 문하시중 겸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에 임명되었으며, 영평현개국백에 봉해졌습니다.
[동북 9성 반환]
여진족이 9성 반환을 요청하며 강력히 저항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9성 유지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원망 등으로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윤관은 반대했지만, 결국 7월 18일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고려의 정벌과 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무력항쟁을 계속하며 9성 반환을 요청했습니다. 1108년 7월 3일,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여 9성 반환을 논의했고, 윤관과 오연총은 반대했으나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9성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금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1109
[길주성 패전 및 공신호 박탈]
길주성이 여진족에게 위협받자 출정했으나 공험진에서 기습 공격을 받고 공략에 실패했습니다. 이로 인해 재상들의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하고 파면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1109년 5월, 길주성이 여진족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동계병마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출정했습니다. 그러나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족을 다시 치려다가 공험진에서 기습공격을 당하고 공략에 실패, 화친을 맺고 돌아왔습니다. 11월 여진족의 계속된 침범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재상 최홍사 등의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과 공신의 자격이 박탈되고 파면되었습니다.
1110
[예종의 배려로 복직]
예종의 특별 배려로 복직하여 문하시랑 평장사, 수태보 문하시중 등의 고위직에 임명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사직을 청했으나 예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파면되었으나 예종의 특별 배려로 다시 복직했습니다. 예종 5년(1110년) 복관되었고, 예종은 윤관에게 문하시랑 평장사를 주고 가까이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윤관은 나이가 많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곧 사직했고, 그 해 수태보 문하시중 겸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임명되자 다시 사직을 청하였으나 예종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111
[윤관의 사망]
고려 개경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사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묘는 현재 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하며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111년 6월 15일(음력 5월 8일) 고려 개경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원래는 문경(文敬)이었으나 인종 때 문경왕태후의 휘호를 피하기 위해 문숙으로 개시되었습니다. 1130년(인종 8년) 고려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에 있으며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130
[예종 묘정에 배향]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국가적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업적이 후대에도 높이 평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130년(인종 8년) 고려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습니다. 이는 윤관의 업적이 후대에까지 인정받고 국가적인 예우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