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군주, 군인, 호족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08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등장하여 후백제를 건국하고 초대 국왕으로 재위하며 후삼국 시대를 이끌었다. 고려 태조 왕건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아들 신검의 정변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후 고려에 귀순, 왕건과 함께 후백제 멸망에 기여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867
[신라의 장군,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나다]
신라 사벌주 가은현(현재 문경시 가은읍)에서 아버지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호랑이가 젖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비범한 인물로 알려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867년 사벌주(상주) 가은현(현재 문경시 가은읍)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짓다 광계 연간에 장군을 칭했다. 어린 시절 호랑이가 젖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등 비범한 인물로 성장했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뜻과 기상이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885
[아버지 아자개, 신라 말기 혼란 속 거병]
신라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속출하던 광계 연간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집안을 일으켜 장군을 칭했다.
《삼국유사》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광계 연간(885년~887년)에 거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신라에서 원종 애노의 난(889년)이 일어나는 등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속출하던 때로, 아자개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난 호족의 일원으로 추정된다.
889
[신라 장군 견훤, 반란을 일으키고 무진주 점령]
신라의 장군으로 서남해 방수를 맡고 있던 견훤이 반란을 일으켜 열흘 만에 5천 명의 군사를 모았고, 무진주(현재 광주)를 점령하며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했다.
《삼국사기》는 892년에, 《삼국유사》는 88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889년은 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난 해로, 견훤은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적 독립을 이룬 뒤 892년 무진주를 점령하며 독자적인 정부 체제를 수립했다. 그는 섣불리 왕을 칭하는 대신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를 칭하며 세력 확장에 나섰다.
900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 건국]
통일신라의 완산주(현재 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하고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신라 말기 혼란 속에서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려는 견훤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900년, 견훤은 통일신라의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다. 이로써 그는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반란군 지도자에서 새로운 국가의 국왕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후삼국 시대의 주요 세력 중 하나로 부상했다.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903
[태봉 해군에 금성(나주) 일대 10여 군현 빼앗기다]
태봉의 해군 기습에 의해 금성(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이는 후백제 후방의 해상 교통로 노출과 중국과의 교역 및 외교에 심각한 타격을 초래하는 중대한 국가적 손실이었다.
903년(일부 학설은 909년), 태봉의 해군 기습으로 금성(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나주 지역은 중국과 외교 및 무역 교섭의 주요 항로였기에, 이곳을 잃은 것은 후백제에게 해상 봉쇄와 국력 확장의 제약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안겨주었다. 이후 견훤은 나주를 탈환하기 위해 909년부터 910년까지 마진(태봉)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실패했다.
906
906년, 견훤은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궁예의 명을 받고 정기장군 검식 등을 거느리고 온 왕건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결국 왕건에게 패배하며 세력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912
[궁예와 왕건 연합군에 덕진포 해전에서 패배]
덕진포에서 해군을 이끌고 친정한 궁예와 왕건 연합군과의 해전에서 패배하며 해상 통제권을 상실했다. 이는 고려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912년, 덕진포에서 궁예와 왕건이 해군을 이끌고 친정한 연합군과 해전을 벌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선각국사비에 나와 있으며, 현재 학계의 유력한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패배는 왕건의 고려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평가받지만, 실제 후백제의 국력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918
[왕건의 고려 건국, 견훤은 축하 사절 파견]
태봉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여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을 축하 사절로 보내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918년 6월, 태봉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을 통해 공작의 깃털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보내며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동시에 오월에도 사신을 보내며 다각적인 외교를 펼쳤다.
[아버지 아자개, 고려 왕건에게 항복]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했다. (아자개가 견훤의 친아버지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918년 9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때 항복한 아자개가 견훤의 친아버지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920
[오랜 숙원이었던 대야성 공략 성공, 구사성 함락]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19년 만에 대야성 공략에 성공하고 구사성까지 함락시키며 신라 본토 습격의 길을 열었다.
920년 10월, 견훤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대야성 공략에 성공했다. 과거 대야성 공격에서 패배를 경험한 지 무려 19년 만의 일이었다. 후백제군은 대야성을 빼앗음으로써 신라 본토를 습격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고, 승세를 타고 구사성까지 함락시켰다.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했으나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물러났다.
924
[조물성 공략 실패 후 왕건과 화친, 인질 교환]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조물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고, 이후 직접 3천 기를 이끌고 조물성을 내습했다가 왕건과 화친하고 왕신과 진호를 인질로 교환했다.
924년 7월,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고려의 구원군을 물리쳤지만 성 함락에는 실패했다. 925년 10월에는 직접 3천 기를 이끌고 조물성을 내습하여 왕건과 반격에 나섰다. 싸움의 초반은 견훤군이 유리했으나 유금필군의 지원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양측은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를 인질로 교환하며 화친을 맺었다.
925
[신라 거창 등 20여 성 공격, 후당으로부터 백제왕 책봉]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백제왕'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925년 12월, 견훤은 화친 후에도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후당에 사신을 보내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으며 국제적 승인을 얻었다.
926
[고려에 보낸 조카 급사 후 왕신 살해, 웅진 방면으로 진격]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자 (암살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 왕신을 살해하고 웅진(공주) 방면으로 진격하여 웅주와 운주 일대를 점령했다.
926년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견훤의 조카가 급사했다. 이를 견훤이 신라 침공 중단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고려의 보복으로 보고, 견훤은 인질로 잡고 있던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을 살해하며 대응했다. 이후 웅진 방면으로 진격하여 웅주와 운주, 그리고 주변 일대를 모두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927
[공산 전투 대승 이후 경상도 일대 장악, 고려 보급로 차단]
공산 전투 대승 이후 대목군(칠곡 약목), 소목군(구미 인동), 벽진군(성주) 등을 차례로 공격하여 점령하고 곡식을 약탈하며 고려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927년 9월, 공산 전투 대승 이후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10월에는 소목군(구미 인동)에도 침공을 이어갔고, 11월에는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장군 색상을 전사시켰다. 이로써 서라벌로 가는 길이 다시 확보되었으며, 남쪽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를 잘라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서라벌 유린, 경애왕 자진토록 하고 경순왕 옹립하여 신라 사실상 멸망]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군이 오기도 전에 서라벌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사로잡아 자진토록 하고, 궁녀들과 간음하게 하며 약탈을 감행했다. 이후 경순왕을 신라의 새 왕으로 세워 신라를 사실상 멸망시켰다.
927년 9월, 친고려 정책을 펼치던 신라 경애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의 군대가 오기도 전에 견훤은 단숨에 서라벌로 들이닥쳤다. 그는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부하들에게 궁녀들과 간음케 하며 병사들을 풀어 마음껏 약탈을 일삼았다. 장인과 병기, 보배들을 약탈해 돌아갔으며, 왕의 외종제인 김부를 새 경순왕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견훤은 신라를 사실상 멸망시켰으나, 신라 유민들이 왕건에게 귀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순왕을 옹립하여 직접적인 멸망은 피했다.
[공산(팔공산) 전투에서 왕건군 대파, 신숭겸 등 개국공신 전사]
경주를 유린한 뒤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과 대구 공산(팔공산) 동수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왕건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주했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 고려의 뛰어난 장수들이 전사했다.
927년 9월,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의 원병을 의식해 말머리를 돌려 기병 5천을 이끌고 대구 공산(팔공산) 동수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 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도주했다. 신숭겸은 왕건과 용모가 비슷함을 이용해 왕건으로 위장, 전투 중 전사하며 왕건의 탈출을 도왔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5천명 이상 (일부 학자들은 1만~2만)의 군사와 신숭겸, 김락 등 개국공신을 잃으며 고려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 대승리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고, 공산은 팔공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928
[강주 재습격, 삼년산성 전투에서 유금필에게 패퇴]
강주를 습격하여 고려군 3백여 명을 전사시키고 장군 유문 등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삼년산성 공격 시에는 유금필의 반격으로 3백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며 퇴각했다.
928년 5월, 견훤은 강주를 습격하여 진경의 군 3백여 명을 전사시키고 장군 유문 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7월에는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했으나 후백제군에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해야 했다. 김훤, 애식, 한장 등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청주를 공격했으나 탕정군에서 지원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유금필의 반격으로 3백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독기진까지 물러났다. 박수경의 구원으로 왕건이 위기에서 벗어난 '발성 전투' 또한 이 시기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어곡성 함락, 고려 장수 양지, 명식 등 항복]
정예 병력을 이끌고 오어곡성(부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여 명을 죽였다. 이 무렵 고려의 장군 양지, 명식 등 6인이 견훤에게 항복했다.
928년 11월, 견훤은 정병을 이끌고 오어곡성(부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여 명을 죽였다. 이 시기에 고려의 장군 양지, 명식 등 6인이 견훤에게 항복해왔다. 《고려사》 등에서는 이때 왕건이 항복한 장수들의 처자식들을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린 뒤 참형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929
[고려로부터 나주 재탈환, 의성부 공격하여 성주 홍술 살해]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고,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다.
929년, 견훤은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며 해상 거점을 회복했다. 7월에는 친히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을 정도로 홍술의 죽음은 고려에게 큰 손실이었다. 10월에는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지휘관들의 활약으로 패배했다.
930
[고창 전투에서 고려군에 대패,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왕건군과 고창(안동)에서 대치, 유금필의 활약과 호족들의 참전으로 고려군에 대패했다. 이 전투로 8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는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경상도 일대 패권을 상실하며 후백제의 몰락을 알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929년 12월부터 시작된 고창군(안동) 포위는 930년 1월, 병산과 석산에서 왕건과 견훤이 대치하는 고창 전투로 이어졌다. 유금필의 적극적인 공격 주장과 호족들의 막판 합세로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견훤은 8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는 심대한 피해를 입고 참모 김악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한 패권을 확보하지 못하며 후백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932
[고려군, 후백제의 요충지 일모산성 점령]
견훤의 심복 공직이 고려에 투항한 후, 고려 왕건은 일모산성을 공격하여 최종적으로 점령하며 후백제 본토 일부를 잃게 만들었다.
932년 6월, 매곡산성(아미산성)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했다. 이를 계기로 왕건은 7월부터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일모산성(양성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해 11월에 고려군이 일모산성을 최종적으로 점령했다. 이로써 후백제는 충청북도 남부의 중요한 요충지를 잃게 되면서 본토의 일부까지 상실하는 타격을 입었다.
933
[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 유금필에게 대패]
맏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혜산성과 아불진을 공략하여 경주 근처까지 진출했으나,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 결사대 80명에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나는 굴욕을 겪었다.
933년 5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통군으로 이끄는 후백제 군대가 혜산성과 아불진(경주시 부근)을 공략하며 신라의 수도 경주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를 막기 위해 왕건이 급히 출동시킨 유금필은 자신이 거느리던 결사대 80명으로 신검의 대군을 마주쳤으나, 신검의 군대는 유금필군의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나는 전설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 자도에서 재차 공격했으나 금달, 환궁 등 후백제 장군 7명이 사로잡히는 등 또다시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다.
934
[운주 전투 대패, 웅진 이북 30여 성 고려에 항복]
왕건의 운주 진공에 맞서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진군했으나, 유금필의 맹공에 대패하여 술사 종훈 등 주요 인물을 사로잡히고 3천여 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 패배로 웅진 이북의 30여 개 성이 고려에 항복하며 후백제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934년 9월, 왕건이 운주 일대를 빼앗기 위해 진공하자, 견훤은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운주로 진군했다. 그러나 고려군의 기세가 강성함을 간파하고 왕건에게 화의를 청하는 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유금필은 이를 간파하고 왕건에게 공격을 요청, 강력한 경기병 수천명을 이끌고 돌격하여 후백제군을 대패시켰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측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고 3천여 명의 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패배로 웅진 이북의 30여 개의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935
[맏아들 신검의 정변으로 금산사에 유폐된 후 고려로 망명]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맏아들 신검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의 불만으로 정변이 발생하여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이후 탈출하여 고려에 망명 요청, 왕건으로부터 상부의 대우를 받으며 후백제 멸망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935년 3월, 견훤은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난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이에 맏아들 신검과 양검, 용검이 불만을 품고 이찬 능환 등과 음모를 꾸며 정변을 일으켰다. 당시 69세였던 견훤은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어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삼국유사》) 또는 6월(《삼국사기》, 《고려사》)에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의 나주시로 가서 왕건에게 입조를 요청했고, 유금필과 왕만세 등의 도움으로 송악에 도착했다. 왕건은 자신보다 10살 많은 견훤을 '상부'로 부르고 별궁과 '정승' 직위를 주며 극진히 대우했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라 경순왕,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순]
견훤의 망명 이후,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순했다. 이는 후삼국 통일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935년 11월, 견훤의 망명이 후백제에 큰 타격을 주자,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순했다. 이는 후삼국 통일 전쟁의 흐름을 고려에게 유리하게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936
[고려 왕건에게 직접 후백제 정벌 요청]
고려로 망명한 견훤은 직접 왕건에게 후백제 정벌을 요청하며 아들 신검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936년 6월, 견훤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직접 후백제 정벌을 요청하며 자신의 아들 신검이 차지한 후백제를 멸망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왕건은 이에 태자 무와 박술희에게 군사를 이끌고 천안부로 나아가게 했다.
[왕건과 함께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군 대파, 후백제 멸망]
왕건과 함께 10만 대군을 이끌고 일리천(선산)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대패로 신검이 항복하며 후백제는 멸망했다.
936년 9월, 왕건은 10만 7천 5백명(삼국사기) 또는 8만 6천 8백명(고려사)의 대군을 동원하여 견훤과 함께 천안부로 나아가 일리천(선산)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대치했다. 견훤이 직접 기병 1만을 이끌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군의 엄정한 군세와 견훤의 참전으로 후백제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항복하며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고려군은 중군으로 돌격하여 3천 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후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했고, 신검은 양검,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며 후백제는 멸망했다. 왕건은 반란 주동자 능환을 참수하고, 양검과 용검도 죽였으며 신검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후에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백제 멸망 후 등창으로 황산(논산)에서 사망]
후백제 멸망 후 극도의 고뇌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생겨 며칠 만에 황산(논산)의 절에서 사망했다.
936년 10월 1일(음력 9월 8일), 후백제를 멸망시킨 견훤은 극도의 고뇌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생겨 며칠 만에 황산(논산)의 절에서 사망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대규모 전투와 사후처리가 마무리되기에 짧은 기간이라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으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급사 사례는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왕건에 의한 암살설도 제기되지만 증거는 없다. 그의 사망지는 연산현 동쪽 5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로 추정된다.